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3.25.토 10:37~16:50(이동시간 6:13, 이동거리 13.35km) 날씨: 눈비
드디어 어제로 3주간의 **전문가 교육이 끝났다.
2주차 금요일 오후에 바뀐 강의실에 늦게 가 자리가 없는 바람에 뒷문 옆에 앉았더니 외풍이 심해 감기에 걸렸다.
약을 먹으면 잠깐 콧물감기가 좀 가라앉나 싶어도 워낙 약골이다 보니 도체 몸을 가눌 수 없다.
잠은 쏟아지고 몸이 약 기운을 감당하지 못해 잘 때만 먹고 낮에 안 먹으면 또 콧물이 흐른다.
오늘은 산행을 해야 하니 아침에도 약을 먹고 산악회 버스에 올라 비몽사몽 졸다 눈을 뜨니 비가 내린다.
일기예보엔 오후 3시 전후로 비가 온다고 했는데, 웬걸 아침부터 비가 제법 내리니 빨리 그치길 빌어 본다.
한동안 꽤 가물었으니 농민들에겐 단비지만 등산하기엔 영 마땅치 않다.
우비를 꺼내 입고 카메라는 배낭에 넣고 아이폰으로만 사진을 찍는다.
고도가 높아지자 비는 진눈깨비로 바뀌더니 어느 지점부턴가 제법 눈발이 굵어진다.
어제 아이젠을 만지작거리다 설마 경남 함양이니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빼놓고 왔는데 낭패다.
하긴 나뿐만 아니라 전 회원이 아이젠을 착용한 사람은 보이질 않았으나 하산할 때 딱 한 명 보긴 했다.
남들은 여기저기서 나가떨어지고 벌벌 기어가는데 그는 한 손에 우산을 잡고 룰루랄라 여유롭다.
7부 능선부터 주 능선을 지나는 동안엔 발목이 푹푹 빠질 만큼 적설량도 제법 많다.
다음 주 치악산을 가기로 했는데, 강원도 산이니 눈이 있든 없든 아이젠을 준비해야겠다.
황석산 거망산 등산코스
마을부터 제법 긴 거리를 포장도로를 따라 이동한다.
길 아래로 흐르는 계곡엔 제법 사방댐이 잘 정비되어 있는데다 사진처럼 친환경이라 보기도 좋다.
피바위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다시 침략한 왜군 중 2만7천 명이 음력 8월 16일 이곳 황석산성을 공격해 왔다.
그때 안의현감 곽준과 함양군수 조종도는 소수의 병력과 주민들을 모아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이틀 후 함락되었다.
함께 싸움에 참여했던 여인들은 황석산성이 함락되자 왜적에 죽느니 자결하겠다며 수십m의 바위에서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그때 순절했던 여인들이 흘린 피로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
피맺힌 한이 스며든 오늘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 이 바위를 피바위라 한다. (안내문 편집)
비가 오고 안개까지 껴 피바위의 높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높아 보인다.
지루하고 긴 너덜길을 지난 다음에야 비로서 도착한 황석산성
처음엔 비가 내리더니 고도를 높이자 진눈깨비로 변한다 싶더니 이내 눈으로 바뀌어 산성엔 제법 눈이 쌓였다.
황석산성
황석산 정상에서 좌우로 뻗은 능선을 따라 계곡을 감싸듯 쌓은 산성이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2,750m, 높이 3m 정도로, 성문은 동 서 남 북동쪽에 작은 문루를 갖추고 있다.
산성의 구조로 보아 신라가 백제와 대결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편집)
사실 황석산 거망산에 대한 기대가 많았다.
황석산의 남봉, 정상, 북봉의 바위는 검색을 통해 봤을 때 제법 암봉의 규모가 있어 늘 오고 싶던 곳이다.
많이 기다렸으나 하필이면 오는 날이 장날이라던가?
눈이 내려 미끄럽다 보니 정상엔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엉켜 정상 인증사진 찍겠다고 좀체 틈이 나질 않는다.
인증석은 포기하고 날이 좋으면 가려던 남봉도 생략하고 바로 북봉 쪽으로 하산한다.
어찌하여 선두가 되다 보니 러셀의 부담이 있어 잠시 간식을 먹으며 선두자리를 내준다.
정상을 오르며 본 정상의 암릉
황석산성을 덮고 있는 눈
모처럼 나선 황석산의 정상과 남봉 북봉의 여러 풍경이 고작 이 희미한 한 장의 사진으로 끝난다는게 아쉽다.
북봉으로 가며 뒤돌아 본 황석산 정상
계절은 봄이라 겨우내 쓰던 미스테리렌치 배낭을 세탁해 집어넣고 가벼운 배낭을 둘러매고 나왔다.
여분으로 갖고 다니던 방한용 장갑도 빼버리고 가벼운 장갑을 끼고 왔더니 습기에 약해 물이 질퍽하다.
간단히 요기를 끝내고 장갑 착용 전에 장갑을 짜니 주르륵 물이 흐른다.
그런 후 장갑을 착용하니 체온이 다 식어 한동안 손이 시리다.
황석산 북봉의 암릉구간을 지나면서부터 대체로 거망산까지는 무난한 육산이라고 했다.
그런데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에서 아이젠 없이 엎다운이 심한 눈길을 걷다 보니 보통 고역이 아니다.
그리고 나타난 거대한 거망산의 표지석에 잠시 압도된다.
이런 큰 오석의 전면을 갈아 글자를 새기고 이곳에 설치한 비용은 얼마나 들었을까?
대략 돌값만 7백만 원 이상에 헬기로 이동하고 설치한 비용까지 1천만 원은 넘겠다는 계산이 나온다.
태장폭포
처음엔 이게 용추폭포인줄 알았다.
그런데 왜 안내문 하나 없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더 내려가 용추사 앞에서 거대한 용추폭포를 마주하게 된다.
위 폭포를 더 가까이서 다시한번...
용추사로 건너가는 다리
용추폭포
2012년 2월 8일에 명승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지우천 상류에 형성된 좁은 골짜기를 따라 위치한다.
기백산군립공원에서 발원하여 용추계곡을 흘러 내려온 물이 만들어낸 폭포로 위에서 아래로 내리 꽂히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룬다.
높이는 약 15m, 호수의 직경은 약 25m, 깊이는 약 10m이다.
수량이 풍부한 여름철에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마치 용이 지축을 흔들며 승천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폭포가 있는 용추계곡은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진리 삼매경에 빠졌던 곳’이라 하여 심진동이라 불리기도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용추폭포를 검색했더니 가평, 대야산, 문경, 주왕산 등 많은 곳에 같은 이름을 가진 폭포가 있다.
위 안내문처럼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마치 용이 지축을 흔들며 승천하는 것처럼" 들리거나 보이기 때문일까.
장수사 조계문
일주문은 절 입구에 좌우에 각각 하나의 기동으로 받쳐 세운 문으로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수도하고 교환 하는 의미에서 세운 문이다.
장수사는 신라 시대의 원효와 의상을 비롯해 조선 시대 무학, 서산, 사명 등 여러 고승이 수도 한 이름있는 절이었다.
용추사는 원래 장수사에 딸린 작은 암자였다.
그런데 625전쟁 때 장수사가 일주문만 남기고 타 버리자 1959년에 중건하면서 이름을 용추사로 바꿨다.
덕유산 장수사 조계문이라고 쓰여있는 일주문 현판만이 장수사의 흔적을 말해준다.
이 일주문은 1702년(숙종 28)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부터 부처의 극락세계가 시작된다는 종교적 의미를 상징적이면서도 장엄하고 화려한 구조로 표현했다. (안내문 편집)
오랜 염원을 풀고자 나섰던 황석산 거망산은 눈과 안개로 미망 속에서 헤매다 왔다.
모처럼 봄 단장을 하고 떠났던 채비는 눈과 안개로 엉망이 되기도 했다.
눈이 쌓여 의자를 펴고 앉아야 하지만 귀찮아 간식이나 점심도 서서 먹었다.
그래도 3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에 깊은 겨울에나 맛볼 수 있는 설경을 감상했으니 어디냐.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비나 눈이 오면 오는대로 맞으며 산행했다.
내 닉 그대로 즐풍목우(櫛風沐雨)의 산행이다.
아직은 가야 할 산이 많으니 미진한 황석산과 거망산을 다시 찾을 때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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