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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서원과 산지승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장성 필암서원

by 즐풍 2023. 1. 4.

2022_226

 

 

 

2022.10.19. (수) 오후 해 질 녘 50분 탐방

 

 

어느 지역이든 지날 일이 있으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재는 꼭 보려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재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오늘 장성에 있는 입암산성을 둘러본 다음 장성호 둘레길까지 탐방했다.

내긴 김에 장성군 황룡면에 있는 필암산을 들려본다.

 

 

□ 장성 필암서원 (長城 筆巖書院)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닦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선조 23년(1590)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세워졌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년(1624)에 다시 지었다. 현종 3년(1662)에 임금께서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려보내 주셨으며, 167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 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 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서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다.
청절당에는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 현판이 걸려있고, 대청마루에는 동춘 송준길이 쓴 현판이 달려있다.

또한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사당의 동쪽에는 경장각이 있는데, 보물로 지정된 서책이나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초부터 전래된 것으로서, 당시 지방교육과 제도 및 사회·경제상,

그리고 학자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 명칭변경: 필암서원 → 장성 필암서원(2011.07.28)

<세계유산등재: 한국의 서원(2019. 7. 6.)>

Ο 유산지역: 소수서원(영주), 남계서원(함양), 옥산서원(경주), 도산서원(안동), 필암서원(장성), 

                    도동서원(달성), 병산서원(안동), 무성서원(정읍), 돈암서원(논산)

                                                                                                                                    (출처_문화재청)

 

 

 

필암서원의 배향인물


□ 하서 김인후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관향이 울주(蔚州)이고 호(號)는 하서 또는 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중종 5년 장성에서 태어나 명종 15년 장성의 본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50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다. 

김인후는 기묘사화를 배경으로 하여 성장하였고, 인종과 만났으나 을사사화가 일어나려 하자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하서는 중종 5년에 태어났다. 

이때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29세였고 기준(奇遵, 1492-1521)은 19세였다. 

하서가 9살이 되었을 때, 기준은 우연히 하서의 영민함을 듣고 직접 만나 조정에서 내린 붓을 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0세 때는 전라도관찰사인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을 만나서 학문을 배웠다. 
18세 때는 기묘사화로 동복에 귀양와 있는 최산두(崔山斗, 1483-1536)에게 학문을 배웠다.

최산두는 김굉필의 문인이었는데, 이때 맺어진 중요한 인연이 양산보였다.

양산보는 18세때 조광조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사화가 일어나자 귀향하여 소쇄원에 살았다.

하서는 19세때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시회(詩會)에 장원을 하게 되며,

24세 때는 성균관에서 공부하면서 이황과 교유하였다.


하서는 중종 35년 31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의 직책을 받았다. 

그리고 중종 38년 4월, 그의 나이 34세에 홍문관(弘文館) 박사 겸 세자시강원(兼世子侍講院)

설서(設書)가 되어 인종과 만난다.

하서와 만났을 때 인종의 나이 28세였으며, 이때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둘러싼 조정에서의 끊임없는

암투 속에서 하서는 세자를 보도(補導)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출처_장성 필암서원 정밀실측보고서 발췌)


□ 고암 양자징 


양자징(梁子澂, 1523-1594)은 소쇄원을 건립한 양산보의 둘째 아들로, 

하서 김인후의 사위이자 수제로 필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양자징은 아버지로부터 『소학』을 배웠으며, 이후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그 후 하서(河西)로부터 소쇄원과 순창 훈몽재(訓蒙齋)에서 본격적으로 배운 후, 

47살인 1569년(선조 2)에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말석을 차지했다.

개성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옛집인 목청전(穆淸殿)을 관리하는 종 9품 참봉(參奉)이라는 낮은 관직에 임명되었다. 

양자징은 중간에 덕종(德宗, 세조의 아들)의 영정을 봉안하는 연은전(延恩殿) 참봉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572년 고향에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59살이 되던 1581년에 영의정 박순(朴淳)에 의해 거창현감에 부임하여 1584년까지 역임한다.
그 후 충청도 석성(石城) 현감으로 자리를 옮겨 1589∼1591년까지 근무하였다가 체임되었다. 

석성현감 체임에 대해 『행장』에는 두 아들이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자 사직하고 귀향했다. 

                                                                                                  (출처_장성 필암서원 정밀실측보고서 발췌)

 

필암서원 입구 정원에 있는 삼연정

 

서원 앞 공터

 

 

 

서원 잎구에 수기와 모양의 하마석

예전에 말 한 필 값은 소 15~17 마리와 교환할 정도였다니 대단한 가치가 있었다.

 

 

 

 

 

정문인 확연루

 

 

 

문루(門樓)의 액호(額號)는 확연루(廓然樓)인데 우암(尤菴)의 글씨이다.

자좌오향 (子坐午向)으로 남향하고 있으며, 상하층 18칸(13평) 규모이다.

상층에는 역천(櫟泉) 송 명흠(宋明欽)의 상량문과 초천(苕泉) 김시찬(金時粲)의 중수기(重修記)가 걸려 있다.

                                                                                                           (출처_장성 필암서원 정밀실측보고서 발췌)

 

2층 누각의 실내

 

천장을 마감한 목재는 뒤틀린 원형 그대로 사용하여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안쪽에서 보는 곽연루

 

 

 

 

 

청절당(淸節堂)

 

강당(講堂)의 액호인 청절당(淸節堂)은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필암 서원 액호는 후면 처마에 걸려있는데, 역시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유생들의 강학공간으로 오좌자형(午坐子向)으로 북향하고 있고 15칸(26평) 규모이며,

중앙에 대청 이 9칸, 좌우에 협실이 각 3칸이다.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걸었는데, 끝에 선생의 ‘백록동학규를 읽고’라는 시가 붙여 있다.

그리고 사제문(賜祭文)3, 교서(敎書) 1, 반교문 (頒敎文) 1, 승배축문(陞配祝文) 1, 전교(傳敎) 1 등이 걸려있다.

또한 집강기(執綱記), 집사 분정기(執事分定記)가 걸려있고 고암선생 배향에 대한 비답(批答)이 있으며,

강수재(講 修齋) 판본과 제봉(霽峯), 송강(松江), 중봉(重峯) 외 제현(諸賢)들의 제영(題詠)이 걸려 있다.

리고 기(記)와 상량문이 또한 걸려 있다. 

                                                                                                       (출처_장성 필암서원 정밀실측보고서 발췌)

 

청절당 북쪽

 

청절당 동쪽

 

청절당 전경

 

진덕재(進德齋)

서원에서 공부하는 원생들이 생활하며 잠을 잤던 동쪽에 위치한 건물로 현판 글씨는 송준길 선생이 썼다.

 

왼쪽 경장각과 태극문양이 있는 내삼문

 

우동사(祐東祠)

 

우동사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주향으로,

그의 사위 고암(鼓巖) 양자징(梁子 澂)을 종향으로 배향한 사우(祠宇)로,

담장을 두른 제향공간의 가운데에서 남향으로 배 치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오량가 가구에 전면에 개방된 퇴칸을 둔 전형적인 사당 건축 형식을 하고 있다.

                                                                                                   (출처_장성 필암서원 정밀실측보고서 발췌)

 

경장각(敬藏閣)

 

경장각은 조선 12대 임금 인종이 내린 묵죽도와 그 판각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이다.

정조 10년(1786)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현판 글씨는 정조가 손수 썼다고 알려져 있다.

임금이 쓴 글씨는 존엄하고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에 현판을 얇은 천으로 가렸다. (안내문)

 

 

진덕재

 

 

 

 

내삼문은 하서 김인후를 배향하는 우동사로 들어가는 정문이나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다.

 

 

 

전사청(典祀廳)

제사에 필요한 물건을 보관하고, 제사 지낼 때 음식을 마련하던 건물

 

사액받은 필암서원 편액

 

 

 

원진각

 

필암서원 유물 전시관

 

 

 

 

 

 

 

 

필암서원을 간단하게 둘러보았다.

고종 8년(1871년) 흥선대원군이 면세 특권으로 인한 국가 재정과 군역회피,

당쟁의 폐단이 서원에 있다고 보고 서원 철폐를 단행할 때 필암서원은 전남지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곳이다.

시대를 지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9개의 서원 중 하나에 선정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