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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서원과 산지승원

세계문화유산인 정읍 무성서원 다시 보기

by 즐풍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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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 (일) 오후에 탐방

 

 

정읍의 무성서원은 이미 한 번 탐방했으나 정읍에 왔으니 한 번 더 탐방하기로 한다.

무성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 9곳의 서원 중 하나이다.

이미 탐방했다고 해도 다시 보면 새로운 감흥이 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정읍에는 가장 유명한 내장산과 백암산의 단풍은 단풍의 대명사로 손꼽힌다.

계절적으로 가을에 접어들긴 했으나 단풍은 강원도 등 북부권에서 이제 막 피어오른다.

고창을 떠나기 전 마지막 주말인 10월 23~24일에 내장산 단풍을 둘러볼 생각에 뒤로 미룬다.

 

 

 

□ 정읍 무성서원 (井邑 武城書院)

신라 후기의 학자였던 최치원(857∼)과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관리였던 신잠(申潛)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서원으로, 교육기능과 제사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다.
원래는 태산서원이라 하던 것을 숙종 22년(1696)에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무성서원이라 하게 되었다.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을 두고, 뒤에는 제사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사당, 현가루, 동·서재, 비각, 명륜당 등이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 성종 15년(1484)에 세웠고, 문루인 현가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2칸·옆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이곳에는 성종 17년(1486) 이후의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 등의 귀중한 서원자료가 보존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아있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 명칭 변경: 무성서원 → 정읍 무성서원(2011.07.28)

                                                                                                            (출처_문화재청)

 

 

 

‘무성(武城)’은 신라시대 태인의 지명이기도 하지만,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다스렸던 고장인 무성과 같은 이름이기도 하다. 

이는 『논어論語』의 「양화陽貨」 편에서 공자의 제자 자유가 노나라 무성(武城) 현감이 되었는데,

예악(禮樂)으로서 백성들을 잘 다스려 공자가 이 고을을 찾아가니 

마침 현가(絃歌)가 들려와 탄복했다는 일화와 연관된다.

                                                               (출처_[단행본]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록문화와 제향)

 

무성서원에서 약 400여 m 떨어진 곳의 '태산선비문화역사관'에 있는 안내문이다.

서원의 사액은 나라에서 정해주는 줄 알았더니 무성서원을 비롯한 세 개를 올린 이름 중에

무성서원이 낙점되어 사액받은 것이다.

 

 

태산(泰山)이라는 옛 지명과 사우 이름이 있었음에도 ‘무성’이란 이름을 사액한 것과,

‘현가지성(絃歌之聲)’의 고사를 딴 문루 ‘현가루(絃歌樓)’는 이 서원이 읍이 크든 작든 간에

다스림은 반드시 예악으로 해야 한다는 공자의 교화 사상을 나타낸다. 

심학心學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흥학(興學)과 예교(禮敎)를 중심에 두었음을 상징한다.

                                                                                             (출처_[단행본]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록문화와 제향)

현가루

 

 

서원은 조선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유학자 안향을 기리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이 처음이다.

‘백운동서원’은 1550년(명종 5) 이황이 간청하여 임금이 ‘소수서원’이라 이름 짓고 현판을 하사 하여,

우리나라의 첫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뒤, 전국에 잇달아 들어선 ‘서원’은 조선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에너지가 된다. 
‘사림’은 저마다 학문과 행실을 익히고 닦았으며, 서원은 이런 인재를 보다 반듯하게 양성하고 배출했다.

한마디로 이들 ‘사림’의 정치・사회적 활동의 보금자리였다.
18세기 들어서며 서원이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비난과 원성 속에 갖가지 잘못이 불거지고,

사림의 세력이 몰락하면서 조선의 서원은 쇠퇴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1871년 서원철폐령까지 내려지면서 서원은 고작 47곳만 남게 되었다.
                                                                               (출처_[단행본]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록문화와 제향)

 

 

 

 

관리사무실

 

현가루 2층

 

무성서원 강당인 명륜당

 

공덕비와 불망비

 

 

 

신용희 불망비와 비각

 

신용희 불망비 비각의 툇보 사이를 코끼리가 등으로 받치는 형상을 넣어 재미있게 표현했다.

 

신용희 불망비

 

 

 

 

 

현감 서호순 불망비

 

안쪽에서 보는 현가루

 

태산사로 들어가는 내삼문

 

태산사

신라시대의 최치원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태산사이다.

매년 2월 중정일과 8월 중정일에 향사를 지낸다.

지금은 2월 중정일에만 향사를 지내는 데, 문이 잠겨 있어 최치원의 초상은 볼 수 없다..

현재 건물은 헌종 10년(1844)에 세운 것이다.

 

 

내삼문 천장의 자연스럽게 쓴 원목

 

내삼문에서 바라본 강당인 명륜당은 현가루와 내삼문의 양방향으로 공간이 트였다.

 

강당에서 바라보는 내삼문

 

강당은 단청을 하지 않은 단출한 형식이다.

 

무성서원 강당은 교육 공간으로 성종 6년(1475)에  정극인이 향약을 창설하면서 세운 향학당에서 유래한다.

광해군 7년(1615) 태산서원(무성서원의 전신)을 창건할 당시에는 현재와 규모와 형태가 다른

강당 역할을 하는 건물이 있었으나 1825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1828년 태인 현감 서호순의 도움으로 다시 세워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안내문)

 

건물을 지은 지 200년이 다 되어감에 따라 비바람과 세월에 풍화되어 삭은 흔적이 역력하다.

 

무성서원 모현기

 

현가루와 은행나무

 

 

 

무성서원은 조선시대 수많은 선비를 길러 낸, 호남의 대표적 서원이다.
무성서원의 ‘원규’에는 서원 교육의 목표와 내용, 방법 등이 그대로 적혀 있다.
신분과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들어와 배울 수 있었으나 학풍은 매우 엄격했다.
항상 용모를 단정히 해야 했고, 의리를 지키며, 학문에도 힘써야 했다.
‘격몽요결’과 ‘소학’부터 시작해서 ‘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주역’,‘예기’, ‘춘추’를 배웠다.
                                                                                             (출처_ (재)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명륜당

 

불망비각

 

강수재

 

 

 

 

 

 

 

 ‘병오창의 기적비’는 80여 명의 선비들이 항일 의병에 뜻을 모은 기록이다.

 

강수재

강수재는 유생들의 거주 공간이다.

원래는 동쪽 기숙사인 강수재와 서쪽 기숙사인 홍학재가 있었으나 현재는 강수재만 남았다.

이 건물은 고종 24년(1887)에 세워진 것으로 이후 여러 번 수리하였다. (안내문)

 

 

무성서원을 둘러보고 약 400m 거리에 있는 태산선비문화사료관을 잠시 둘러본다.

태산은 이곳의 옛 지명이다.

 

정읍의 고지도

옛날에 만든 지도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위는 북쪽 아래는 남쪽 방향을 두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 9개 서원 중 정읍의 무성서원을 들렸다.

당시 유생들이 이곳에서 요즘의 대학이라 할 만큼 높은 수준의 공부를 했다.

책에 쓰인 것은 모두 한문일 테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이젠 한글 전용 시대로 누구나 쉽게 학문을 익힐 수 있으니 배움에 귀천이 없는 시대다.

이 시대에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