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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경상도·부산·울산·대구

경주 관광과 문화유적지

by 즐풍 2019. 5. 22.

 

 

 

 

탐방일자 2016.2.5.~2.9.(설연휴 기간) 

 

 

4박5일 일정으로 경주를 다녀오며 경주여행을 끝낸 게 아니라 더 다녀와야 한다는 숙제를 떠 안았다.

경주로 떠날 땐 제법 긴 일정이니 거의 대부분 지역을 돌아볼 수 있겠단 희망을 갖고 갔지만,

막상 지나고 보니 대충 겉만 보고 온 셈이다. 경주 1천년의 역사를 단 며칠로 쫑 낸다는 발상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됐다.

 

새벽 안개까 깔린 왕릉이라든지, 야경으로 밝힌 동궁이나 포석정 등 수많은 유적지는 시간대에 맞게

보아야 더 아름답게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이번 탐방은 낮에만 보고 다녔으니 각각의 시간대가 보여

주는 신비로움을 체험하지 못했다. 또한 남산과 토함산, 양남 주상절리로 한정되는 지역에 국한되다

보니 그 외의 지역은 아예 둘러보지도 못했다.

 

다시 간다면, 경주 양남에 있는 주상절리로 가는 길목의 감은사지의 삼층석탑은 꼭 봐야한다.

동해안을 갈 땐 감포항으로 바로 가는 버스를 이용했기에 길이 달라 감은사지를 보지 못했다.

경주로 들어갈 때 감은사지의 허허벌판에 두 기의 삼층석탑을 차창밖으로 스쳐가며 바라볼 때

크기에 맞는 환상정인 비례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많은 석탑을 보았어도 이처럼 아름답게 느껴

지기는 처음이었다. 이렇게 큰 아쉬움을 안고 왔으니 경주는 꼭 다시 가야 할 장소다.

 

이번 편은 경주여행을 하면서 자투리 신간에 둘러본 곳으로 어느 곳에도 소개하지 않았기에 별도로 작성한다.

 

 

경주국립공원 인근에 있는 동궁과 월지다.

이곳은 야간 조명 아래서 봐야 환상적인 느낌을 가지 수 있는데, 시간이 너무 빨랐다.

직선과 곡선, 동궁과 월지가 잘 어우러진 곳이다.

 

 

이곳은 통일신라 시대 궁궐터의 하나로, 임해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과 함께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시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푸는 장소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4년(674년)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고, 19년(679년)에는 "동궁을 지었다."

경순왕 5년(931년)에는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하여 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어 월지와

동궁의 축조 연대와 주요 건축물들의 성격을 알 수 있다.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 조사에서 신라 때 축조되었던 월지의 모습 대부분이 확인되었고, 동궁 건물터

에서 출토된 기와와 보상화문전에 새겨진 기년명(紀年銘)을 통해 축조 연대가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월지는 동궁의 원지(苑池)로서 신라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해질녁의 풍경이다.

 

 

월지, 아직은 추위로 얼음이 안 풀렸다.

 

 

경주읍성

읍성은 읍내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족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이 읍성은 고려 현종

3년(1012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시 동부동 북부동에 위치하고 있다.

성의 둘레는 4,075자(尺), 높이 12자였으며, 돌로 쌓은 성이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일본군을 물리쳤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헐리고 지금은 사진과 같이 90m 정도만 남아 있다.

 

 

 

경주 포석정

포석정은 신라 왕실의 별궁으로, 역대 임금들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지금은 정자 등의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포석정 석조 구조물만 남아있다. 화강석으로 만든 수로의 길이는 약 22m이다.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잔을 띄우며 시를 읊었을 것으로 보인다.

포석정에 대한 기록은 신라 제49대 헌강왕이 신하들과 어울려 여흥을 즐길 때 남산의 신이 왕 앞에서 춤을 추자

왕도 따라 추게 되어 이로부터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라는 신라춤이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경애왕 4년(927년) 왕이 후백제 견훤 군대의 습격을 받아 최후르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

宴)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가지 그 자취가 이처럼 잘 남아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저 돌담 안족에 포석정이 설치되어 있다.

 

 

포석정, 샘물이 나오는 곳은 아닌 데 어떻게 물이 흘러갔는지 궁금하다.

 

 

신라 6대 지마왕(재위기간 112-134년)의 왕릉이다.

 

 

가만 있어보자, 이게 경주 배동 삼불사 입구에 있는 삼층석탑이지?

벌써 오래되어 가물가물하다.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배동 삼불사에 있는 세 돌부처는 이 근방에 흩어져 누워있던 것을 1923년에 모아서 세운 것이다.

이 삼존불은 웃음 짓는 얼굴 표정과 뺨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는 잠품으로 조각 양식으로 보아 7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위 석조여래삼존불을 모신 전각

 

 

경주 오릉

이 능은 남산의 서북쪽에 해당하는 경주 분지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다섯 무덤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과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임금 네 분과 박혁게세왕의 왕후 알영부인의

능으로 전해 온다.이는 삼국사기에 네 분이 왕을 담엄사 북쪽 사릉원 내에 장례를 지냈다는 기록과 삼국유사에서 박혁거세

왕이 승천한 후 유체가 다섯으로 나뉘어 땅에 떨어지자 이를 각각 장사지내어 오릉이 되었다는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겉모습은 경주시내 평지 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다. 1호 무덤은 높이 약 7.86

m로 가장 크며, 2호 무덤은 표주박 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이다. 경내에는 박혁거세왕의 제향을 받드는 숭덕전

과 그 내력을 새긴 신도비가 있으며, 그 위쪽으로는 알영부인의 탄생지라 전해지는 알영정이 자리하고 있다.

 

 

 

숭덕전

 

 

 

 

 

 

 

 

 

 

 

표주박형 모양의 봉분이 두 개인 무덤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부인의 탄생지임을 알리는 비문  

 

 

알영정

 

 

알영지의 예빈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