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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서울공예박물관 만년사물실의 사전가 직물관

by 즐풍 2024. 1. 31.

2024_15

 

 

 

2024. 1. 2. (화) 오전에 관람

 

 

사전가 허동화와 부인인 아향 박영숙 두 분이 평생 수집한 자수품과 보자기를 기증받은 전시관에 들어선다.

지금처럼 기계로 자수를 놓지 않던 옛날엔 수를 놓는다는 게 모두 손으로 해야 했다.

임금의 곤룡포부터 양반의 의복까지 수를 놓을 일은 많았다.

궁중의 의복 대부분은 비단옷으로 봉황이나 사슴, 용 등의 화려한 무늬 전부를 비단으로 수를 놓게 된다.

비단이란 게 지금의 나일론처럼 가늘어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다는 건 여간한 인내심이 없으면 안 된다.

궁중 의복에 수를 놓는 수방(繡房)의 궁녀들은 무수리처럼 몸을 쓰진 않아도 온종일 바느질과 씨름해야 한다.

이번에 보게 될 자수는 그림처럼 보여도 모두 손 바느질한 것이라 그녀들의 한숨소리가 밴 작품들이다.

작품 전체를 담기 위해 조금 멀리서 찍었기에 동양화처럼 보이지만, 모두 자수라는 걸 염두에 두고 보아야 한다.

(안내문을 옮기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사전가 絲田家 허동화 許東華

 

허동화 許東華, 1926~2018는 부인 박영숙朴永淑, 1932~과 함께 생전에 수집한 자수품과 보자기를 포함한 소장품 5,000여 점을 서울공예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그는 우리 직물공예품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1960년대부터 자수품과 보자기를 비롯한 우리의 옛 복식과 침선 도구, 실내 장식품 등을 지속적으로 수집하였다. '사전가'는 허동화의 아호이다.

 

 

“나는 수집가로서 보람을 느낀다. 수집에는 사람을 순수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 힘이 사회나 국가, 더 거창하게는 인류에 공헌하고자 하는 큰마음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허동화, <수집, 발품 팔고, 공 들이고> 中

 

 

사전가絲田家란?

 

사전가는 기증자인 고 허동화의 아호이며 '사전이 사는 집'이란 뜻이다. 허동화는 생전에 자신의 호를 설명하면서 “사는 수놓을 때 쓰는 가는 실을 뜻하고 여기에 밭 전자가 붙어 실처럼 가늘고 구불구불한 논두렁 밭두렁 길이나 실밭을 의미한다" 하였다. 그는 시골에서 태어난 걸 자랑스럽게 여기며 평생 촌사람으로 살고자 이 아호를 지었다.

 

 

자수, 꽃이 피다

刺统, 錠放光彩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실을 만들고 옷감을 짰다. 실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가락바퀴가 한반도에서 사용된 것은 초기 신석기시대부터이다. 그보다 훨씬 후에 옷감을 짜면서 단순한 무늬를 표현하기 시작해 7세기경에야 5개 이상의 색실을 사용하여 복잡한 무늬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자수를 통해서는 자유롭게 무늬를 만들 수 있어서 1세기부터 벌써 복잡한 무늬를 표현할 수 있었고 그 크기와 표현 방식에는 한계가 없었다.

직조보다는 자수가 무늬를 자유롭고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효과적이다. 이처럼 자수는 오래되고 편하며 일상생활 가까이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매체이자 생활 도구였다.

<자수, 꽃이 피다> 전시는 서울공예박물관 허동화·박영숙 컬렉션에서 선정한 자수 병풍을 회화적 관점으로 재조명하고, 일상생활 구석구석을 수놓은 여인들의 마음을 담은 문양의 의미와 자수 기법을 소개한다

 

 

자수 화조도 10폭 병풍 刺繡花鳥圖十幅 屏風

견에 자수

H 143cm, W 365cm, 19~20세기

 

꽃과 새를 그린 화조도(花鳥圖)를 수놓아 꾸민 열폭 병풍이다. 폭마다 바탕천의 색이 다른 것이 특징이다. 매화, 연꽃, 복숭아꽃, 월계화, 모란, 석류, 국화 등의 꽃과 그에 어울리는 여러 종류의 새 또는 나비 한 쌍씩을 수놓았다.

자수 기법으로는 평수와 자수, 자릿수, 이음수와 매듭수 등을 사용하였다. 화조도는 장수, 부귀, 다산, 출세, 부부금슬 등 길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자수 병풍은 회화 병풍에 비해 화려하고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자수, 刺繡

 

우리 전통자수는 삼국시대(기원전 57~기원후 668)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통일신라 흥덕왕 9년(834)에 귀족 이외는 자수 장식 의복을 착용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자수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다. 한반도에 남아 있는 오래된 자수 유물은 사슬이 연결된 모양의 수가 놓여 있는 조각천이 대부분이다.

평양 석암리 214호분(1~2세기)과 신라 황남대총(4~5세기), 백제 무령왕릉(6세기)에서도 유사한 조각천이 발견되었다. 고려시대 (918~1392) 자수 유물로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에서 발견된 향낭을 비롯하여 안동 태사묘에 소장된 자수 직물 등 다수가 남아 있다. 조선 후기와 근대 자수 유물은 매우 많다. 이는 세월이 많이 흐르지 않아 보존이 잘 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 시기에 바느질과 자수를 여성들의 기본 규범으로 강조하였던 사회적 분위기가 크게 작용한 결과이다.

 

 

실로 그리는 用线作画

 

자수 기법으로 만든 대표적 작품은 자수 병풍이다. 갈대와 기러기 무리를 표현한 노안도(蘆雁圖) 같이 회화에서도 자주 다루는 주제나 이미 그려진 그림을 그대로 수를 놓아 제작한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리기와 수놓기라는 서로 다른 기법을 하나의 화폭에 함께 사용하여 표현 방법의 경계를 뛰어넘은 작품도 있다.

자수 병풍은 그림 병풍보다 제작에 품이 많이 들지만, 입체적이고 화려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 이유로 통일신라시대 이래 자수 병풍은 귀족과 부유층만이 누릴 수 있었던 호사품이었다.

 

 

 

 

화분이 그려진 자수

 

‘분경(盆景)’이란 화분에 나무, 화초를 심어 자연의 풍경을 만들고 보면서 즐기는 것이다. <자수 사계분경도>에는 꽃병[瓶]이나 화분[盆]에 장식된 꽃과 과실나무 및 기물(器物)과 보문(寶紋) 등이 표현되어 있다. 평안을 기원하는 화병이 수놓아진 자수 작품은 귀한 선물로 여겨졌다.

자수 작품에서, 연꽃은 얕고 입구가 넓은 수반(水盤)에 심었고, 나무는 화분에, 매화 등의 꽃가지는 입구가 좁고 깊은 화병에 꽂은 것으로 주로 표현하였다.

 

 

 

고이 댕기

견에 자수, H219cm, W85cm, 20세기

 

 

자수 '상궁청신녀'명연화봉황문 방석 刺繡 '尙宮淸信女'銘 蓮花鳳凰文 方席

서울시유형문화재 제441호

견에 자수, H 70cm, W 63cm, 조선 후기

 

극락왕생을 바라는 내용과 봉황, 연꽃 등을 수놓은 방석이다. 방석 아래쪽에는 '상궁 청신녀 임인생 리씨정희 생전무병소원 사후왕생극락발원'이라는 문장을 수놓았다. 발원자는 임인년(壬寅年)에 태어나고 ‘정희행' 법명을 가진 불교 신자 상궁으로, 건강하게 살다가 극락에 가기를 기원하는 염원을 담았다. 가운데 빨간색 직물에는 삼산(三山), 물결, 파도, 연꽃, 영지 모양의 불로초, 봉황 등을 수놓았다. 초록색 테두리 직물에는 연꽃 덩굴과 한 쌍의 새, 모란 덩굴을 표현하였다.

 

 

염원의 마음, 祈愿之心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누구나 죽기 때문에 현생에 대한 애착과 사후의 평안함을 염원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사는 동안은 다복하게, 사후에는 좋은 곳으로 가거나 환생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한 땀 한 땀 수를 놓았다. 저녁에 지고 아침에 새롭게 피어나는 연꽃에는 환생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고, 악귀를 쫓아낸다고 믿었던 복숭아로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석류가 어린아이를 보호한다는 설화 때문에 다산과 풍요를 소원할 때는 석류를 수놓았다.

 

 

행복의 마음을

 

일상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물건에 소망이나 염원을 담을 수 있는 방법 중에는 자수가 있다. 병풍처럼 크고 화려한 물건을 비롯하여 늘 몸에 지니고 활용하는 주머니, 안경집, 보자기와 옷, 쓰개, 신발에도 원하는 문양과 글자를 아름답게 수놓았다. 조선 후기에는 자손이 번성하고 오래 살며 복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장수와 복을 함께 의미하는 '壽福(복)'이라는 글자를 즐겨 수놓았다. 침실에서 사용한 향주머니에도 복(福)을 상징하는 박쥐를 수놓아 소망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부귀다남 富貴多男 "자식 많이 행복해라"

 

예나 지금이나 가정이 화목한 것은 큰 복이다. 조선 후기 여성에게는 자식, 특히 아들을 많이 낳아 집안의 대를 이어 가문을 번성하게 하는 것이 큰 행복으로 여겨졌다. 여성의 혼례복인 활옷에는 봉황과 모란, 나비 등을 수놓아 행복과 자손번창의 소망을 담았는데, 두 손을 모았을 때 자수가 잘 보이도록 소매 앞보다 뒤쪽에 수를 빽빽하게 놓았다. 활옷과 베갯모에 자주 그려지는 봉황무늬는 구봉(九鳳)이라 하여 봉황 한 쌍이 여러 마리의 새끼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화목한 가정을 의미한다.

 

 

五子登科 "바르게 자라 성공하고, 부귀영화를 누려라"

 

유교를 나라의 근간으로 삼았던 조선에서는 유교적 소양을 쌓을 것을 사대부 남성에게 강조하였다. 병풍 등으로 사랑방을 꾸미는 것뿐만 아니라 베개나 주머니 등 일상용품에 유교의 가르침을 담은 구절을 수놓아 가까이에 두고 마음에 새겼다. 안경집에도 소나무, 대나무, 매화 등을 수놓아 강인하고 기품 있는 선비 정신을 표현하였다. 더불어 혼례와 관련된 특별한 행사에 사용하는 물건들에는 부귀영화를 바라는 염원을 담기도 하였다.

 

 

籌福康寧 "오래오래 살고, 살면서 복 많이 받아라"

 

의약과 의술의 혜택이 부족했던 조선 후기, 많은 아이가 어른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때문에 부모들은 아이들이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그래서 장수를 의미하는 십장생과 복을 의미하는 박쥐 문양을 비롯하여 오래 살고 복을 많이 받으라는 뜻의 ‘百壽百福(백수백복)', 기쁜 일이 생기라는 뜻의 ‘囍(희)’ 등의 글자를 돌띠, 굴레, 댕기, 주머니 등에 수놓았다. 십장생 중 학과 사슴은 신선의 벗으로서 천상과 지상을 연결한다고 믿었다.

 

활옷

견에 자수, H122cm, W172cm, 19~20세기

 

 

나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나비는 행복을 상징하며 고양이와 함께 표현되면 장수를 의미한다.

 

 

 

 

자수 종정도 병풍 刺繡 鐘鼎圖 屏風

견에 자수, H 200cm, W 264cm, 20세기

 

종정도(鐘鼎圖)는 중국 고대 청동 예기(禮器)를 문양으로 그리거나 수놓은 작품을 일컫는다. 종정도의 그릇[器] 길상(吉祥)의 의미를 가져 궁중이나 반가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여섯 폭의 자수병풍으로, 각 폭에 5개씩 총 30개의 기물을 수놓았다. 검은색 바탕천에 황색 실로 수를 놓았으며, 도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기물의 명칭을 표기하였다. 명문 부분은 한문의 삐침까지 정교하게 이음수로 표현하였다.

 

 

견에 자수                           자수 활팔찌                        직금 활팔찌

 H12cm, W10cm                H15cm, W 13cm                 H15cm, W 13cm

19-20세기                          20세기                                20세기

 

 

돌띠와 자수 붓주머니

 

골무와 노리개

 

 

자수 백룡도 족자 刺繡 白龍圖簇子

견에 자수와, H133cm, W50cm, 19~20세기

 

백룡(白龍)을 그림, 자수, 아플리케(applique) 기법으로 표현한 자수 백룡도 족자이다. 구름으로 둘러싸인 여의주와 용을 노란색 직물에 표현하였다.

용의 몸통은 융직물을 오리고 가장자리를 꿰매 붙인 아플리케 기법으로 장식하였고, 그 위에 비늘을 그려 넣었다. 용의 뿔, 갈기, 수염 등은 이음수, 자수 등으로 수놓고 귀, 입 안, 뿔 등은 자수실 위에 빨간색으로 칠하였다. 자수뿐만 아니라 다양한 표현 기법을 함께 사용하여 용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나타냈다.

 

용의 머리만 확대한 사진이다.

 

아래 두 개의 자수와 囍 자수까지 베갯모이다.

 

 

수놓는 법

 

수를 놓는 기법은 매우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선을 표현하는 기법과 면을 채우는 기법, 입체감을 주며 장식하는 기법 등이 있다. 이러한 기법을 활용하려면 수를 놓고자 하는 도안을 천에 옮겨야 한다. 수놓을 밑그림을 직접 바탕천에 그릴 수도 있으나, 만들어져 있는 도안을 목판으로 만들어 찍거나 천 위에 종이 수본을 올려놓고 옮겨 그리기도 한다.

 

 

"이제 우리나라의 전통자수는 한국미술사에 새로운 한 장을 장식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수 작품 속에 담긴 한국 여인들의 의식, 습관, 풍속, 신앙, 사상 등이 문화사적 측면에서 재조명되고 또한 전통의 보존과 그 전승 문제가 해결되어야 비로소 ‘三千里 삼천리 錦繡江山 금수강산에 자수의 꽃이 활짝 피어나리라고 확신한다.”

                                                                               허동화, <한국의 자수> 서문 中

 

 

보자기, 일상을 감싸다

 

보자기는 네모난 형태의 직물이다. 그 직물을 사용해 우리는 물건을 보관하고 장식하며 간편하게 물건을 들고 다닐 수 있다. 틀이 있는 가방에 비해 공간 활용에 편하고 재활용이 가능하여 친환경적이다. '웃음보'나 '보쌈'처럼 보자기에서 유래된 단어도 많아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 박혀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자기, 일상을 감싸다> 전시에서는 궁중에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화려한 문양이 있는 보자기에서부터 민간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였던 보자기에 이르기까지 크기와 소재, 구성 방법 등의 차이와 보자기의 다양한 용도를 소개한다.

 

 

한 폭의 천 

 

보자기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육가야 시조 설화에 ‘紅幅(홍폭)’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옷감 폭 전체를 사용하여 만든 붉은색 보자기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특히 조선시대 궁중 의례에 사용되는 복식과 기물을 기록한 <상방정례(尙方定例)>와 행사별 물품목록인 <궁중발기 [宮中記, 궁중건기]>에서는 용례에 따라 사용된 궁보자기의 다양한 색, 소재, 크기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보자기를 표현하는

한자는 다양하다. 조선시대에는 ‘褓(보)’와 ‘袱(복)’을 함께 사용하였는데, 18세기까지 보자기는 ' (복)'을, 포대기를 의미하는 강보(襁褓)에는 '褓(보)’를 사용하였다. 19세기말부터는 두 글자가 혼용되다가 20세기부터 ‘褓(보)'와‘褓子(보자)’에 명사형 접미사인 '기’가 붙어 오늘의 ‘보자기'가 되었다.

 

 

오롯이 감싸

 

보자기의 형태는 대부분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이다. 용도에 따라 크기, 소재, 구성법, 끈의 개수 등을 결정하여 만들었다.

크기와 소재는 당연히 그 안에 들어가는 물건의 크기와 종류에 따라 결정된다. 한두 폭 보자기는 주로 선물·예물 등과 같은 작은 귀중품을 여러 번 겹쳐 싸는 데 사용되며, 귀한 견(絹, silk) 직물에 자수를 놓아 장식하기도 하였다. 반면 100㎝ 가량의 세 폭 이상 보자기는 옷이나 이불, 가구를 싸기 위해 면이나 마(麻, 삼베나 모시) 직물을 이용하여 튼튼하게 만들었다.

끈의 개수와 위치는 물건을 감싸는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귀중품을 싸는 보자기는 여러 번 감싸 단단히 묶을 수 있도록 한쪽 모서리에 끈 두 개를 단 경우가 많고, 이불 보자기 등은 이불이 조금 드러나더라도 사방에 끈을 달아 보자기 범위를 넓히는 등 실용성에 중점을 두었다.

보자기가 상자 안에 들어가는지, 상자 밖을 덮는지 등에 따라 구성법이 달라진다. 보자기에 솜을 두거나 누비는 이유는 물건이 상자와 부딪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수를 놓고,

 

자수 보자기는 다양한 색의 면이나 견(絹, Silk) 직물에 수를 놓아 만들었다. 보통 한 폭에서 한 폭 반 정도(40㎝ 전후)의 바탕천에 나무와 새 등을 강한 보색 대비로 수놓은 것이 많다.

나무와 새는 아름다운 자연을 그린 것일 수도 있고 보다 근원적인, 생명이나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를 상징할 수도 있다.

 

 

 

조각을 이어

 

바느질을 하고 남은 자투리 천으로 다양한 바느질 도구와 노리개 같은 장신구를 만들었다. 이는 남은 천을 알뜰히 이용한다는 면도 있지만 정성을 모아 복을 구하고자 하는 염원도 담고 있다. 그래서 어린이의 색동저고리나 깃과 섶을 조각천으로 꾸며 아이의 장수를 기원하였다. 자투리 천을 활용한 대표적인 예로 조각보를 들 수 있다. 조각보는 자투리라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가지각색의 조각을 모아 재탄생시킨 새로운 조형 작품이다.

 

 

베갯모                                      실패                                                자수 두루주머니

견, 잣물림                                 견, 쪽모이                                      견에 자수

Φ9cm, 19~20세기                    H 8cm, W 5cm, 19~20세기            H 9cm, W 11cm, 19~20세기

 

 

까치두루마기 

周衣, 견, 쪽모이, H 56cm, W 72cm, 19~20세기

 

 

괴불과 토시

 

 

밥멍덕

건, 쪽모이, H 15cm,  Φ 15cm, 19-20세기

 

 

조각 보자기 袱

견, 쪽모이, H 65cm, W 60cm, 19~20세기

 

 

보자기에 싸고자 하는 물건이 무엇인지에 따라 끈의 개수와 다는 위치를 정한다. 혼례용 기러기를 감싸는 보자기의 경우, 긴 끈의 중간을 한 모서리에 고정하여 양쪽에서 돌려 묶을 수 있도록 하였다. 책보 또는 봇짐은 튼튼한 직물로 만들어 사방 귀퉁이를 직접 묶거나, 대각선 방향으로 두 개나 네 개의 끈을 달아 어깨에 메거나 허리에 두르기에 수월하게 하였다. 밥상이나 소반을 덮는 보자기는 음식이 닿는 부분에 기름종이를 덧대어 보자기가 쉽게 젖지 않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끈은 없거나 사방에 달려 있어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하였다.

 

 

자연인 허동화

 

허동화의 고향은 탈춤으로 유명한 황해도 봉산이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의 모친은 구걸하는 행인에게도 한상 차림을 내주었다. 그런 모친의 후한 인심과 자식에 대한 각별한 사랑은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6·25 전쟁에 참전한 공적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55년 치과 의사인 박영숙과 결혼한 허동화는 이후 사업가의 길을 걸으며 틈틈이 자수품을 수집하였다. 1971년 병원 한편에 본인의 수집품을 소개하는 전시실을 열게 된 것이 그가 평생 일구었던 한국자수박물관의 출발점이다.

 

 

박물관인 허동화

 

1976년 허동화는 서울 을지로에 한국자수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후 그는 자신의 아호를 넣어서 박물관 이름을 사전자수

박물관으로 바꾸었다가 1991년 논현동으로 이전하면서 한국 자수박물관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평생 수집한 자수품과 보자기를 가지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박물관’을 운영한 허동화는 100여 회의 전시를 통해 우리 직물공예의 우수함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다.

 

브로치

혼합재료, H6~8cm, W 7~8cm, 2000년대

 

허동화 선생

 

 

평생을 수집한 자수 등 유물을 아낌없이 기증하신 허동화 내외분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