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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서울공예박물관의 근현대기 공예작품

by 즐풍 2024. 2. 1.

2024_17

 

 

 

2024. 1. 2. 화요일

 

 

열흘 간격으로 두 번 찾은 서울공예박물관은 같은 내용이 대부분이다 보니 다소 지루한 느낌이다,

지난번에 보지 못했던 공예 아카이브실을 둘러보며  유물의 보존처리 과정의 한 단면을 보는 행운도 있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외침 속에서도 이 정도의 문화재라도 지킬 수 있었음에 감사드린다.

깨인 선각자들이 사재를 털며 해외반출을 온몸으로 막아낸 결과물들이다.

(안내문을 옮기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조선시대에는 왕비·왕세자·왕세손 등을 책봉하거나 왕·왕비·세자·후궁 등에게 특별한 이름(존호나 시호)을 올릴 때 그 사실이 담긴 기록물, 즉 어책(御冊)이 제작되었다. 왕·왕비의 경우는 옥(玉)으로 제작되어 옥책(玉册), 왕세자·후궁의 경우는 대나무로 만들어져 죽책(竹)이라고 했다. 어책은 그 시대 최고의 기량을 가진 남녀 장인들 100명 이상이 최고의 재료를 국가로부터 제공받아 재료의 가공부터 마지막 기물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긴밀한 협업을 통해 제작하는 최고 수준의 왕실 공예품이기도 했다.

 

 

화각함 華角函

 

소뿔을 아주 얇게 저며 네모난 각지를 만들고, 그 뒷면에 그림을 그린 후 이를 나무로 만든 함 표면에 붙여 장식한 것이다. 화각 기법으로 제작된 목가구들은 소재 자체가 희귀하고 가공도 까다로워 주로 왕실이나 상류층이 사용했다.

이 화각함에는 기린, 학, 사슴, 거북, 소나무, 영지, 모란, 바위 등 불로장생과 부귀 등을 상징하는 각종 동식물과 자연물이 문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각지와 각지 사이 이음새에는 가늘게 깎은 동물 뼈를 끼워 넣어 완성도를 높였다. 함 앞바탕의 장석 등에 조이질로 문양을 표현한 금속 장식기법은 왕실에서 제작된 작품들에서 보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초화 무늬 시전지판  木彫草花文詩箋紙板

돌배나무에 매화, 국화, 대나무 문양 조각

H 76.3cm, W 15.5cm, 조선 후기, 19세기 후반, 유홍준 기증

 

 

추사 김정희의 다향실 편액이다.

김정희의 자는 원춘(元春)·추사(秋史), 호는 완당(阮堂) · 예당(禮堂) · 시암(詩庵) · 과파(果坡) · 노과(老果) · 농장인(農丈人) · 보담재(寶覃齋) · 담연재(覃硏齋) ·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 있다.

 

 

 

 

 

 

나전칠 대모 봉황무늬 함 螺鈿漆玳瑁鳳凰文函

백골에 옻칠 후 나전과 대모로 문양 장식, H 22.2cm, W 70cm

 

 

공예 진흥에 힘쓰다

 

대한제국은 공예 기술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장인을 양성하기 위해 1907년 근대식 공예 교육 기관인 관립공업전습소를 설립하였다. 한편 경공장의 해체로 흩어진 장인들을 모아 전통 공예의 진흥을 위해 1908년에는 한성미술품제작소를 설립하였다.

 

 

은제주전자 

한성미술품제작소, 銀製注子,  H 17.7cm, W 12.5cm, 1913~1922년

 

은제 ‘漢城美術(한성미술)'이 새겨진 주전자 銀製漢城美術銘注子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은에 음각, H 16.3cm, W 11.5cm, 1912년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이 된 오얏꽃[李花文]

 

신령한 오얏나무[李氏]는 근본이 튼튼하고 뿌리가 깊었습니다. 사공(司空)으로부터 대대로 덕(德)이 무성하더니, 길이 그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왕(桓王)에 이르렀습니다.

                                 「동북면 함주에 환왕의 정릉비를 세우다」,  『태조실록』 4권, 1393년(태조 2년) 9월 18일

 

경운궁의 신축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중앙의 국왕 처소에서 국왕을 알현했다. 이 처소(함녕전)는 조선 최고의 도목수가

지은 독채 건물로서, (중략) 그 끝은 왕실의 상징인 다섯 잎의 오얏꽃이 새겨 있었다.

                                   이사벨라 비숍, 1896년 서울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1897년

 

'이화대훈장(李花大勳章)'이라 하였으니 이는 나라 문양에 취한 것이다.

                                 「조서를 내려 각훈장의 이름과 뜻을 밝히도록 하다」

                                 『고종실록』 40권, 1900년(고종 37년) 4월 17일

 

국가등록문화재 제822 

 

한성미술품제작소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전통적인 요소에 근대적인 제작기술을 적용한 사례로 그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기물은 금형(金型, Press) 기법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각종 문양을 음각하여 금으로 도금했다. 바닥에는 '漢城美術(한성미술)'이라고 새겨 제작처를 표시하였다. 대한제국 황설용 기물들을 제작한 한성미술품제작소(1908~1913년)의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은제 오얏꽃무늬 발 銀製李花文鉢

한성미술품제작소, 은에 음각, 금도금, H 12.4cm, W 18.2cm, 1908~1913년

 

 

황실의 상징을 담은 공예

대한제국은 국가 의례와 상징물을 황제국의 위상에 맞게 정비하고, 황실의 상징을 도안화하여 공예품에 장식하였다.

 

검 

점에 새겨진 오얏꽃무늬, 니켈에 음각

L 76cm, 19세기말~20세기 초반

 

 

공예, 시대를 비추다  工艺, 照亮时代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전통 공예가 위축되고 산업 공예가 일상에 파고들었다. 공예품이 관광 상품이나 기념품으로 주목받으면서 자본가들이 공예품 제작과 판매에 참여하였고, 이렇게 생산된 공예품들은 백화점이나 공예 상점을 통해 유통되었다. 판매 경쟁이 심해지면서 다양한 시각 매체를 통한 광고가 시작되고 공예품의 상표나 고유 마크가 일반화되었다. 이로써 공예는 본격적인 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조선미술전람회를 비롯한 각종 전시회에서 공예는 미술의 한 분야로 편입되고, 선진 교육을 경험한 공예가들이 이 전시회를 통해 배출되어 미술로서의 공예의 지평을 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앞 시대와는 다른 근대적 요소가 담긴 공예품이 등장하였다.

20세기 전반의 공예품은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쇠퇴해 가는 전통 공예품의 대중적 인기를 높이는 데 목표를 두고 만들어졌다. 기계화에 의한 대량 생산과 규격화된 도안의 범람으로 진정한 창작의 기회가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공예품은 우리 땅에서 나는 재료와 전통을 계승한 솜씨로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이며, 이 시기 장인들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며 전통 공예 기술을 현대로 전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동제 비천무늬 두 귀 달린 병  銅製飛天文兩耳瓶

조선미술품제작소, H 22.7cm, W 8.5cm, 1922~1936년

 

 

은제 도철무늬 두 귀달린병  銀製饕餮文兩耳瓶

조선미술품제작소, H 24.6cm, W 9.3cm, 1922~1936년

 

 

석제 거북이모양 붓 받침 石製龜形筆臺

20세기 초반, 예용해 컬렉션, 예종희 기탁

 

 

동제 봉황무늬 화병 銅製鳳凰文花瓶

조선미술품제작소, H 34cm, W 15cm, 1922~1936년

 

 

근대의 공예가들

 

3·1 독립운동 이후 일제가 표방한 문화 통치의 일환으로 1922년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를 선두로 각종 전람회가 성행하였다. 전람회를 통해 작품을 홍보, 판매하는 체제가 갖추어진 것이다.

이 시기에 일어난 골동품 수집 열풍도 공예가들의 활동 범위를 넓히는 데 한몫을 했다. 이런 배경에서 전성규, 김진갑, 강창규, 김봉룡 등 새로운 공예를 시도한 공예가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전통 공예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데 공헌하였다.

 

 

김정섭 (1899~1988)

 

김정섭은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금속 조각을 배웠다. 

1930년부터는 종로 1가에서 금은방 '삼광상회'를 경영하고, 해방 이후 후학 양성에 힘썼다.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35호 조각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은제 표주박모양 주전자 製瓢形注子

김정섭, 은, H 22.5cm, W 1.5cm, 20세기 초반

 

 

은제 봉황무늬 화병 銀製烏銅入象嵌鳳凰文花瓶

김철주, 은에 오동상감, H 23.5cm, W 6.2cm, 2010년, 국립무형유산원 소장

 

 

동태 나전칠 구름 용무늬 화병 銅胎螺鈿漆雲龍文花瓶

김진갑, 황동에 옻칠, 나전, (화병) H 18.2cm, W 5.98cm, (받침) H 2.8cm, W 12.2cm, 20세기 초반

 

 

도태 나전칠 공작무늬 화병 陶胎螺鈿漆孔雀文花瓶

김진갑, 청자에 옻칠, 나전과 금분으로 장식, H 30.1cm, W 9.2cm, 1930년대

 

정자 위에 흑질을 하고 나전과 금채로 장식한 화병이다. 몸체에는 암석에 앉아있는 공작새와 모란꽃 그리고 나비 한 마리가 장식되어 있다. 화병의 아래쪽의 '김진갑 제작(金甲 製作)'이라는 붉은 인장[朱印]을 통해 작가를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나전기법에 일본 칠기 기법을 수용한 기량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컴퓨터단층 촬영(CT) 결과에 의하면 원래 분리되었던 굽다리와 굽바닥면을 옻칠로 부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도소리 波濬聲

정창호, 옻칠, 나전, H 22.5cm, W 27cm, 20세기

 

 

강창규(1906~1977)

 

강창규는 일본에 유학하여 건칠 공예를 배웠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달아 특선을 차지한 데 이어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에서도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입선함으로써 건칠공예가로 이름을 떨쳤다. 1946년에 자신의 호를 따서 '창원공예연구소’를 설립하였다. 6·25 전쟁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국전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김진갑 (1900~1972)

 

김진갑은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칠 공부(工部)에서 나전칠기를 익혔고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에 여러 차례 특선하는 등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나전칠기공예제작소를 운영하다가, 해방 후 신성공예사로 이름을 바꿔 제작 기술을 전수하였습니다. 나전칠기의 산업화에 기여하였으며 동시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김봉룡 (1902~1994)

 

김봉룡은 박정수와 전성규에게 나전칠기 제작 기술을 배웠다. 전성규가 일본 조선나전사 [朝鮮之螺社]에 초빙되었을 때 동행하였고, 1922년 귀국 후 삼청동 전성규의 공방에서 근무하였다. 1925년 파리 만국장식미술공예 박람회 등 외국의 박람회에서도 수상하였다. 1930년 고대미술나전칠기 공예소를 설립 · 운영하였다.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 나전장으로 지정되었다.

 

 

나전칠 석류무늬 소반 螺鈿漆石榴文小盤

이형만, 나무에 옻칠, 나전, H 20cm, W 36.5cm, 20세기

 

 

나전칠쌍룡 무궁화 넝쿨무늬 함 螺鈿漆雙龍無窮花唐草文函

김봉룡, 나무에 옻칠, 나전, H 7.5cm, W 21.7cm, D 27.8cm, 1970년대 후반

 

 

전성규(1880~1970)

 

전성규는 통영 출신 엄항주로부터 나전칠기 제작 기법을 배웠다. 1920년 일본의 나전칠기 회사인 조선나전사[朝鮮之螺鈿社]에 초빙되었던 그는 귀국하면서 금속 세공용 실톱 사용법을 익혀와 나전 제작에 활용하였고 이는 주름질 기법의 혁신을 가져왔다. 1925년 제자 김봉룡과 파리 박람회에 나전칠기를 출품하여 수상하였고 1934년,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1927년 서울에 나전실업소를 설립하여 제자들을 기르다가, 1937년 평안북도 태천칠공예소 교장으로 부임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의 제자로는 김봉룡, 심부길, 송주안, 민종태 등이 있다.

 

 

나전칠 낚시하는 어부그림 사각상 螺鈿漆釣魚山水圖四角床

전성규, 나무에 옻칠, 나전, H 9.5cm, W 35.5cm, D22cm, 20세기 초반

 

흑칠에 나전으로 장식된 직사각형 상이다. 낚시하는 어부와 산수를 한 폭의 그림처럼 나전으로 묘사하였다. 왼쪽 상단에는 ‘今日得魚醒復醉 十年深悔一封侯 (오늘 고기 잡아 술 깨고 다시 취하리. 십 년 깊이 뉘우쳐 한번 벼슬에 오르네)’라는 은거하는 선비의 심경을 담은 시구가 있다. '守谷(수곡)'이라는 서명을 통해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나전칠기 공예가 전성규(全成圭, 1880~1940)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나전칠 매화그림 서류함 螺鈿漆梅花圖函

송방웅, 나무에 옻칠, 나전, H 9.7cm W 32cm, D 24.2cm, 2000년

 

 

나전 장롱 螺鈿欌籠

김태희, 자개, 옷칠, 나무, 졸음질, 상감, 조각, H 200cm, W 302cm, D 70cm, 1962년

 

 

위 나전 장롱은 유리가 반사된 데다 조각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하여 각각의 조각 작품을 하나씩 찍어 한 군데 묶고, 왕관만 따로 떼어 올린다.

 

 

 

공예에서 찾은 한국의 아름다움

 

일제강점기 문화 말살 정책에 대응하여 전통을 수호하고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는 다양한 노력이 있었다. 방법은 달랐지만 고유섭, 오세창, 전형필 등은 우리 공예의 전통을 수호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아사카와 다쿠미 형제, 야나기 무네요시 등이 전개한 조선 미술의 연구와 민예론은 우리 미술에 깊은 화두를 남겼다. 주권 상실의 시대에 전통 공예의 개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자각은 민족적 자의식이 성장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나전칠 인물무늬 경상 螺鈿漆人物文經床

나무에 옻칠, 나전, H 26cm W 67cm, 1920년대

 

 

경성의 공예 상점가

 

경성은 근대 공예품의 집산지이자 최대 소비지였다. 조선시대의 번화가인 종로 일대 시전에서 그 주변으로 범위가 크게 확장되어, 이 부근에는 소규모 상점(상회)에서 백화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의 공예품 상점가가 있었다. 유통 구조가 근대화되어 전문적인 판매처가 생겼고, 그 판매처가 기업화되어 장인을 고용하여 제작하거나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 등 산업 공예가 본격화되었다.

 

 

도태 나전칠 연광정무늬 화병

통영칠기제작소

 

 

나전칠 화로 螺鈿漆火爐

 

보석함

 

 

서울공예박물관에 전시된 유물과 작품을 다섯 편에 걸쳐 마무리한다.

두어 시간 관람에 며칠 걸린 포스팅이다.

안내문을 AI를 이용해 문자로 변환한다고 해도 양이 많다 보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독수리 타법 대신 AI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