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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공원 탐방/지리산

지리산 쌍계사 탐방

by 즐풍 2021. 9. 25.

 

 

 

2021.8.26 (목) 16:23부터 한 시간 탐방

 

 

낮에 하동의 고소산성으로 올라가 구름다리를 건너 성제봉 찍고 하산하니 시간이 남는다.

오기 힘든 하동까지 왔으니 남는 시간, 같은 관내인 하동 쌍계사를 돌려보기로 한다.

꼭 10년 전인 2011년 2월 지리산에 첫날을 디딘 게 쌍계사에서 시작해 삼신봉을 경유하여

다음날 지리산 정산인 천왕봉을 찍고 대원리 새재로 하산한 것이다.

2월 새벽부터 산행했으니 쌍계사라는 것만 알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오늘 쌍계사까지 가는 긴 구간 양쪽에 심은 벚나무가 길 가운데에서 맞닿을 만큼 우람한 걸 봤다.

벚꽃 필 때면 이 멋진 벚꽃을 보기 위해 경향 각지에서 밀려드는 상춘객으로 도로는 마비된다.   

계절이 어긋나니 꽃은커녕 도로마저 한산한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이다.

 

 

 

□ 쌍계사(雙磎寺)

 

쌍계사(雙磎寺)는 신라 성덕왕 23년(724년) 대비(大悲), 삼법(三法) 두 화상께서 선종(禪宗)의 六祖이신 혜능스님의 정상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 눈 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곳을 찾아 절을 지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

그 뒤 문성왕 2년(840년)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이어 귀국하신 혜소 진감(眞鑑)선사께서 퇴락한 삼법 스님의 절터에 옥천사(玉泉寺)라는 대가람을 중창하시어 선의 가르침과 범패(梵唄)를 널리 보급하시었으니 후에 나라에서 "쌍계사"라는 사명을 내렸다. 그간에 벽암, 백암, 법훈, 만허, 용담, 고산 스님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고색창연한 자태와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쌍계사는 국보 1점(진감국사 대공탑비-국보47호), 보물 9점(대웅전-보물 500호, 쌍계사 부도-보물 380호, 팔상전 영산회상도-보물 925호, 대웅전 삼세 불탱-보물 1365호, 대웅전 목조 삼세불좌상 및 사보살입상-보물 제1378호, 쌍계사 괘불-보물 제1695호, 쌍계사 감로왕도-보물 제1696호, 쌍계사 동종-보물 제1701호)의 국가지정 문화재와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청학루, 마애불, 명부전, 나한전, 적묵당, 설선당, 육조정상탑전, 팔상전, 사천왕상, 산중탱, 아미타후불탱, 불경책판 등의 20점의 지방지정 문화재, 총 30여 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사암, 불일암, 도원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조계종 25개 본사 중 제13교구 본사이기도 하다.

 

쌍계사는 여러 문화 재외에도 차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쌍계사 입구 근처에는 '차시배추원비(茶始培追遠碑)', '해동다성진감선사추앙비', '차시배지(茶始培地)' 기념비가 있다. 차는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에서 처음 들여왔는데 흥덕왕 3년(828년) 김대렴(金大簾)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줄기에 처음 심었다고 한다. 김대렴이 차를 심은 이후 진감선사가 쌍계사와 화개 부근에 차밭을 조성, 보급하였다고 한다.

쌍계사는 도의국사와 동시대에 활약한 진감선사가 육조혜능선사의 남종 돈오선을 신라에 최초로 전법한 도량이자 차의 발상지이며 해동범패의 연원이다. 그러므로 쌍계사는 선(禪), 다(茶), 음(音)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현재 혜능대사의 정상이 모셔진 금당(金堂)에 금당선원이 있어 눈 푸른 납자들의 정진이 이어지고 있으며 전통강원(傳統講院)과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설치되어 바야흐로 선맥과 강맥, 그리고 율맥의 법통이 바로선 수행도량의 명성을 떨치고 있다.  [출처_홈피]

 

 

 

 

 

□ 일주문

 

일주문은 속세를 떠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 관문으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신을 수양하고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쌍계사 일주문은 조선 인조 19년(1641)에 벽인 화상이 지었다고 하며 1977년에 고산 화상이 손질하여 고쳤다.

일주문으로서는 드물게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올렸다.

건물 높이에 비해 지붕이 넓지만 추녀 밑에 받침 기둥을 세우지 않고, 기둥의 앞 뒤에 보조 기둥을 세워 

지붕을 안전하게 받치고 있다.

처마는 이단으로 있는 겹처마이며, 처마를 받치는 기둥머리 장식이 기둥 사이에서 있는 다포 형식이어서 화려하다.

또 기둥머리 장식이 부재가 가늘고 섬세한 점 등 장식성이 강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양식보다는 근대적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안내문)

 

 

뒤에서 본 일주문

 

 

□ 금강문 

 

금강문은 일주문을 지나 두 번째 나오는 문이다.

불법을 수호하고 악을 물리치는 금강역사가 모셔져 있는 문으로서 쌍계사 금강문은 신라 문성왕 2년(840)에 진감 선사가 

창건 당시에 처음 지었다.

조선 인조 19년(1641)에 벽인 화상이 고쳤으며, 문 앞에는 벽암이 쓴 현판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79년에 고산 화상이 손질하여 고친 것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기둥이 높고 기두의 장식들은 단순하다.

처마는 2단으로 있는 겹처마이며, 지붕의 양옆에는 비바람을 먹는 풍판을 달았다.

건물 가운데 칸을 열어 지나다닐 수 있게 하였으며, 영역 칸의 바닥에는 지면에서 약 45cm가량을 높여서 마루를 깔았다.

왼쪽에는 부처님을 보호하며 비밀스러운 내용을 들으려 하였던 밀적금강이 있고,

오른쪽에는 엄청난 힘을 가졌다는 나라연금강이 있다.                                         (안내문)

 

 

 

 

 

 

 

□ 대나무

 

대나무는 예로부터 곧고 푸르른 특징으로 인해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삼국유사에서 일연 스님은 불교 공인을 주장하다 순교한 신라의 이차돌을 가리켜 대나무와 같은 절개라 비유하였다.

대나무는 불교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식물이다.

인도 마가다국의 왕이 자기 소유의 죽림(대나무 숲)에 사원을 건립하여 부처님께 바쳤는데,

그 절이 바로 최초의 불교사원인  죽림정사이다.  (안내문)

 

 

 

□ 천왕문

 

천왕문은 절에  들어설 때 일주문과 금강문 다음으로 지나게 되는 세 번째 문으로 사천왕을 모신 문이다.

사천왕은 부처님께 귀의(믿고 따름)하여 불법을 수호하고, 수도승과 불자를 돕는 네 명의 수호신이다.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여기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지국천왕, 서쪽에는 광목천왕, 남쪽에는 증장천왕,

북쪽에는 다문천왕이 있다.

쌍계사 천왕문은 조선 숙종 30년(1740)에 백봉 화상이 지었고, 순조 25년(1825)에 고쳐지었으며

1978년에 고산 화상이 다시 고쳐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춘 공포를 단순하게 만들어 소박하고 단아한 느낌이 든다.

천왕문 안에 모셔 돈 사천왕은 나무로 조각되었는데, 조각 솜씨가 뛰어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 사천왕상

 

쌍계사 천왕문에 안치된 목조 사천왕상 4구는 조선 후기 1705년에 제작된 475cm 규모의 대형작품이다.

현재 국내에 존재하는 조선 초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사천왕상은 전남 보림사 사천왕상(1539년)을 비롯한 10여 점이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현재 목조로 제작된 사천왕상은 보림사와 적천사 사천왕상(1690년) 다음으로 쌍계사 작품이 알려져 있으며,

쌍계사의 경우는 현존하는 사천왕상 불교조작 중에 그 규모가 상당히 돋보이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현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신체의 당당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본 작품은 조선시대 천왕문에 안치된 대형 규모의 사천왕상은 물론 조선시대 대규모의 사천왕탱과 도상 비교연구에

중요함은 물론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안내문)

 

 

 

 

 

□ 하동 쌍계사 구층 석탑

 

이 석탑은 고산 화상께서 인도 성지 술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스리랑카에서 직접 모사온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 3과와

산내 국사암 후불탱화에서 출현한 부처님의 진신사리 2과, 그리고 전단나무 불상 일존은 모셨다.

이 탑은 국보 제48호 월정사 팔각 구층 석탑과 유사한 형식으로 불기 2531년(서기 1987년) 1월 3일 시공하여

불기 2534년 (서기 1990년) 3월 15일에 완공했다.  (안내문)

 

 

 

 

 

□ 팔영루

 

팔영루는 진감 선사가 섬진강에서 뛰는 물고기를 보고 8음률로 '범패 또는 어산'이라는 불교 음악(우리 국악의 시초이기도 함)을

작곡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진감 선사가 신라 문성왕 2년(840)에 쌍계사 창건 당시 팔영루를 세웠고,

그 뒤 조선 중종 4년(1509)에 중섬 선사사 고쳐 짓고, 문신인 어득강에게 글을 부탁하니,

어득강이 서문과 팔영을 찬양하는 8수의 한시를 지어 놓았다고 한다.

이후 인조 19년(1641)에 벽암 화상이 쌍계사를 다시 지을 때 대웅전과 함께 팔영루를 고쳐 지었다.

1979년 고산 화상이 새로 손질하여 고쳤다.

정면 5칸, 측면 3칸 크기인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부처나 보살을 모시지 않은 곳이어서 처마를 받치는 기둥머리 장식이 없지만, 처마는 2단인 겹처마로 만들었고 단청도 화려하다.

팔영루는 우리 민족에게 맞는 범패를 만들어 내고 또 범패의 명인을 교육했던 뜻깊은 곳이다.  (안내문)

 

 

범종각

 

 

□ 쌍계사 전각과 중요문화재

 

쌍계사는 舊位인 금당 영역과 新位인 대웅전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崇禎 연간(1628~1644)의 중창 이후 진감국사에 의해 이루어진 금당 영역과,

벽암 각성 스님에 의해 중창된 대웅전 영역의 두 공간으로 분할되는 독특한 가람 구성을 이루게 되었다. 

즉 청학루 · 팔상전 · 금당으로 이어지는 금당 영역과, 일주문 · 팔영루 ·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대웅전 영역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금당 영역은 남북의 軸線을, 대웅전은 동서의 축선을 갖게 되어 두 영역이 서로 直交하는 가람배가 형성되었다. 

또한 금당 영역의 정면에 있던 진감선사 대공탑비는 그대로 남향을 하고 있는데,

대웅전은 서향을 취하는 파격적인 구도를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두 영역으로 나누어 배치하게 된 것은 구위가 터가 좁다는 입지적 조건에 의한 것이다.

 

지세를 살펴보면, 금강 영역은 국사암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경사가 급하여 가람 조성을 하단 · 중단 · 상단으로 구성하고 있다. 

배경이 되는 산봉우리는 지리산의 주봉인 토끼봉 · 형제봉으로 이루어지며, 

금당 영역은 특별히 主山의 의미보다는 남북의 방위개념이 두드러진다.

지금의 대웅전 영역은 三神峰을 주산으로 하여 쌍계를 끼고 있는 동에서 서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산지 가람을 형성하기에 알맞다고 할 것이다.

현 쌍계사 사역 전체가 도지정 기념물 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_쌍계사 홈피]

 

 

구법의 일념이 얼마나 간절했길래 육조의 머리를 모셔왔을까.

대웅전 앞마당 끝에서 오른편으로 난 길을 따라 옥천교(玉泉橋)를 건너 가파른 계단 위에 올라서면 금당선원 구역이다.

'頓悟門(돈오문)'이라는 편액과 함께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안내판이 선원 구역임을 말해준다.  (안내문)

 

돈오문 

 

 

□ 청학루

 

청학루는 진건 선사가 창건 당시에 세운 건물로서 처음 승려가 되는 이들이 수도하는 곳이다.

조선시대에 와서 인계 화상, 우화 화상, 범성 화상 등이 새로 고쳐 지었고,

지금의 건물은 1930년에 쌍계사 주지 손민 화상이 손질하여 고쳤다.

청학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로, 산의 경사면에 지어서 앞에서 보면 2층 다락집 형태인 누각이며 뒤에서 보면 1층이다.

거대한 자연석 주춧돌 위에 둥글고 굵은 참나무 기둥을 세워 마루를 얹었으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1979년 고산 화상이 손질하여 고쳐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봉래당 

 

□ 팔상전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나 조각상을 모시는 전각이다.

쌍계사 팔상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크기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다포계 형식의 건물로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형식으로 지어졌다.

기둥이 높고 기동 사이에 간격이 넓어 대웅전과 같은 웅장함이 느껴진다.

건물 안에 기둥머리에는 장식이 많은데, 그 장식들을 안쪽으로 피어오르는 것처럼 만들어 공간이 웅장하고 화려해 보인다.

또한, 천장은 격자 모양으로 짜 맞춘 우물 정(井) 자 천장이며,

가운데로 갈수록 점차 올라가는 층단을 두어  시야가 트이게 하였다.

불상을 모셔 둔 불단 뒤에는 영산회상도와 팔상도가 모셔져 있다.

이 전각은 고려 충렬왕 16년(1290)에 진정 국사가 처음 세우고 나서 여러 차례 손질하여 고쳤는데,

지금 건물은 1978년에 고산 화상이 고친 것이다. (안내문)

 

 

 

 

 

□ 금당선원

 

신라 성덕왕 21년(722년) 삼법(三法), 대비(大悲) 스님이 중국으로 유학 갔다가 육조 혜 능선사의 머리를 모셔와

절을 세운 자리에 들어선 선원이다.

청학루를 돌아 팔상전 왼편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당에는 '金堂'이라는 편액을 중심으로 '世界一花(세계일화) 祖宗六葉(조종육엽)' '六祖頂相塔(육조정상탑)'이라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좌우에 걸려 있다.

추사가 당시 금당에 살던 만허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써준 글씨로 '세계일화 조종육엽'은

부처님의 근본 진리가 보리 달마에서 육조 혜능까지 이어져온 것을 뜻한다고 스님들은 풀이한다.

금당 안에는 육조의 정상을 모신 탑이 봉안돼 있다.

법당에 탑을 모신 곳으로는 이곳이 유일하다.

금당 좌우편의 서방장(西方丈)과 동방장(東方丈)이 선방이다.

동·서방장은 각각 3칸짜리 건물로 많아야 10명가량 앉을 수 있는 13평 규모의 작은 선방이다.

하지만 수많은 고승들이 배출된 명당이다.

조선시대 벽송지엄-부용영관-서산휴정-부휴선수-벽암각성-백암성총-응암낭윤-화악평삼-긍암계정 등으로

이어지는 문파가 쌍계사 일대에서 법을 전했다. 

근대에 와서는 경허 스님이 탑전에 선원을 개설한 이래 용성, 운봉, 금오, 동산, 청담 스님 등이 이곳을 거쳐갔고

효봉 스님은 1956년 당시 사미였던 법정 스님을 데리고 쌍계사 탑전에서 정진했다고 한다.  [홈피]

 

 

 

 

동방장

 

□ 설선당 

 

설선당은 학인 승려들의 교육 장소로 승려들이 불경을 공부하는 곳이다.

짐감 선사가 신라 문성왕 2년(840)에 대웅전과 함께 설선당을 처음 지었으며,

이후 1641 년과 1801년에 고쳐 지은 것을 1975년에 고산 화상이 다시 손질하고 고쳐지었다.

건물 정면 7칸, 측면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쌍계사 설선당은 산중 대중이 모여서 강의를 듣고,

발우공양 (스님들이 예법에 따라 식사하며 수행하는 일) 하는 곳으로 사용한다.  (안내문)

 

서방장

 

이 길이 지리산 삼신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다.

언젠가 눈 많던 겨울에 이곳을 통과하여 정상인 천왕봉을 처음 올랐던 곳이니 즐풍에게는 특별한 곳이다.

 

 

 

적묵당

 

□ 적묵당

 

적묵당은 말없이 공부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쌍계사에 처음 출가한 이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진감 선사가 신라 문성원 2년(840)에 대웅전과 함께 지었으며,

이후 1641년에 고쳐 지은 것을 1978년에 고산 화상이 다쳐 다시 고쳐 지금에 이르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내문)

 

 

 

□ 진감선사 탑비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신라 말의 명승 진감선사 혜성의 덕을 기려 세운 탑비로, 진성여왕 1년(887)에 세워졌다.

선사의 속성은 최씨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로 가서 신간 대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고,

흥덕왕 5년(830)에 중국 선종의 법맥을 잇고 신라로 돌아와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 세의 나이로

지금의 쌍계사인 옥천사에서 입적하였다.

885년에 현강왕은 혜소에게 진감선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대공령탑이라는 탑호를 내려 탑비를 세우도록 했다.

비석의 글은 최치원이 짓고 쓴 사신비명 가운데 하나로, 당대의 문장 연구와 불교사 연구의 중요한 참고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전체 높이는 363cm, 비석 몸체의 높이는 213cm, 너비는 약 100cm, 두께는 22.5cm이다.  (안내문)

 

 

 

 

 

 

□ 석등

 

석등은 절 안의 어둠을 밝힐 뿐만 아니라, 부처의 진리를 빛으로 비춰 중생을 깨우치고 선한 길로 이끈다는 뜻도 있다.

쌍계사 석등에는 등불을 놓아 불을 밝혀 두는 화사석과 그 위에 얹는 지붕돌이 없어서 본디 모습을 알기 어렵다.

위 받침돌은 여덟 잎의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조각하였고, 

아래 받침돌은 반대로 연꽃이 위로 솟게 조각하여 대칭을 이룬다.

받침돌에 새긴 연꽃 무늬는 입체적이고 사실적이지만, 

석등의 기둥은 가늘고 길며 단순한 형태인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 대웅전 (보물 500호)

 

쌍계사 대웅전은 진감 선사가 신라 문성왕 2년(840) 창건 당시에 세운 건물인데 임진왜란(1592~ 1598) 때

불탔던 것을 조선 인조 10년(1632)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으면서 오늘날에 이른다.

쌍계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에는 삼존불과 사보살을 모셨다.

우리가 부처님을 마주하고 서있는 정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우측에는 약사여래불을, 좌측에는 아미타불 등

삼존불을 모셨고, 석가모니불 좌우에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을, 약사여래불 우측에 일광보살을

그리고 아미타불 좌측에는 관세음보살 등 사보살을 모셨다.

이렇게 삼존불, 사보살을 모신 단을 상단이라 하고,

좌측에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제자들을 수호한다는 화엄신장을 모신 단을 중단 또는 신중단이라 하고,

맨 왼쪽에 영가(돌아가신 분)를 모신 단을 하단 또는 영단이라고 한다.

쌍계사의 대웅전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며, 기둥이 높아 전체적으로 건물의 규모가 크게 느껴진다.

건물 천장은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꾸몄고, 불단 위로는 지붕 모양의 닫집을 화려하게 만들어 놓았다.

조선시대 불교 건축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 건축사와 미술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안내문)

 

 

 

대웅전 삼세불탱(보물 제1364호)

 

중앙의 석가모니불도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약사불도, 오른쪽에는 아미타불도를 배치한 삼세불탱화이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를 말한다. 

석가모니불도는 화면 상단 중앙에 큼직하게 본존불을 그린 다음, 좌우 대칭이 되게 문수·보현을 비롯한 8대 보살과 

제석·범천, 2위의 타방불, 가섭·아난존자를 비롯한 10대 제자, 용왕·용녀와 6 금강, 2위 의사 천왕을 배치하였다. 

 

본존불은 17∼18세기 유행의 전형적인 키 모양의 광배에 악귀를 물리치는 뜻을 가진 항마촉지인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뾰족하며, 머리에는 중앙 계주와 정상 계주가 큼직하고 귀·눈·입·코 등은 단정하나 

몸의 형태가 네모꼴을 이룸으로써 18세기 후반의 불화들에서 나타나는 경직성을 느끼게 한다. 

 

약사불도는 아미타인과 같은 손 모양을 하고 왼손에 약합을 든 약사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대칭이 되게 

일·월광보살을 비롯한 6대 보살과, 2위의 사천왕, 12 신중을 그려 놓았다. 

전반에 걸쳐 인물의 형태와 색채 및 표현기법 등은 석가모니불도와 유사함을 보이나, 

아미타불도와 함께 화면 구성이 다소 느긋함을 볼 수 있다. 

 

아미타불도는 주불을 비롯하여 주위에 빙둘러서 관음·세지보살을 포함한 8대 보살과 2위의 사천왕,

2위의 타방불, 마치 16 나한의 모습과도 같은 10대 제자를 배치시켜 놓았다. 

이 삼세불도는 18세기 전반 전라도 지역에서 크게 활약했던 대표적 불화승 ‘의겸’으로부터 1780년대의 ‘

승윤’ ‘평삼’으로 이어지는 불화승의 계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완전한 형태를 갖춘 18세기 후반의 대형 불화로서 비교적 정교한 필치와 화려하면서도 은은함을 보여주어 

화풍 파악에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홈피)

 

 

 

□ 나한전

 

나한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500명의 나한 중에서 열여섯 명인 16 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나한은 인간 세계의 온갖 번뇌를 끊고 세상에 이치를 깨달아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 자를 말한다.

쌍계사 나한전의 십육 나한상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양쪽 옆으로 위치하고 있다.

이 전각은 신라 문성왕 2년(840)의 진감 선사가 쌍계사 창건 당시에 처음 세웠으며,

조선 인조 19년(1641)에 벽암 화성이 고쳐지었다고 전해진다.

건물 정면 3칸, 측면 23칸 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건물의 크기가 작고 장식도 없어 전체적으로 소박한 느낌이 든다.

건물 아래를 받치는 기단을 높게 쌓아 주변의 대웅전, 명부전과 균형을 맞추었다.  (안내문)

 

 

 

화엄전

 

소장되어 있는 불경책판의 규모는 모두 33종 1,743매이다.

이 책판들의 제작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대부분이 1603년(선조 36) 전후로 쌍계사의 말사인 능인암(能仁庵)에서

개간하여 쌍계사로 옮겨온 것이다.

이밖에도 쌍계사에서 직접 간행한 것과 승려 문집으로 간행된 것이 포함되어 있다. 

소장된 책판에는 1603년 간행된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과 《몽산법어약록(蒙山法語略錄)》,

1604년에 나온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 1611년에 간행된 《선문강요집(禪門綱要集)》 등이 있다.

                                                                                         (안내문)

 

 

 

삼성각

 

 

□ 명부전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봉안하여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협시하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冥府十王像)을 안치한 곳이다.

명부전은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 등과 함께 한국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전각으로 한국 불교의 토착화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1687년(숙종 13) 성안대사가 창건하였고 1710년(숙종 36) 신민대사가 중수하였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5량 구조이며 익공계 맞배지붕집이다.

익공은 출목(出目)이 있는 2익공계이며 옆에는 풍판(風板)을 두어 상부구조를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각 어칸을 제외한 각 칸에는 머름이 있어 출입할 수 없고 어칸에는 세살 여닫이만, 협칸에는 2짝 세살 여닫이창,

툇간에는 1짝 세살 여닫이창을 두었다.

간살은 거의 동일하며 주간(柱間)에는 화반(花盤)이 생략되어 있다.  (안내문)

 

 

 

 

 

 

 

 

 

□ 쌍계사 마애불(경남 문화재자료 제48호)

 

쌍계사 대웅전의 동쪽에 있는 큰 암석의 한 면을 움푹 들어가게 파내고 그 안에 불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고 크게 표현되었으며, 옷은 두툼하여 옷주름이 무릎 부분 이외에는 뚜렷하지 않다.

왼손은 오른손 위에 올려 놓고 있어 무엇인가를 받들고 있는 듯하다.

스님으로 보일 만큼 매우 순박한 모습의 이 불상은 옷이나 손모양 등에서 특이한 점이 보이며,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약사여래불로 보이며,높이 135센티 폭90센티이다.  (안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