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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목포 해양유물전시관 정말 대단해

by 즐풍 2021. 11. 14.

 

 

 

2021.9.28 (화)  오후에 탐방

 

 

목포 유달산을 시작으로 달성공원 안에 있는 조각공원, 갓바위, 입암산, 예술문화회관을 둘러봤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예술문화회관 건너편에 있는 해양유물전시관이다.

해양유물전시관은 들어가 보지 않아도 바닷속에서 건져낸 유물이란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관람료는 무료이고, 09:00~18:00까지 관람할 수 있으며, 월요일은 휴관이다.

 

 

 

□ 아시아 최대 수중고고학 박물관 [목포해양유물전시관]

 

목포해양유물전시관의 상설전시는 제1전시실(한국 해양교류실), 제2전시실(아시아 해양교류실),
제3전시실(세계 배의 역사실), 제4전시실(한국 배의 역사실) 등 4개실로 구성되었다.
수중발굴 난파선 4척과 유물(자료) 7,700여 점을 전시하며, 주기적으로 새로운 유물과 영상 콘텐츠 전시,
연출기법 개선을 통해 보다 나은 서비스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외에 다양한 주제의 특별전이 열리는 기획전시,
어린이들의 체험형 놀이공간인 어린이체험관이 있다.
야외에는 전통 선박들이 바다 풍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출처_목포해양유물전시관]

 

 

야오이계 항아리, 사천 늑도,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굽다리 접시(왼쪽), 접시 달린 병(오른쪽), 둘 다 일본 계통 그릇, 6세기, 부안 죽막동

 

 

 

청동 용 구름무늬 거울

진도 명랑대첩로 해저 

시대 미상, 크기: 길이 22.5cm, 두께 0.6cm  

원형(圓形)의 동경으로 중앙에 평두형의 뉴紐가 위치하며 중판양식(重板樣式)의 연화문이
가득 시문된 화엽좌(化葉座)를 가지고 있다. 문양대 내구에는 하늘을 나는 두 마리 용이
태극화염(太極火炎)을 내뿜는 모습을 서로 대칭되게 배치하고 돌선으로 구획한 외구에는 운문을 시문하였다. (안내문)

 

 

 

마도 1호선

고려 1207~1208년

 

완도선 복원 모형(1/10)

고려, 11~12세기

추정 길이 9m, 너비 3.5m, 깊이 1.7m

잔존 길이 7.3m, 너비 3.4m, 깊이 1.6m

완도 약산면 어두리 해저 15m

 

뒤, 소소승자총통 조선 1588년 3월, 진도 명랑대첩로 해저 

앞, 소소승자총통 조선 1588년 5월, 진도 명랑대첩로 해저 

 

 

청자 포장 방법

고려 11세기 후반~12세기,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이런 목간이 함께 발견되면서 어디에서 생산해 어디로 가는지 대략적인 정보가 확인된다.

페인트보다 칠이 약할 거 같은 먹글씨도 알아볼 정도로 판독이 가능한 게 있으니 기적이다.

 

 

완도선의 해남 청자가 완전한 형태로 인양된 것만 해도 3만 점이라고 하니 대단하다.

당시 바닷길이 열렸던 완도, 진도, 군산, 태안 등 해저에서 발굴된 모든 것을 합치면 더 많다.

아직도 수중에 찾지 못한 난파선이 분명 있을 테니 언젠가 발견되면 발굴될 것이다.

당시 바다로 수장되며 희생된 사람은 불쌍하고 애석하기 짝이 없다.

그런 희생에 따른 유물을 수습하면서 국보급 내지는 보물급의 문화재를 대량으로 소요하게 됐다.

이렇게 온전한 상태는 이런 유물이 아니고는 얻기 어려운 실정이다.

단일 품목으로는 가장 많은 유물인 셈이다.

 

 

 

 

 

 

발견 당시를 재현한 모형으로 나무와 새끼줄을 이용한 운송방법이 매우 정교하다.

잘 밀착된 상태라 바닷속에서도 서로 부딪쳐 깨지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 남았다.

 

 

 

목간에 쓰인 글씨는 여전히 잘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남았다.

 

선원들이 식사를 마련할 주방 도구이겠다.

 

 

 

 

 

 

 

신안선의 항로

 

중국과 일본 사이의 바닷길은 북로와 남로가 있었다.

북로는 중국 경원에서 고려 연해를 거쳐 일본으로 가는 길이며,

남로는 동중국해를 횡단하여 일본으로 향하는 항로다.

신안선은 침몰 지점으로 보아 북로를 이용했거나 남로를 항해하던 중

고려 연해까지 표류하여 침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닷길은 계절풍을 따라 순조롭게 항해할 경우 목적지까지 쉽게 항해할 수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 경원에서 고려 경내까지 3일 정도면 도착했고,

일본까지는 불과 7~8일이 걸렸다고 한다.

때로는 북로로 고려 연해에 이르러 흑산도, 탐라 등에서 기항하기도 했다.

남로로 항해하던 선박들 가운데도 태풍을 만나 고려에 표류, 포착하기도 했다. (안내문)

 

 

 

 

 

 

 

비밀의 열쇠, 목간에 적힌 기록들

 

신안선 비밀의 열쇠는 목간(木简)이다.

목간은 문자가 적힌 나무 조각으로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쓰인다.

신안선에서 발견된 목간은 약 360점으로 무역품 화물표로 쓰였으며, 

앞면과 뒷면에 물품 이름과 수량, 화물주, 날짜 등이 적혀 있다.

그중 121점에서 1323년을 뜻하는 「지치 3년」, 4월 2일부터 6월 3일까지

날짜가 쓰여 있어 신안선의 항해 시기 또는 무역품 구입 시기를 알 수 있다.  (안내문)

 

 

 

 

 

 

금속 원자재

 

신안선에는 공예품의 원료인 주석정과 황동판 등 금속 원자재가 349점 실려 있었다.

주석은 귀한 금속으로 고대부터 대부분 납과 합금하여 제품을 만들거나

그릇 표면을 도금하는 재료로 쓰였다.

주석정 하나의 무게는 140~1,330g이다.

타원형과 정방형 두 종류이며 중앙에 구멍이 뚫려 있다.

정방형 주석정 둥에는 제작 장인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 있다. (안내문)

 

 

 

 

 

 

 

 

시간을 초월한 문구류 사랑

 

동아시아는 고대부터 문구류를 사용하였다.

초기에는 돌, 나무, 토기, 기와 등에 칼을 이용하여 문자를 새겼다.

종이가 발명된 이후부터는 다양한 문구류가 만들어졌고, 더불어 문화예술도 크게 발전하였다.

문구류는 문인, 화가 등 지식인들의 필수품이었고,

통치자들이 나라를 운영하고 문서를 기록할 때 사용하던 중요한 도구였다.

 

문구류는 문방사우라 하여 붓, 먹통, 종이, 벼루가 필수이다.

이외에 연적, 붓통, 붓을 거는 필가(筆架), 벼루 받침대, 도장 등이 있다.

신안선에도 다양한 문구류가 있었다.

이 가운데 용 모양 붓걸이는 중국 푸젠성 난지아오장 출토품,

일본 교토의 쇼덴에이겐인·도쿠가와 미술관 소장품과 비슷하다. (안내문)

 

 

 

 

푸른 옥빛, 중국 용천요

 

신안선의 용천요 청자는 12,000여 점으로 선적 도자기의 49%나 된다.

용천요는 저장성에 위치한 중국의 대표적인 청자 생산지로써 이곳에서 생산된 청자는

아시아 무역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중국뿐만 아니라 고려, 일본,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지중해 동부,

아프리카 동부까지 수출되었다.

북송 요주요의 영향을 받았고, 남송 말기부터 청나라 때까지 800여 년 동안 청자를 생산했다.

최고의 전성기는 남송 후기부터 원나라 때이다.

특히 남송 때의 분청 색 고급 청자는 황실과 귀족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원나라 때 용천요 청자는 청록색을 띠었고, 특색 있는 장식기법을 사용하였다. (안내문)

 

 

 

 

 

 

 

백자 봉황 모양 주전자

중국 원, 14세기 전반

신안 증도 해저 20m(신안선)

 

청자 연잎 모양 뚜껑이 있는 항아리

중국 원, 14세기 전반

신안 증도 해저 20m(신안선)

 

 

 

 

 

 

 

 

 

 

 

 

 

 

 

 

 

 

 

 

 

 

 

 

 

 

판옥선

 

판옥선은 1555년 명종 10년에 개발된 조선 수군의 주력함으로 임진왜란 때 벌어진 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격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전선이라 개명되었으며, 구한말 삼도 통제영과

각도의 병영과 수영이 해체될 때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안내문)

 

거북선

 

거북선은 조선 시대 전투함으로 이 배에 대한 기록은 조선 초기 「태종실록」에 처음 나타난다.

이순신 장군은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전하을 만들고 수리하는 한편

일본의 침략을 염려하여 특수 전함인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거북선은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서 연이어 맹활약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시대마다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조선 후기까지 각 수영에 배치되어 역할을 다했다. (안내문)

 

조선통신사선, 조선 후기 (1607~1811년)

 

약 200년 동안 12회에 걸쳐 사신을 싣고 일본을 오간 배

실물 크기: 길이 33.58m, 너비 9.52m, 깊이 5.15m, 축적 1/12

 

 

 

조선왕조를 건너뛰어 고려시대의 유물을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

태풍 등 여러 원인으로 침몰했기에 그 수장품을 오늘날 마주한 것이다.

돈 주고 실 수 없는 국보급 유물은 대대로 전해질 것이다.

당시 중국이나 일본 또는 국내산이 평양이나 개성, 한양 등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침몰했을 것이다.

왕실이나 민가에 팔려나갔다면 대부분은 지금까지 전해지지 못할 명품이다.

앞으로도 이런 국보급 유물이 더 많이 발견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