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지역별 탐방/충청도·대전·세종

계백장군 동상과 충장사, 백제군사박물관

by 즐풍 2021. 11. 28.

2021_165

 

 

2021.11.26 (금) 오전에 잠시 탐방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등록된 한국의 서원 8개 가운데 논산의 돈암서원을 둘러봤다.

돈암서원에서 탑정호 출렁다리를 가려면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하는데, 시골은 버스가 뜸하다.

버스를 이용하는 대신 수락산을 가로질러 백제군사박물관을 먼저 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돈암서원에서 수락산 들어가는 들머리가 보이지 않아 적당히 숲을 헤치며 결국 길을 만났다.

 

숲 뒤로 천호산과 멀리 관암산, 빈계산이 조망된다.

 

 

 

 

논산의 수락산은 재래종인 소나무보다 리기다 일색의 외래종 소나무가 많다.

논산뿐만 아니라 전국 대부분의 산엔 리기다소나무가 유독 많다.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지거나, 난방용으로 산의 나무는 가차 없이 벌목돼 민둥산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1960~70년대 산림녹화 사업으로 정부에선 공짜로 리기다 묘목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심은 리기다소나무는 척박한 데서도 잘 자라 산림녹화의 일등 공신이나 소나무로써의 가치는 형편없다.

세월이 지나며 산림이 비옥해지자 활엽수로 변하는 천이 과정을 밟는 것이다.

이렇게 세월이 지나면 리기다소나무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날이 올 것이다.

 

 

논산시 보건소에서 산길 따라 건강 걷기 대회를 개최했었나 보다.

 

이렇게 야자매트까지 깔아놓은 곳이 많다.

 

수락산 정상을 알리는 것은 나무에 철판으로 묶은 간단한 표식이 전부다.

알뜰한 살림 운영이다.

해발 167.2m에 불과한 낮은 산이라 산행이랄 것도 없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보다 시간이 절약된다.

 

그래도 이런 정자까지 설치했으니 나름 훌륭한 일이다.

 

 

 

 

□ 계백 장군

 

계백은 612년~660년(의자왕 21년) 백제 말기의 장군으로
일찍이 사로(仕路)에 나가 벼슬이 달솔(達率:제2품)에 이르렀다.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강점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나제 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 ·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하였다.
고립상태에 빠진 신라는 당(唐) 나라와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하였다.
당나라 고종(高宗)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 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신라를 돕게 하여, 이른바 나당 연합군의 5만 병력이 백제를 치기 시작하였다.
이때 백제의 의자왕은 사태가 위급해지자 계백을 장군으로 삼아 적을 막도록 하였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면서, 이미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살아서 적의 노비(奴婢)가 됨은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여 비장한 결의를 보였다.
황산(黃山) 벌에 이르러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하였다.
이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의 장군 품일(品日)은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니, 관창은 백제군과 싸우다가 생포되었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 보냈으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다.
계백은 신라에 이같이 용감한 소년이 있으니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라 예감하였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예상했던 대로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과 충곡서원(忠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안내문)

 

 

돈암서원에서 나지막한 수락산을 2.8km 이동한 끝에 계백장군 동상에 도착했다.

 

백제의 유물 중 최고의 가치를 가진 백제 금동대향로를 돋을새김 했다.

 

기념탑과 계백장군 동상 사이의 간격이 너무 좁아 기념탑을 온전히 잡아내기 어렵다.

 

 

계백장군의 물러설 줄 모르는 불굴의 기상을 표현한 동상이다.

기마상 길이 5.5m, 높이 6.15m이다.

처음엔 이 동상을 보고 화강암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화강암은 이렇게 정교하게 동상을 만들지 못하다는 걸 안 순간 뭔가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파랗게 녹슨 흔적이 보인다.

그렇다면 청동으로 만든 동상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동상 안내문을 보니 재질은 청동이라고 기록했다.

대부분 동상이 그렇듯 청동 작품 그대로 놓으면 좋은데, 왜 이렇게 칠했을까?

궁금해 관리사무실에 들여 물어봤더니, 팀장은 옅은 카키색 우레탄을 입혔다고 한다.

동상에 하자가 있어서 그러냐고 하니 아니라고 하는 데, 이유는 알지 못한다.

처음 설치했을 때의 사진을 찾아보니 청동색 동상이었는데, 최근에 우레탄을 입힌 것이다.

뭐, 녹슨 동상보다 대리석의 기념탑과 제법 잘 어울리는 카키색이다.

 

 

 

 

 

 

 

 

계백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진 충장사

 

충장사 전경

 

입구의 홍살문

 

주변의 재래종 소나무 

 

충장사를 내려오면 백제군사박물관을 만나게 된다.

 

발열체크를 하고 들어오니 주변에서 견학 온 유치원생들이 재잘거리며 선생님 설명을 듣고 있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나라에 대한 충성을 배우게 된다.

전쟁이 나도 이런 교육 덕분에 도망가지 않고 나라를 지킬 것으로 믿는다. 

 

토성을 쌓는 모습을 재현하는 장면

 

 

 

기마병과 궁수 등 다양한 전사의 모습이다.

 

장군이나 말 모두 든든한 갑옷으로 둘렀다.

전장에서는 말의 목숨도 소중하다.

 

□ 청동금고(靑銅金鼓)

 

고려시대 금고로 개태사 경내에서 집을 짓던 중 발견되었다.

국내에서 발견된 금고 가운데 규모가 큰 편이다.

표면을 연화문과 인동 당초문으로 장식하였다. 

측면 높이 22cm, 지름 102cm   국립 부여박물관 소장  (안내문)

 

종(鐘)을 쇠로 만든 북이라 쇠북 종이라 한다. 

쇠로 만든 북은 이렇게 작은 것은 손에 잡고 방망이로 두드리며 치게 된다.

반면 종루에 설치된 에밀레종처럼 큰 건 대들보에 고정시키고 커다란 나무를 밀어서 친다.

이름에 이런 鐘 자를 많이 쓰는데,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는 나라의 동량으로 자라는 의미가 있겠다.

 

 

군사박물관 전경

 

 

 

 

계백장군 묘지와 황산벌 격전지는 지척에 있으나 보지 못했다.

가자니 귀찮고 안 가니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실, 오늘은 돈암서원과 탑정호 출렁다리 탐방을 목표로 했기에 두 곳은 건너뛰었다.

언젠가 다시 오면 그때 기회를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