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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등등/생활 속 발견

어머님을 기리며

by 즐풍 2014. 5. 30.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7년만에 어머님도 아버님 곁으로 가셨다. 이제 부모님께서 계시지 않으니 천애고아가 된 느낌이다.  가끔씩

찾아 뵐 때마다 어머니는 끝없이 나를 쳐다만 보셨다. 교통사고로 1년을 넘게 병원에 계시다 퇴원해서는 여동생이 2년을 넘게 간

호를 하고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드릴 땐 동생이 제일 좋다고 말씀 하셔도 막상 내가 눈 앞에 있으면 동생이고 뭐고 내가 제일 좋

다시며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하신듯 눈이 짓무를 때까지 보겠다며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셨다.

 

봉건시대의 남아 선호사상이 뿌리깊은 분이라 딸이 아무리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고 모신다 해도 어쩌다 한 번 나타나는 막내아들

이 최고였다.  동생이 들으면 서운 할 법도 하지만 허허 웃으며 아들 많이 보라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

로 가셨으니 애닯기만 하다. 정신대로 강제 동원된다는 소문에 열다섯 꼬마같은 신랑에게 두 살 더 많은 나이로 시집을 와 시어머

니에게 혹독하게 시달렸으니 그 설음이 오죽했으면 할머니 묘지 쪽엔 절대로 묘를 쓰지 말라고 하셨을까?

그런 서글픈 현실에서 벗어나는 건  오직 농사일 밖에 없다는 듯 하루종일 호미만 들고 사셨으니  손은 웅툴붕툴하고 손 마디마다 

관절염이 걸려 고생도 많이 하셨다. 그런 굴곡진 삶을 영위하셨기에 심장병을 얻어 결국 수술까지 해야했던 어머님.

 

화장만큼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며 매장만 고집하시더니 잘 정리된 이천호국원을 다녀오신 후 납골당도 좋다며 승락하셨기에

아버님과 동혈동실(同穴同室)하시게 됐다.  엊그제 염 할 때 자유로운 영혼으로 저 세상에서 편하게 지내시라 축원드렸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결국 아버님과 또다시 한 방을 쓰게 됐으니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동고동락을 넘어 내세도 함께 하시게 됐다. 

하기야 아버님을 염 할 때 당신께선 아버지 얼굴을 어루만지며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셨으니 이제야 그 약속을 지

키는 셈이다.

 

이런 어머님에겐 딸보다 더 할머니를 사랑했던 외손녀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할머니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거동을 못

하시니 때로 대소변을 받아내 집안에 냄새가 나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졸리면 그 좁은 병원용 침대에 올라가 할머니랑 같이 잠

을 자는가 하면 서로 얼굴을 비비며 살갑게 대하니 어머니도 완전히 무장해제 됐다.  게다가 사회에서 존경받는 고등학교 선생이

라 내심 자랑스러워 하셨다.  그러나 때로 여리디 여린 조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친 욕이 쏟아져 나와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방문하면 억양이나 어투까지 흉내내 한바탕 웃음을 선물한다.  부모의 심성을 그대로 닮은 그런 훌륭한 조카가 있다는 게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사실 우리말을 가장 오염되지 않게 구사하는 계층이 배움이 없는 노년층이다. 머리에 먹물 꽤나 들어 영어를 배운 사람들은 우리

말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사동사를 일상적으로 쓰지만 할머니는 사동사는 커녕 1920년대 초에 태어나 우리세대에는 없는 고어가

더러 남아 있어 국어선생인 조카에게는 오히려 살아있는 교과서였던 셈이다. 

 

어머님이 안 계시니 그리움과 함께  더 이상 어머니의 손맛을 느낄 수 없다는 아쉬움이 크다.  그 맛나던 된장이나 고추장 막장은

맥이 끊겨 앞으로  더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됐다.  잘 삭혀 줄기까지도 입에서 녹는 깻잎장아찌나  마른고추 볶음의 아삭거리는

식감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칼국수나 된장국, 멸치가 들어가 고소했던 쌈장, 이 모두가 한결같이 시골풍의 음식들이지만 누구

도 흉내낼 수 없는 75년이나 묵은 손맛으로 다시는 복원될 수 없기에 어머님과 함께 추억으로만 남게 되었으니 맛을 아는 행복이

몇 개는 사라진 셈이다. 

 

3년간 병상에 계셨으니 이제 어머님 영혼은 바람처럼 자유롭게, 새처럼 가고 싶은 데로 어디든 가시며 이생에서 못한 여행이라도

맘껏 하시길 축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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