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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과 안용복 기념관 탐방

by 즐풍 2022.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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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27 (수) 오후에 죽도 관광 후 잠시 탐방

 

 

죽도 탐방을 마치고 돌아와 인근에 있는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으로 왔다.

기념관의 학예연구원의 친절한 안내로 독도의 역사적 환경적 중요성과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를 지켜낸

의로운 헌신에 대하여 감명 깊게 들었다.

자세한 것은 이곳 안내문 등을 올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조석종 관장 님의 환영 인사말로 이곳의 대략적인 성격을 알 수 있다.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은 관음도가 잘 내려다 보이는 산 위에 조성되었다.

맑은 날 이곳 전망대에서 독도까지 보인다고 하나 오늘은 날씨가 흐려 볼 수 없었다.

 

아래쪽엔 국민여가 캠핑장이 설치되어 있다.

 

 

 

 

 

 

 

 

 

 

 

 

 


1954년 독도의용수비대와 한진호 씨 등이 독도 동도에 '한국령韓國領'이라는 글씨를 암벽에 새겼다고 한다.

이 글자는 독도에 가서 보지 못했다.

아쉽게도 선착장과 방향이 틀려 바다에서나 볼 수 있다.

 

독도의용수비대가 갖고 있던 박격포와 기관총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하자진 독도의용수비대 대원의 훈장증

 

 

 

기념관에서 나와 가까운 죽도를 조망한다.

독도 방향은 연한 해무가 끼어 아예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잠시 후 가게 될 안용복 기념관

 

원형의 스테인리스에 "대한민국 독도" 글자가 반사되어 제대로 보인다.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에서 선물로 제공한 연필 세 자루

 

 

□ 안용복 

 

숙종 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일본 막부 정부가 자인하도록 활약한 민간 외교가이자 어부이다. 

동래부 출신으로 홀어머니 아래에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엄한 가훈을 받고 자랐다. 

동래 수군으로 들어가 능로군(能櫓軍)으로 복무하면서 부산의 왜관(倭館)에 자주 출입해 일본말을 잘하였다.

1693년(숙종 19) 동래 어민 40여 명과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고기를 잡기 위해 침입한 일본 어민을 힐책하다가 부하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으로 잡혀갔다. 

이때 호키주[伯耆州] 태수와 에도막부에게 울릉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하고,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쌀과 베의 도량을 속이는 등 농락이 심한 것 등을 밝혀,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받아내었다.

서계를 가지고 오는 도중 나가사키[長崎]에서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빼앗겼다.

대마도주는 울릉도를 차지할 계획으로 다케시마[竹島] 문서를 위조해,

같은 해 9월 차왜(差倭)를 동래에 보내 안용복을 송환하는 동시에,

예조에 서계를 보내 조선의 어민이 일본 영토인 다케시마에서 고기 잡는 것을 금지시켜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좌의정 목내선(睦來善)과 우의정 민암(閔黯)이 무사주의의 외교 정책을 취해, 

비워둔 땅으로 인해 왜인과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좋지 않은 계책이라 하였다. 

멀리 떨어진 섬에 왕래를 금지하는 조선 정부의 공도정책(空島政策: 주민들이 섬을 도피처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비워두는 정책)에 일본도 협조하도록 권하는 예조 복서(禮曹覆書)를 작성하여 동래의 일본 사신에게 보냈다.

내용에는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혀두었다.

이듬해인 1694년 8월에 대마도주는 다시 사신을 보내 예조 복서를 반환하면서,

울릉도라는 말을 빼고 다시 작성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영의정 남구만(南九萬), 우의정 윤지완(尹趾完)이 강경한 태도로 삼척 첨사로 하여금 울릉도를 조사시켰다.

접위관을 동래에 보내 일본이 남의 영토에 드나든 무례함을 책하는 예조 서계를 차왜에게 전달하였다.

1696년 봄에 안용복은 다시 10여 명의 어부들과 울릉도에 고기 잡으러 나갔다가 

마침 어로중인 일본 어선을 발견하였다. 

이에 송도(松島)까지 추격해 조선의 영토에 들어와 고기를 잡는 침범 사실을 문책하였다. 

또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島監稅官)이라 자칭하고, 

일본 호키주에 가서 태수에게 국경을 침범한 사실을 항의하고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나라의 허락 없이 국제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조정에 압송되어 사형까지 논의되었으나 

남구만의 간곡한 만류로 귀양갔다. 

이듬해인 1697년 대마도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울릉도를 조선 땅으로 확인한다는 막부의 통지를 보냈으나, 

안용복의 죄는 풀리지 않았다.
안용복의 활약으로 철종 때까지는 울릉도에 대한 분쟁이 없었다. 

한 어부로서 나라의 일에 크게 공헌한 모범이 된다.

                                                                                (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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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들이 독도에 들어온 야만인을 혼내는 장면이다.

 

 

 

 

 

 

 

 

 

 

 

 

 

 

 

 

 

 

 

 

 

 

 

 

 

 

 

 

 

 

소련과 함께 38선을 가른 미군은 대한민국에서 점령군 행세를 했다.

1948년 6월 8일 미 공군은 독도를 무차별적으로 폭격하는 사격훈련을 했다.

이 사고로 한국인 30여 명이 희생되고 12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이런 불행한 사건에 미국은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너무나 자랑스러운 안용복 선생과 당시 어부들의 군상

 

 

 

(출처_(재)독도의용수비대기념사업회)

 

 

 

 

 

독도의용수비대는 당시 전란 중이던 국가의 지원 없이 울릉도 출신의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했다.

일본의 불법 침입에 대하 세 차례 교전을 하는 등 대한민국 영토수호에 헌신했다.

안용복은 일개 민초임에도 우리의 바다와 영토를 지키기 위해 두 차례나 일본으로 건너가 우리 땅임을 확인했다.

이렇게 영토 주권을 주장한 기개와 자료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자료에 그대로 남아 있다.

모두 자랑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