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2014.7.26.토 10:55-17:10(6시간 15분 산행) 날씨: 오전엔 흐리고 오후에 맑음
처음 등산에 입문한 산이 북한산이다. 가까운데다 자료가 풍부하여 많은 정보를 얻기 쉽고 도심에 둘러싸여 어느 곳으로든 탈출이 가능
하니 쉬운 산이다. 사실 쉽다는 건 내 중심일뿐 바위가 많고 엎다운이 심해 결코 쉽지 않은 산이기도 하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니
자연경관도 뛰어나 전국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다. 한동안 오직 이 북한산만 타고 다닐 때 동료 직원이 가끔씩 지리산을 다녀왔다
고 자랑할 때면 늘 부러웠다. 아니 부럽다기 보다는 감히 내가 갈 수 없는 산이란 생각에 선망의 대상이었다. 선망은 내가 할 수 없기에
어쩌지 못하는 희망사항에 불과하지 않은가.
지리산은 명산 순위 1위에 해당하지만 거리가 멀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데다 산이 높고 광대하여 나같이 일천한 산행경력으로는 도저히
탐방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와 난 다르다고 생각하며 북한산의 심장과 팔다리 끝까지 여기저기 누비고 다니자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드디어 1년 반 정도의 경력이 된 어느 몹시도 춥던 2011년 2월초, 1무1박3일의 지리산 대장정에 들어간다. 하동에 있는
쌍계사를 들머리로 삼신봉을 거쳐 10시간의 산행 끝에 세석산장에서 숙박하고 다음날은 천왕봉을 거쳐 대원리로 하산하는 여덟 시간의
산행을 마무리 지음으로써 나도 드디어 지리산을 세미 종주하는 쾌거를 이룬다.
이에 더하여 2012년 10월 단풍이 막 물들기 시작할 때 성삼재에서 천왕봉을 거쳐 같은 곳으로 하산하는 1무1박3일의 두 번째 산행을 마
친다. 지리산을 두 번 산행하며 느낀 점은 정말 가도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장쾌한 맛은 있으나 긴 능선이 오히려 지리하단 느낌이었다.
그러기에 서산대사는 지리산을 평하길 "장이불수(壯而不秀), 장엄한 맛은 있으나 수려하지 않다"고 했다. 이틀동안 큰 변화가 없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산을 탄다면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차라리 엎다운이 심해 체력소모가 많아도 가는 곳마다 비경이 펼쳐지는
설악산이라면 며칠을 걸어도 견딜수 있겠지만 볼거리가 별로 없는 지리산은 설악산 만큼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인기명산 1위를 내놓지 않는 이유는 뭘까?
1위라는 건 "한국의산하"홈페이지 접속에 따른 순위다. 지리산은 서울에선 멀지만 대전지역 이남이라면 어디서든 설악산 보다 접근성이
우수하다. 게다가 험하지 않은 육산인 데다 코스가 다양하니 하루를 걷든 이틀을 걷든 코스 선택의 폭이 넓다. 길지 않은 코스라면 부자
지간 또는 부녀지간에도 함께 산행할 수 있을 만큼 부담 없는 코스도 많다. 굳이 정상 정복을 고집한다면 최단코스인 중산리 법계사 코
스를 이용하면 불과 여덟 시간이면 산행을 끝낼 수도 있다. 어쩌면 트레킹코스로 더 안성마춤인지도 모른다.
이에 반해 가는 곳 마다 비경인 설악산은 거의 동쪽 최북단에 위치한 만큼 교통 접근성이 좋지 않다. 게다가 최고의 비경을 품은 공룡능
선을 맘에 둔다면 어느 코스를 타든 적어도 열 시간 이상의 산행에 엎다운이 심해 체력소모도 만만치 않다. 웬만큼 체력이 뒷바침 되지
않으면 쉽사리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산이다. 산행 일정상 근교가 아니라면 무박산행을 감행하거나 산장에서 1박을 하는 1박2일의 산행이
되어야 한다. 이런 설악산에 단풍이 단풍이 시작되면 전국의 내노라 하는 건각들이 발갛게 달아오른 설악을 품기위해 모여든다. 새벽 네
시에 빗장이 풀리면 경주를 하듯 산행을 시작해 단풍보다 먼저 끝없이 이어지는 랜턴불빛의 장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설악산도 지리
산 만큼이나 면적이 커 다양한 코스가 있다.
절대비경에서 앞서는 설악산이 지리산에 인기명산 1위를 내준 이유는 대충 나왔다. 지리산이 교통접근성이 우수하다는 것, 능선이 긴 만
큼 걷기 편한 육산이라는 이유로 남녀노소 불구하고 산행이 쉽다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웹페이지를 클릭한다고 전부 등산으로 이어
지는 것도 아닐테니 명산 1위에 함정도 숨어 있다. 이젠 나도 나이가 들면서 골산보다는 육산을 찾게 되고 편안한 트레킹 코스에 점점 맘
이 간다. 금년 4월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가장 빠른 코스인 중산리를 이용한 산행을 마치고 불과 네 달만에 지리산에서도 계곡이 가장
아름답다는 뱀사골을 찾는다. 워낙 큰 산이다 보니 계곡이 깊어 계곡 명소도 많은 모양이다.
지리산 뱀사골 탐방로
지리산은 멀기도 하다. 네 시간 40분 동안 의자에 묶여 온몸에 좀이 쑤시는 걸 겨우 참고 뱀사골 들머리에 도착했다. 버스를 탈출하고 나니
지리산의 신선한 공기가 시원하게 폐부를 비집고 들어온다. 요 며칠 서울 등 중부지역은 밤마다 장마비가 지니갔는 데 지리산은 장마의 영
향을 많이 받지 않았는지 계곡의 수량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량이다. 하지만 군데군데 깊어 보이는 소가 시원해 보인다.
덕풍계곡과 달리 이곳 물색은 연녹색이니 빗물이 풀잎을 우려낸 걸까?
계곡을 오르는 동안 바람이 분다. 계곡이라고 하지만 해발 900m 가까이 되는 지점이라 지리산 정상도 단숨에 올라갈 거리다.
그제밤 일산의 밤도 바람이 불어 베란다 창문이 덜컥거리더니 이곳 바람은 나무를 눕힐 정도라 배낭사이로 찬 땀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요룡대
용이 승천하려고 머리를 치들고 있는 모습을 한 받침대까지 약 30 m 높이의 바위라는 데 아무리 목측을 해봐도 그 정도는 아닌거 같다
그래도 바위가 얼마나 큰지 소나무도 몇 그루 자라는 게 보인다
지난 번 다녀온 삼척의 덕풍계곡은 탐방로와 계곡이 거의 붙어있어 즐기는 계곡 탐방이었다면
이곳 뱀사골은 다소 거리감이 있어 즐기기 보다는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탐방구간이다.
뱀사골은 피아골과 함께 지리산을 대표하는 단풍계곡이라 눈에 보이는 대부분의 나무가 단풍나무니 가을철엔 상풍객도 많겠다
계곡으로 올라가며 지천에서 모여드는 수량이 적어짐에도 불구하고 수량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을만큼 제법 많아 여름철 계곡탐방로로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가지치기로 나온 계류에 물이 더 많다면 제법 볼만 하겠다
계곡을 걷는 동안은 계류와 소를 자연스레 만나며 계곡물 흐르는 소리는 가깝거나 멀게 들리며 급경사가 많지 않아 편안한 탐방을 즐길 수 있다
제승대, 1300여년전 송림사의 정진스님이 불자들의 소원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한다
이곳을 지날 때 내가 정진스님이 되어 소원청취를 발원하며 한두 개 소원을 빌어보면 금새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까?
제승대 위쪽엔 여러 계류가 볼만하다
계곡이 깊고 넓으니 오가며 지선에서 흘러 들어오는 계곡엔 계류나 작은 폭포가 형성되어 간간이 훔쳐보는 재미가 있다
위 아래는 뱀사골에서 보는 마지막 계류다. 이 사이에 있는 공터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일부는 와운마을의 천년송을 보러 먼저 출발했단 말을 듣고
나도 서둘러 하산길을 잡는다. 올라온 길 되돌아 가지만 아침의 잔뜩 흐렸던 날씨와 달리 햇빛이 반짝여 오전 풍경과는 달리 시원한 느낌이 좋다.
점심을 먹을 때 서늘한 계곡의 추위를 느끼며 방풍의를 입고 있었지만 '태강'님은 그 와중에서 몰속에 몸을 담기고 있으니 '극강'의 체력 소유자다.
명경지수다. 저 어디쯤 선녀와 나뭇꾼의 이야기를 꾸며내도 믿을 만큼 외진 곳이다
오메! 여기도 단풍들면 멋있겠다
녹색 나뭇잎 우러난듯 나무와 물색이 같은색이다
이런 멋진 비경은 연중 다른 색깔을 보여줄 테니 그 비경을 가 맛보려면 적어도 네 번은 와야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저 나무에 계절 따라 다른색인 연초록과 단풍색깔을 입혀보면 어떨지?
할머니 소나무
지리산 천년송(천연기념물 제424호)
전북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지리산 뱀사골 탐방로에서 약 3km 지점인 이곳은 해발 800m의 고지대이기도 하다. 마을이 얼마나 깊은 곳에 자리잡았는지 구름도 누워서
지나간다는 와운(臥雲)마을이다. 와운마을의 수호신인 이 천년송에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흘 '지리산 천년송 당산제'를 지낸다. 임진왜란 이
전부터 이 자리를 지켰을 천년송은 약 500년 정도의 나이를 추정하는 모양이다.
위의 사진이 마을에서 올라오며 처음 만나는 할머니松으로 위에 있는 할아버지 송보다 풍채가 더 당당하다. 높이가 대략 20m에 이르고, 가
슴높이 둘레는 6m, 사방으로 뻗은 가지의 폭은 12m 가량이다. 할머니송은 아쉽게도 나뭇가지가 부러진 게 보이기도 한다. 워낙 높고 가지
가 길어 바람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 많겠다.
사람은 죽어서 신으로 추앙받는 사람도 있지만 이 소나무 두 그루는 살아서 수호신으로 제사를 받는다.
할머니 소나무와 할아버지 소나무는 늘 그 자리에서 서로를 지켜보며 지나온 세월보다 더 많이 서로를 지켜주길 기대해 본다.
할아버지 소나무
우측에 부러진 가지가 아쉬운 할머니 소나무
마을 아래쪽 바위엔 작은 소나무 한쌍이 나도 '부부송'이요 하고 애교를 떠는 모습도 있는데 언젠가 거목이 되면 제법 볼만한 자태다
뱀사골은 쉬운코스인듯 하지만 대부분 너덜길인데다 와운마을 올라가는 시멘트길이 가팔라 탐방을 끝냈을 때 의외로 다리가 뻐근하다.
한여름이라도 구태어 물에 들어가지 않겠다면 등산화를 신는 게 너덜길 걷기에 좋겠단 생각을 해본다.
탐방을 끝내고 지리산북부사무소 옆을 돌아가보니 지리산충혼탑이 보인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보면 인민군과 빨치산이 지리산에
근거지를 두고 무장투쟁을 계속하지만 정부군은 진압작전에 따라 이들을 궤멸시킨다. 그 전투에 희생당한 넋을 기리는 충혼탑이리라.
‘지리산의 봄 1- 뱀사골에서 쓴 편지’
고정희
남원에서 섬진강 허리를 지나며/ 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 / 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한 자락이 따라와/ 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 축축한 외로움을 들추고/ 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 놓습니다/
온몸을 싸고 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 세우며/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 줍니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레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앞서 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 / 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 내리고/
육천 매듭 풀려 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이 흐르고/ 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
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 소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 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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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은 우연찮게도 지리산 등반 도중 폭우를 만나 세상을 떠난 장소가 바로 뱀사골이었다고 하니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걸까? 마지막 구절이 심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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