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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경상도·부산·울산·대구

함안 서산서원과 함안조씨 독립유공자비, 그리고 채미정

by 즐풍 2021. 7. 4.

 

 

2021.6.22. (화). 오전에 잠시 탐방

 

 

경남 함안의 방어산 산행을 끝내고 이동하는 경로에 서산서원이 보여 잠시 들린다.

함안은 함안 조씨의 본으로 명문가인 조씨 가문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은 곳이다.

지금부터 보게 될 서산서원, 함안 조씨 독립유공자비, 채미정 등이 한 곳에 몰려 있다.

이곳을 둘러보며 내용은 대부분의 안내문으로 대신한다.

 

 

□ 서산서원

 

생육신 조려 유적지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왕위에  오른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뺏기자 이에 비분강개하여 

한 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를 지킨 생육신 경은 이맹진, 어계 조려, 관란 원효, 매월당 김시습, 문두 성담수, 

추강 남효온의 충절을 기리고 배향하는 서산서원과 부속 건물인 채미정, 옛터로 추정되는 원동재로 구성된다.

서산서원은 숙종 29년(1703)에 창건되고 숙종 39년(1713)에 사액되었으며,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될 때까지 생육신을 제향 한 곳이다. 

1984년 지금의 위치에 이전, 복원 된 후 지금까지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국천제를 지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충의사, 숭의당, 양정당, 상의제 등이 있다.

채미정은 영조 11년(1735)에 서원의 강당 동편 담장 밖에 지은 건물로 어제 조려 선생이 일찍이 

읊은 구일등고시를 백이와 숙제의 채미가에 비유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
서산서원이 이전, 복원되기 전까지 생육신의 향사를 지내던 곳이다.

원동제는 서산서원의 옛터로 추정되는데, 지금 위치에서 약 50m 거리에 있는 원동재에서 뒤편 대나무 숲과 

채미정까지 옛터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생육신 조려 유적지는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에 대한 향사를 지속적으로 거행하고 있는 상징적 공간이다.

생육신의 역사적 삶이 교훈으로 나올 수 있도록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여 보전하고 있다.  (안내문)

 

 

 

연꽃 연못과 홍교(무지개다리)

 

 

 

 

 

서산사원은 생육신의 충절을 찬양하고 덕의를 숭모코자 세운 서원으로, 조려가 은돈 소요하던 백이산 아래에 

경상도의 유생 곽억령 등 영남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1703년 생육신을 봉향을 서원을 세웠다.

서원의 건립제가를 상서하여 윤허를 받아 생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영령을 위로하게 된 곳이다.

숭의문은 서원 초입에 세워져 있는 외삼문으로 주출입문이며, 서원의 전면은 강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 공간, 

후면은 사당을 중심으로 한 제향 공간이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이다. 

강학 공간인 강당은 숭의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인 양정당과 상의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당인 숭의당은 서원을 대표하는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며 기능적으로 유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이다.

동재인 양정당은 현관의 숙소로, 서재인 상의재는 유생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재향 공간인 사당 건물은 충의사를 중심으로 좌측의 소청각은 생육신의 유물을 안치, 보관하는 곳이고,

우측의 전사청은 제사를 준비하고 제기와 제를 보관하는 곳이다.  (안내문)

 

숭의문

 

 

 

강당

 

 

 

육각정 쉼터

 

경앙문, 사당으로 통하는 내삼문

 

생육신 사적비

 

 

 

조려 선생 사적비

 

 

 

전사청, 제사를 준비하는 제수를 보관하는 곳

 

소청각, 생육신의 유물을 보관 안치한 곳

 

 

 

항안은 진정한 선생의 고향이다.

후손이 모여 거주하니 선생과 선대의 묘소가 서로 마주하여 바라보이는 곳이요 서원과 정자 사이는 

모두가 선생께서 지팡이를 끌고 조석으로 소요하던 곳이다. 

백이산이 타향에 있지 않고 함안에 있으며 다른 곳이 아닌 선생이 마음에 있다. 

산의 이름을 백이라고 한 것은 선생과 연관을 지었던 것 같으며 선생이 내면적인 근심과 사려는 깊었다.

중양절에 산에 올라 국화 꽃송이를 꺾어 하늘을 우러러 옛일을 회상하며 읊은 시에 태평성대를 볼 수 없는 것을 

한탄하신 것을 백이 숙제의 채미가와 그 심사가 같다.

여기 서원에 왕래하는 많은 선비들이 다시 이 정자를 건립해서 치성을 지극히 하는 것은 남기신 발자취를 드러내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보고 또 오래도록 기억케 함이다.

기묘년에 나 영석은 의령현감으로 재직 중 여기에 와 선대의 사당에 절을 울리고 채미정이 올라 동고시를 읊고 

백이산을 바라보며 선생의 유풍을 가슴속에 새겼으며 여러 종족들께서 함께 정자 아래 화동하여 돈독히 정의를 나누고 

친근히 술을 마시고 시를 엮으며 즐겁게 지내왔다. 

그후 종족들께서 정자의 기문을 짓기를 멍하니 혼자 생각하기를 만약 이 글이 문설주 위에 게양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선생의 후손 작품인 것을 알게 된다면 이 얼마나 영광이며 다행한 일이 아니겠느냐?

사양하지 않고 이 기문은 쓴다.  (안내문)

 

충의사, 제향 공간인 사당

 

전사청

 

동재인 양정당

헌관의 숙소

 

양정당 편액

 

 

 

 

 

 

 

서산서원 옆은 함안 조씨 독립유공자 공적비를 세웠다.

 

13명의 충신 사적을 적은 공적비

 

 

 

정려문 ?

 

 

한풍루 정자

 

한풍루와 채미정

 

 

□ 채미정

 

채미정의 기문은 조영석(1686~1761) 선생이 지었다.

호는 관아재, 석계산인으로 1713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돈녕부터 도정을 지냈으며 후에이 조 참판에 가중됐다.

1742년 조려선생의 문집인  <어계집>을 발간했다. 

1748년 숙종의 어진을 그리라는 명을 받았으나 기술로 임금을 섬기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며 사양해 귀양을 가기도 했다.

기문은 의령 현감으로 있을 때 지었다.

<관아재화첩>에 의하면 본래 인물에 뛰어났고 선수를 잘 그려 명작을 많이 남겼으며 백악산 아래에 살면서 

정선, 이병연과 이웃으로 시화를 논했다고 나온다.

조선 중기의 전통 화법을 계승하면서 남중화법을 약간 가미한 화풍으로 조선 후기 문인화의 전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사제첩>과 <장기도>는 뒤에 김홍도 등이 그린 풍속화의 유행을 예시하는 작품으로서 주목되며 

대표작으로 <유음납량도>, <강상조어도> 등이 있고 함안박물관에서 <선유도>를 전시 예정이다.  (안내문)

 

채미정

 

 

 

내실

 

 

 

차량 회수를 위해 다시 돌아온 13 충신 공적비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 선생과 생육신을 기리는 서산서원을 둘러봤다.

지금 이 시대에 정부를 배척하고 다른 편에 서며 각을 세우는 세상과 비교하면 얼마나 멋진 선비정신인가?

우리 시대에도 그런 선비정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