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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군산 안중근 의사 여순감옥 전시관

by 즐풍 2022. 6. 28.

 

 

2022.6.17 (금)  11:00~11:20, 20여 분 탐방

 

 

□ 안중근(安重根)

 

1907년 이전에는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 계몽운동을 벌였고, 그 뒤 러시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1909년 초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조선침략의 원흉으로 지목하여 하얼빈에서 사살했다.

초년
할아버지는 진해현감을 지낸 인수(仁壽)이며, 아버지는 진사 태훈(泰勳)이다.
태어날 때 배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다.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마쳤다고 한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천주교를 통해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17세에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다.

계몽운동 및 의병활동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천주교 계열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했다. 

1907년에는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했다.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일신협약의 체결,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연해주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독립전쟁과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의병을 모았다.

의병 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이범윤을 총독, 김두성(金斗星)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참모중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두만강 부근의 노브키에프스크를 근거지로 훈련을 하면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했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 군사령관으로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그 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부근에서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1]에게 총탄 3발을 맞고 피격 20여 분 만에 사망하였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에서 함께 의병활동을 하던 김기룡·황병길·강기순·유치현·박봉석·백낙규·강두찬·

김백춘·김춘화·정원식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9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원동보 遠東報〉와 〈대동공보 大東共報〉를 통해 이토가 북만주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회견하기 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가는 순간 권총을 쏘아,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이어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만철(滿鐵) 이사 다나카[田中淸太郞] 

등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과 재판 과정에서 한국의병 참모중장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며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거사 동기를 밝혔다.

러시아 관헌의 조사를 받고 일본측에 인계되어 뤼순 감옥으로 옮겨졌다.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여러 차례의 재판을 받는 동안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했고 참모중장으로서 이토를 죽였으니

이 법정에서 취조받을 의무가 없다"라고 재판을 부정하고, 자신을 전쟁포로로 취급하여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일본 검찰에게 이토의 죄상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년 11월에 한일협약 5개조를 체결한 일,

1907년 7월 한일 신협약 7개조를 체결한 일, 양민을 살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로 제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밝혔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출처_다음백과 편집)
 

 

 

 

 

 

 

 

안중근 의사가 1906년 한성에서 홍석구 신부(빌렘 wilhelm, 프랑스인)에게 보낸 엽서

 

 

 

안중근 의사에 대해 즐풍이 한두 마디 말을 덧붙이면 누가 될지 몰라 아무 말도 안 하기로 한다.

죽음도 불사한 안 의사의 기개에 감탄하며 이런 분들이 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

 

□ 임병찬(林炳瓚)

출생 1851.2.5 전북 옥구, 사망 1916.5.23.

요약 임병찬은 고종의 밀명을 받아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계획했다가 실패했던 한말 의병장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최익현과 더불어 의거 계획을 수립했다.

4월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대규모 의병을 일으켜 관곡을 취해 군량으로 삼고 진용을 정비해갔으나

6월 격전 중에 최익현과 함께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후 쓰시마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1월 귀국했다.

1912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전라도에서 시작한 독립 의금부를 전국으로 확대·조직하여 항일 의병운동을 계획했다.

같은 해 5월 동지 김창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독립의군부 조직을 자백함으로써 그 운동은 실패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 되었다.      (출처_다음백과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