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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지질공원 탐방/그외 국가지질공원

부산 백양산과 국가지질공원 탐방

by 즐풍 2021. 9. 4.

2021_126

 

 

 

2021.8.30 (월) 13:23~18:27 (5시간 4분 산행, 10.5km 이동, 평속 2.3km/h) 흐림

 

 

오전에 경주국립공원인 단석산을 짧게 오르고, 부산으로 건너와 국가지질공원인 백양산을 오른다.

부산(釜山)은 알고 보면 산이 많아 농담으로 부산(富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많은 산 중에 꼭 봐야 할 산으로 금정산, 백양산, 장산이라고 생각한다.

금정산은 국립공원을 추진 중이고, 백양산, 장산은 국가지질공원에 속한다.

금정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 시립, 도립공원도 안 거친 상태에서 바로 국립공원으로 직행하는 셈이다.

이미 두 번 다녀온 금정산은 손바닥 꿰듯 환한 데, 알고 보면 국가지질공원이다.

이번에 오르게 될 백양산은 퇴적암의 석회질 고토양층이 녹아 만들어진 석회동굴, 폭포, 돌서렁, 토르 등의

독특한 지형을 만끽할 수 있는 트레킹형 명소이자 국가지질공원이다.

내일 오르게 될 장산까지 부산의 3대 명산 모두가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산이다.

 

 

□ 백양산

 

백양산은 부산 3대 명산(금정산, 장산, 백양산) 중 하나이다. 

백양산에는 약 8천만 년 전 화산활동으로 지하에서 분출된 물질들이 쌓여 형성된 화산쇄설암, 

과거 호수였던 시기에 형성된 퇴적암, 

지하 깊은 곳에서 관입한 화강암 등 다양한 암석들이 분포하고 있어, 이 일대의 전반적인 지질 변천사를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석회 성분의 고토양층이 녹아서 만들어진 석회동굴과 폭포, 돌서렁(너덜겅), 토르, 인셀베르그 등 

다양한 지형 경관을 관찰할 수 있으며, 삼림욕과 생태 체험학습도 즐길 수 있다.

                                                                                                                     [출처_국가지질공원]

 

 

백양산 등산 코스

 

 

 

 

 

 

 

 

성지곡수원지 둑은 탐방로로 이용되고 있다.

비록 일제 강점기에 만들었다고 하나 부산 시민과 밀접한 관계를 맺던 수원지로

지금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수원지로 들어가는 계곡엔 발을 담글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을 찾는 탐방객이 많다. 

 

편백나무 숲

 

 

□ 사명대사 유정(1544~1610)

 

본관은 풍천. 속명은 임응규(任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 법명은 유정(惟政).

경상남도 밀양 출신.

 

아버지는 수성(守成)이다.

임진왜란 때에 승병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일본과의 외교 및 부국 강병책에 의해 국가에 크게 기여하였다.

1558년(명종 13)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3년 뒤 승과(僧科)에 합격하자, 박순(朴淳), 임제(林悌) 등의 유생들과 사귀었으며,

재상인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 『장자』, 『문자』, 『열자』와 시를 배웠다.

그 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이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하였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도를 닦았다.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아, 1586년(선조 19)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연류되었다는 모함을 받았으나, 강릉의 유생들이 무죄를 항소하여 석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유점사(楡岾寺)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 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우자,

선조는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 뒤 전후 네 차례에 걸쳐 대표로 나아가 적진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가졌다.

제1차 회담(1594년 4월 13∼16일)·제2차 회담(1594년 7월 12∼16일)·제3차 회담(1594년 12월 23일)·

제4차 회담(1597년 3월 18일)에서, 강화 5 조약으로 제시된 ‘천자와 결혼할 것, 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전과 같이 교린 할 것, 왕자 1명을 일본에 영주 하게 할 것, 조선의 대신·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을

하나하나 논리적인 담판으로 물리쳤다.

제2차 회담 후, 선조에게 회담의 전말과 적의 동정 및 대처 방안을 내용으로 하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국민을 총동원하여 빈틈없는 작전을 세울 것, 적과 교린(交隣)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동시에 민력(民力)을 무장할 것, 군수 무기를 준비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한, 1595년에 올린 을미상소의 주요 내용은, 탐관오리들을 소탕할 것, 국세 회복을 위해 방어책을 세울 것,

인물 본위로 등용할 것, 군정(軍政)과 중농정책을 확립할 것, 산성을 수축하고 군량·마초·방어무기를 준비할 것,

승려도 국가 수비의 일익을 담당하게 할 것 등이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岳堅山城)·

이숭산성(李崇山城, 또는 美崇山城)·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또한, 1594년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였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비장하였다.

선조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렸다.

 

1604년 휴정의 부음을 받고 가던 중, 선조의 명으로 일본에 가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같은 해 10월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1권 등이 있다.

                                                                                                              [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


사명대사상이 세워진 동산

 

 

 

사명대사 동상

 

 

 

 

 

계곡으로 올라가는 길

 

부산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성지곡계곡의 편백나무 숲은 아름다운 숲 2017년 전국대회와 공존하여라 수상한 명소이다.

 

 

 

 

 

이곳에서 좀 더 내려가면 돌서낭(너덜겅)이 있으나 특별할 것도 없겠다 싶어 생략한다.

이 돌서낭은 백양산 국가지질공원의 하나이다.

 

 

 

 

드디어 덕석바위를 만난다.

 

덕석바위는 잠시 후 보게 될 베틀굴과 거의 같은 공간에 있다.

 

 

 

덕석바위의 정점은 이런 마당바위 형태로 굉장히 큰 바위다.

이 바위 왼쪽 나무 숲 아래 있는 여성분들에게 베틀굴의 위치를 물어 겨우 찾았다.

 

 

 

석회동굴은 베틀굴이라고도 한다.

덕석바위 아래쪽에 있는 데, 유감스럽게도 이정표가 없어 존재 자체를 모르면 찾을 수 없다.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면 최소한 이정표로 안내하는 게 도리이다.

 

베틀굴 입구 높이는 약 1.8m 정도의 높이로 대부분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들어갈 정도의 높이다.

 

안쪽은 이렇게 사각 형태로 인위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임진왜란 당시 숨어 지내기 좋게 벽면은 일부 다듬었는지도 모르겠다.

안쪽으로 길이가 25m라니 무척 긴 동물인데, 전등이 없어 입구에서 있다가 나왔다.

일반적인 석회동굴과 달리 호수 퇴적층에서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동굴이라고 한다.

 

석회동굴(베틀굴)

 

작은 십자형태의 동굴로 보이나 안쪽은 직사각형 구조이다.

 

습기가 차 번뜩이는 동굴 구조

 

동굴 입구 안쪽의 천정 

 

천정은 이런 형태의 바위다.

 

동굴 밖으로도 이렇게 작은 구멍이 연결되어 있어 외부의 상태를 살필 수 있다.

백양산에서 가장 볼만한 곳으로 이 베틀굴로 인해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겠단 생각이 들 만큼 가치가 높다.

베틀굴과 덕석바위를 방문하지 않고 백양산을 다녀갔다고 말하지 말라.

 

베틀굴을 빠져나와 왼쪽 바위 곁으로 올라간다.

더 내려다봐야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건 없으니 온 길 되돌아가며 백양산으로 길을 낸다.

 

백양산 오르는 곳의 바위 군락

 

작은 나무꾼도 이젠 가을의 전령사가 되어 단풍색을 내보인다.

아이만큼 귀엽게 보인다.


드디어 백양산에서 만나게 될 첫 번째 봉우리인 매봉이 가깝게 보인다.

지난 이틀간 영축산, 고헌산, 문복산, 남산에 이어 오늘 오전에 단석산을 끝내고 백양산을 오르려니 힘들다.

사실 지난 이틀을 꽉 채워 산행했고 결과로 보면 오늘도 그렇다.

지금부터는 악으로 깡으로 걷는다.

 

매봉이봉도 아니고 매봉이의 이는 도대체 뭐람?

 

옆으로 새는 능선이 멋지다.

 

 

 

네가 쑥부쟁이 꽃이더냐?

 

 

 

불응령(불티랑)에 올라간 이 녀석은 누구냐?

 

중봉이었나?

 

 

 

드디어 백양산 정상에 도착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어느 발자국 하나도 안 빠트리고 올라왔다.

정상 고도는 641.3m로 그리 높지 않다만 오늘은 힘들었다.

 

정상 표지석이 잇는 걸 보니 이쪽이 앞이다.

 

뒤엔 한자로 썼고....

 

 

 

 

 

 

 

 

하산길에 만나는 애진봉이다.

몇 발자국 안 되는 저 애진봉 가기도 귀찮아 뒤돌아 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오전에 경주 단석산에선 잠깐 비가 내렸는데, 부산 백양산은 안개가 자욱해 시가지가 잘 안 보인다.

 

헬기장을 지나기도 한다.

 

 

 

베틀굴과 같은 종류의 바위인가?

 

웬 돌담이 이렇게 길까?

 

 

 

솔잎이 떨어졌어도 수북이 쌓인 곳이 공룡발자국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2006년 학술 용역조차 결과, 백악기 말기 공룡발자국 화석지로 확인되었다.

오리부리룡류가 서식했다 것으로 추정됨, 공룡발자국은 약 120개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안내문)

 

 

하산길은 무척이나 지루하고 길다.

일부 구간은 철망이 있는 철책선을 따라 이동하기도 했고, 일부는 임도를 따라 지루하게 걸었다.

산행보다 산책이 더 좋은 백양산이다.

 

 

궁금했던 백양산은 덕석바위나 배틀굴의 신비로움이 큰 산이다.

나머지 산행은 3일간 계속된 등산으로 좀 힘들고 지루했다.

그래도 부산의 3대 명산에 속한 백양산을 탔으니 기억에 남을 일이다.

즐풍, 수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