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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서울공예박물관의 만물사물과 공예아카이브실

by 즐풍 2024. 1. 31.

2024_14

 

 

2024. 1. 2. 화요일 오전에 관람

 

불과 한 달도 안 돼 다시 서울공예박물관에 들어섰다.

지난번에 왔을 땐 마감을 한 시간  남겨두고 들어왔기에 못 본 공간도 많았다.

이번엔 천천히 여유 있게 살펴보며 전에 놓친 곳까지 두루 살펴본다.

국립중앙박물관보다 규모는 작지만 다양한 작품이나 유물이 전시되어 알찬 곳이다.

 (작품 설명인 안내문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장인(匠 人), 공예의 전통을 만들다

 

인류 역사는 공예 발전의 역사이다. 인류는 돌, 흙, 나무 등 자연 소재를 가공하는 도구를 발명하고 기술을 개발해 환경의 제약을 극복해 왔다. 아울러 일상생활을 편리하고 아름답게 꾸리며 문명의 토대를 세웠다. 한반도에서는 고대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주요 공예 소재와 장인들을 관리했다.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인이자 예술가인 장인들은 관부에 속해 국가와 왕실이 필요로 하는 각종 기물(器物)들을 안정적으로 제작, 공급했다. 또한 신소재와 기술들을 다른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하는 가운데 우리 공예의 특성이 확립되었다. 공예의 전통을 만든 장인들의 손에서 광석은 금속공예로, 흙은 토기를 거쳐 도자기로, 나무와 전복은 나전칠기로 새롭게 탄생하였다.

 

 

 

화염을 견딘 금석․ 권력과 권위를 만들다

 

청동기시대부터 제작된 금속기들은 그것을 가진 자에게는 권력과 풍요를 못 가진 자들에게는 복종과 죽음을 안겨주었다. 특히 고대 국가 성립 이후 장인들이 제작한 동검(銅劍)과 동경(銅鏡), 금관과 귀걸이 등의 금속공예품들은 계급과 신분을 보다 명확히 구분하고 드러내주었다.

한편 향로, 금강령, 동종 등은 고려 사회에서 불교가 차지하고 있던 정신적 권위를 보여준다.

 

 

영국사 터 출토 금강령과 금강저 寧國寺址金剛鈴及金剛杵

보물 제2135호, 동으로 주금 후 도금

1H 19.5cm, W 5.2cm,  2L 7.6cm, 3H 17.7cm, W 4.8cm

고려, 서울 도봉구 영국사 터 출토, 한성백제박물관 소장 

 

밀랍 주물로 전체 형상을 만든 뒤 세부 문양을 매우 섬세하게 조각하였다. 특히 금강령의 경우, 오대명왕(五大明王)·범천(梵天)·제석천(帝釋天)·사천왕(四天王) 등 총 열한 분의 불교 존상들이 한 기물에 모두 표현되어 있는데, 이런 형식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금강령 중 유일하다. 금강령 안에 매달려 흔들었을 때 맑은 소리를 내는 탁설(舌)은 여의주를 문 물고기 형태인데 지느러미와 비늘까지 생생하게 조각되는 등 기술적, 예술적 완성도가 높다.

 

 

청동은입사 향완 青銅銀絲香垸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83호, 동(銅)으로 주금 후 은(銀)으로 문양 입사

H 21.2cm, W 20.9cm, 고려, 14세기 

 

사찰의 불단에 놓이던 향로의 일종이다. 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봉은사 청동은입사향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동 은입사 향완> 등과 그 형태와 문양 구성 등이 유사하다. 몸체 네 부분에 란자체로 된 범자(字)  네 글자를 각각 두 줄의 원 안에 던입사(入絲)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연꽃무늬로 장식했다. 

입술 테두리에는 번개무늬(電文)를 두르고, 그 안쪽에 넝쿨무늬를 표현하였다. 받침대 전체를 용(龍)이 둘러싸고 있는데, 고려 후기 이후 용은 불교에서 아미타여래나 미륵신앙과 관련해 죽은 자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존재로도 여겨졌다.

 

 

입사로 전하는 메시지

 

입사(入絲)는 동이나 철 등 강도가 높은 금속 표면을 판 후 바탕 금속과 색이 다르고 무른 금·은·납 등을 그 안에 끼우거나 쪼아 박아 문양 등을 돋보이게 하는 기법이다.

도자의 상감(象嵌), 목칠의 나전(螺鈿) 기법도 그 제작 원리가 입사와 같다. 고대에는 입사 기법이 주로 무구(武具)나 마구(馬具) 등 전투용품 제작에 적용되었으나,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국가 의식과 불교 의식용 기물, 왕실과 귀족들의 생활용품 등에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고려시대 향완의 시대별 전개와 문양

 

통일신라시대 향로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고려시대에는 활발한 국제 교류 속에 11세기경부터 나팔 모양 받침대, 밥그릇 모양 몸체, 원반 모양 입술 등으로 구성된 향완이 새롭게 등장했다.

12세기부터는 표충사 소장 <청동은입사 향완>과 같이 표면에 응, 봉황 등 상서로운 동물과 범자(梵字) 무늬를 주 문양으로 하고 연꽃넝쿨, 구름, 번개 등을 보조문양으로 하는 일정한 문양구성 방식을 마련해 장식하기 시작했다.

이후 13세기에는 <'咸平宮主房(함평궁주방)'이 새겨진 동제 은입사향완>에서와 같이 범자 둘레에 여의두문을 장식하는 방식이 새롭게 자리 잡았다. 14세기 중반 이후에 들어와서는 파도 무늬, 동전 무늬(錢文) 등이 더해져 좀 더 다채로워졌다.

 

 

고려시대 향(香) 문화

 

고려시대에는 왕실뿐만 아니라 사찰과 일반인들 사이에 향 문화가 널리 유행하였다. 왕실과 사찰에서는 국가 행사와 종교 의례 시법식에 따라 향로를 비치하였다.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의 남성들은 박산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을 옷에 스미게 하여 옷감을 보존하고, 여성은 향주머니를 많이 가질수록 귀한 사람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영국사 터에서 발굴된 금속 유물들

 

고려시대 영국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에 1573년 조선의 유학자 조광조를 기리는 도봉서원이 세워졌다. 2012년 서원 터를 발굴하던 중 땅 밑에서 총 79점의 영국사 관련 금속공예품이 출토되었다. 그중 청동 굽다리 그릇에는 '鷄林公施(계림공시)'라는 글이 새겨져 고려 15대 왕 숙종이 즉위 전인 1077~1095년 시주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또 청동 걸이향로와 청동 향합에는 ‘道峯寺(도봉사)’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어 영국사 이전 명칭이 도봉사였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대부분 11~1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들은 고려시대의 세련된 금속 제작 기술을 보여주는 한편,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와 불교에서 유교로의 변화를 상징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자연적 혹은 인공적으로 유약이 발라져 표면이 매끄럽고, 도구로 동일 문양을 연속적으로 찍은 도기가 장인들에 의해 제작된다.

전시된<인화 무늬 합>은 물레로 그릇의 형태를 만든 후 뚜껑과 몸체에 열쇠 구멍과 반원 모양의 무늬를 반복적으로 찍어 장식하였으며, 시유(施釉)의 흔적도 남아 있다.

 

 

굽다리 항아리 臺附壺                 인화 무늬 합 印花文盒                  긴목항아리 長頸壺

흙, H17cm, W8.7cm                   흙, H11.3cm, W12.6cm                 흙, H16cm, W16.7cm

가야, 5세기                                 통일신라, 7세기                            통일신라, 6세기

 

 

빗살무늬 토기가 청자매병이 되기까지 만여 년

 

신석기시대에 인류는 토기를 만들어 잉여농산물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이때 빗살 무늬, 물결무늬, 융기무늬 등을 토기에 새기고 700~850°C 온도에서 굽는 등 오늘날 공예의 기초가 되는 제작 활동이 이루어졌다.

전시된 <빗살 무늬 토기>는 토기의 겉면을 아가리, 몸통바닥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각 부분에 서로 다른 빗살 무늬로 장식했다아가리 부분의 구멍은 수리해 사용한 흔적이다.

청동기시대에는 보다 다양한 기형의 무늬 없는 토기가 700~1,000°C에서 구워졌는데표면에 붉은 칠을 한  것과 표면과 속을 모두 검게 구운 토기의 표면만을 갈아 매끈하게 만든 것도 새롭게 등장한다전시된 <붉은 간토기>는 고운 바탕흙으로 기형을 만든 후표면에 산화철을 발라 잘 구워 붉은 광택이 돈다. 저장용과 의례용 용기로 사용되었다.

 

 

청자상감 구름 학 무늬 매병

 

몸체에 구름 속을 날고 있는 학의 모습이 상감되어 있는 병이다. 푸른빛을 띤다. 이러한 병은 고려시대에 감상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꿀이나 기름 등 액체를 담는 용기로도 사용되었다.

 

 

청자상감 구름과 학 무늬 매병 靑磁象嵌雲鶴文梅甁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77호, 청자에 구름과 학 무늬 감입

H 31.7cm W 5.2cm, 고려 12세기 후반~13세기 초반

 

매병이라 불리는 이 기형을 고려 때는 '준(樽)'이라고 불렀다. 매병은 감상용 혹은 꿀기름 등을 담는 실용 용기로 사용되었다. 몸 전체에 검은색 흙 (赤)과 흰 흙(土)을 태토(胎土)에 박아서 학과 구름무늬를 표현하고, 입구는 음각으로, 아래 부분은 상감으로 번개무늬 따를 둘렀다. 1213년 이전 난파된 마도 2호선 의 유물 중 <청자상감 국화 모란 유로 죽문 매병(靑磁象嵌菊花牡丹柳竹文梅甁)>과 기형, 흑백 상감 장식이 비슷하고, 몸체에 상감된 구름학 무늬가 부안 유천리에서 출토되는 것들과 유사하므로 이 매병은 12세기 후반~13세기 전반 부안 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흙과 불로 역사와 예술을 창조하다

 

한 시대의 발전상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문자로 된 기록이 없더라도 토기와 도자기의 모양과 색, 장식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 이후 인류는 흙과 불을 다루는 기술을 발전시켜 토기에서 도기로, 다시 도기에서 자기로 그릇의 강도를 높여갔다.

이 과정에서 장인들은 성형 도구와 유약, 장식 기법 등을 발전시켰다. 또한 성분이 다른 각 지방의 흙을 사용해 시대별, 지역별로 빛깔이 다른 도자를 생산해 냈다. 한반도에서의 도자 제작의 독창성과 예술성은 고려시대 청자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고려청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로부터 약 천 년 뒤인 일제강점기에는 청자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이 대유행이 되기도 했다.

 

 

청자의 장식 문양과 기법

 

고려청자의 장식 문양에는 학과 구름, 능수버들과 오리, 연꽃·국화·모란 등의 꽃, 앵무새, 여의두, 번개무늬[雷文], 구슬이음무늬[連珠文], 연리문(練理文)등이 있다. 

장식 기법에는 조각칼 등의 도구로 문양을 새기거나 깎는 방법(예 : 음각 양각 투각, 상감 등)과 성분이 다른 안료를 사용해 문양의 특정 색을 강조하는 방법(예:산화철이 포함된 안료를 이용하는 철화, 백토 안료를 사용하는 퇴화, 산화동이 함유된 안료를 활용하는 동화)이 있다.

 

 

청자의 빛깔

 

산화제이철(Fe2O3)이 1~3% 함유된 회색빛 흙으로 그릇을 빚은 후 유약을 씌워 1,200℃ 이상의 고온에서 환원염(還元焰)으로 구우면 산화제일철(FeO)이 형성되고, 표면이 투명하고 단단한 유리질로 코팅된다. 이러한 화학적 변화에 더해 유리질 코팅 부분에서 빛의 산란과 굴절 작용이 일어나 우리 눈에는 자기가 푸른빛으로 보이게 된다.

그러나 청자는 태토의 철분 함유량, 가마 안에서 흙 속의 철분이 산소와 만나거나(산화) 태워져 사라지는(환원) 현상들에 의해 푸르게도, 누렇게도 보일 수 있다. 청자의 다양한 빛깔은 이렇게 해서 생겨난다.

 

 

다양한 색깔과 장식의 청자 편은 강진 고려청자박물관에서 양여하여 주셨습니다.

 

 

 

자연이 준 귀한 도료, 옻칠

 

옻칠은 수확량이 극히 적지만 칠을 한 물건들에 내구성과 아름다움을 더해주어 고급 공예품의 마감재로 사용된다.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옻칠 사용의 흔적은 기원전 6~5세기에 제작된 요령식 동검 칼집에서 찾을 수 있다. 옻칠된 공예품들은 주로 국가와 왕실의 중대사에 사용되었다.

따라서 역대 왕조는 전담관부를 설치해 옻나무 재배지와 옻칠 장인(漆匠)의 활동을 관리했다. 통일신라는 공장부(工匠府)와 칠전(漆典)을, 고려는 공조(工曹)·공조서(供造署)·중상서(中尙署)·군기감(軍器監) 등의 관부를 두었다.

조선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칠전(漆田) 대장의 작성, 칠장·나전장이 배치되는 관부와 그 인원수까지를 더 상세히 규정하였다. 

 

 

나전칠기의 제작과 장인

 

나전(螺鈿)은 칠기에 자개를 붙여 문양을 표현하는 장식 기법이다. 그 제작 기반이 되는 평문(平文) · 입사(入絲)ㆍ감장(嵌裝) 등 기법은 이미 고대에 등장했다. 그러나 나전칠기가 활짝 꽃 피운 것은 고려시대이다. 1123년(인종 1) 고려를 방문한 송(宋)의 사신 서긍은 “(고려의) 나전 공예는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1272년(원종 13년)에는 원(元) 황후가 나전경함(螺鈿經函)을 요청하자 고려에서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이라는 기구를 설치한 일도 있다.

서울공예박물관은 국내외에 20여 점 현존하는 고려 나전칠기 중 진수(眞髓)로 평가받는 보물 제1975호 <나전경함>의 제작 비법을 밝히고자 이를 재현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 작업에는 오늘날 각 분야에서 손꼽히는 장인 네 명이 참여했다. 이 제작 과정을 통해 과거와 오늘날 장인들 간의 시대를 뛰어넘는 교감, ‘세밀가귀(細密可貴)’를 지향하는 치열한 장인의식, 현대 나전칠기 제작 기술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다.

 

 

나전칠기 제작공정 20단계

손대현 기증

 

나전칠기를 제작할 때 칠을 입히고 갈아내는 일은 수 십 단계로 세분화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기술과 시간을 요구한다. 이 가운데서 20단계를 소개한다.

 

 

 

 

금속으로 장식하다

 

금속선 장식은 고려시대 나전칠기에서 보이는 주요 특징 중 하나이다. 두께 0.3mm의 황동선(黃銅線)을 꼬아 한 겹으로 모란넝쿨무늬의 줄기를 표현하고, 두 겹으로 기물 테두리에 둘렀다. 동선을 장식할 때는 송곳으로 홈을 판 후 아교를 바르고 꼰 선을 홈에 박아 넣는다.

이번 재현 때는 개칠(改漆)로 인해 보이지 않던 금속선을 과학적 분석에 근거해 복원하였다.

 

 

다양한 시문 기법과 문양

 

재현된 나전경함에는 두께 0.02mm의 전복이 사용되고, 모란넝쿨무늬 · 귀갑 속 꽃무늬 · 마엽 무늬 · 구슬이음 무늬 등의 문양이 표현되었다. 모란넝쿨무늬와 구슬이음 무늬는 실톱으로 일일이 오려냈다.

1920년대에 실톱이 도입되기 전에는 가위나 칼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귀갑 속 꽃무늬와 마엽 무늬는 자개를 길고 가늘게 잘라 이를 끊어 붙여가며 최종 문양을 완성했다.

 

 

두석장, 금속을 녹이고 두들기다

 

두석(豆錫)은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黃銅)의 옛말이다. 두석장(豆錫匠)은 금속 합금과 장석 제작을 담당하는 장인이다. 나전경함 재현 작업에서는 옻칠과 나전 장식까지를 마친 함에 앞바탕, 들쇠, 경첩 등 장석을 제작해 경함에 부착하는 마지막 작업을 담당하였다.

 

 

나전 모란넝쿨무늬 경함 螺鈿牧丹唐草文經函

H 23.0cm, W 41.7cm, D 19.7cm, 

 

김의용, 손대현, 정명채, 박문열

2020년

 

현존하는 고려 나전경함 총 아홉 점 중 국내에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보물 제1975호를 오늘날의 네 명의 장인이 2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협업하여 재현한 것이다. 잣나무로 백골을 짜고, 옻칠을 한 후 나전과 꼰 황동선을 이용해 문양들을 표현하였다.

이들 문양을 만드는 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줄음질, 끊음질, 모조법 등의 기법이 모두 사용되었다.

 

나선 모란넝쿨 무늬 경함
보물 제 1975호 <나전경함>을 오늘날의 장인 4인이 협업해 재현한 것이다. 고려 나전경함은 불교경전을 담던 함으로 현재 전세계적으로 9점만 남아있다. 잣나무로 만든 함에 전복을 얇게 간 나전으로 모란꽃 등의 작은 문양들을 표현하고 옻칠을 했다.

 

 

 

 

 
연결의 방 : 영감이 머무는 자리
기록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이어줍니다. 또 누군가의 기록이 여러분의 이야기로 연결되기도 : 영감이 머무는 자리 합니다. 공예아카이브실에는 장인과 작가들이 얻은 다양한 영감의 흔적들이 담겨있습니다. 천천히 머물며 아카이브를 열람하고 여러분의 이야기를 풀어내보세요. 연결의 방은 아카이브실을 방문하는 이용자를 위한 열람 공간입니다. 운영시간 내 자유로이 머물다 가세요.

 

 

공예 아카이브실 Craft Archives

운영시간

화요일-금요일 10:00-18:00 

 

공예아카이브실은 서울공예박물관이 소장하는 소장품을 기반으로 입수한유·무형의 공예기록과 박물관의 전시, 연구, 교육 등의 활동에서 생산·수집한 박물관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공예아카이브실은 소장 기록물의 보존 및 관리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기록물의 실물 열람이 가능한 개방형 수장 공간입니다.

 

 

 

공예 아카이브실은 매 시간 정시에 오픈한다는 걸 알고 20여 분을 기다렸다.

젊은 여성도 이 사실을 알고 둘이 기다리다가 함께 들어갔다.

아카이브실은 작품 보존과 처리를 하는 수장고로써 매 시간 정시에 개방하여 출입자를 줄인다.

위 사진처럼 눈으로만 보거나 또는 눕혀지거나 세워진 서랍장을 열어 볼 수 있다.

이렇게 서랍장 속에 놓은 교과서는 이제 헌책방에서도 구하기 힘든 현대기의 교과서이다.

 

 

공예사(工藝史)의 흔적

 

서울공예박물관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공예와 관련된 역사적 사료를 수집하고 보존한다. 장인들에 의해 남겨졌지만 어딘가에 흩어져있던 개별의 사료들은 근대에 접어들면서 정부기관 및 연구자, 개별 수집가들에 의해 차츰 발견되고 연구되었다. 이로써 공예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수공품을 만드는 공정에서 점차 확장하고 발전하여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공예사료로 분류되는 자료에는 공예품을 만드는 데 실제로 사용된 도안, 재료 및 도구를 비롯해 공예와 관련된 연구 서적,

전시 도록, 정기간행물, 사진엽서, 교과서 등이 있다. 이러한 사료를 통해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공예가 그려온 다양한 궤적을 통시적으로 추적해 볼 수 있다.

 

전람회와 박람회 A-5-1~ A-6-3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는 근대 조선에서 열린 최초의 공모전으로 다양한 분야의 장인 작가의 등용문으로써 그들의 적극적인 출품으로 인해 공예가 예술의 한 장르로서 부흥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정부 주도의 예술진흥정책은 1936년 조선공예전람회로 이어졌는데 광복 이후 1949년 문교부에서 창설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또한 다양한 미술 분야의 장인 작가들이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는 기반이 된다.

서울공예박물관이 소장하는 조선미술전람회, 조선박람회, 조선공예전람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도록과 사진을 통해 장인·작가가 예술가로서 만든 공예 작품을 확인할 수 있으며, 수상작을 통해 정부에서 원하는 공예의 방향이 어떤 것이었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이곳은 책꽂이처럼 설치된 서랍장을 열었을 때 보이는 청자 투각 도안이다.

청자 등을 만들 때 즉흥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이런 도안을 먼저 만든 다음 작업으로 이어지게 된다.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의 도안을 보면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 게 된다.

 

 

 

 

전통 기법 및 문양을 적용한 서양식 가구와 집기 도안

 

나전장 민종태가 그린 도안과 목공예가 최승천, 김태순이 그린 서양식 가구와 집기 도안이다. 현대의 공예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전통 기법이나 문양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가구와 집기들을 제작하였다.

나전칠기는 흔히 전통 목가구나 소형 기물에 사용하는 기법으로 여겨지지만 현대의 서양식 가구와 집기들에도 적용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민종태가 남긴 도안에는 양복장(藏), 탁자, 텔레비전 받침장 등의 서양 가구 도안도 다수 발견되었으며, 삼성 초대 회장 이병철(李秉喆, 1910-1987)이 사무실에서 소장했다고 알려진 가구의 도안도 있다. 집기류를 그린 도안으로는 벼루, 합, 함 등의 도안도 있다.

최승천은 전통 꽃살무늬를 적용한 가구와 사무용품, 주방용품, 잡화 등을 제작했으며, 김태순은 칠기 기법을 적용하거나 나무의 재질과 결을 자연스럽게 살려 실용적인 가구와 여러 소형 기물들을 제작했다.

 

민종태 (閔鐘泰, 1915-1999)

나전장 수곡(谷) 민종태는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4호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바 있다. 1935년 나전칠기 명인이었던 전성규(全成圭, 1880~1940) 선생의 문하로 시작한 민종태는 이후 손대현, 최상훈, 김의용 등을 제자로 삼게 된다.

전시 출품보다 개인 작업에 몰두한 그는 한국나전공예협회 회장, 한국칠기공예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의 전통 옻칠기법이 유지·확산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최승천 (崔乘千, 1934-)

목공예가 송암(松岩) 최승천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를 졸업하고 한국디자인 포장센터 디자인개발실장을 거쳐 성신여대 및 홍익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대학 시절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수상한 이력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공예가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예술의 생활화와 생활 속 목공예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활동과 새와 나무에서 영감을 얻은 다양한 작품의 개인전을 통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김태순 (金泰順, 1941-)

목공예가 김태순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를 졸업하고 진명여고 교사를 거쳐 인하공업전문대학 공예디자인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6세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로 선정되어 주목받았으며, 교직에 머무는 동안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나무의 결, 즉 목리(木理)를 살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오래된 나전칠기 서랍장의 도안은 해지고 변색되었다.

이러한 도안도 중요한 문화재이기 때문에 보존처리 작업도 병행된다.

 

 

 

 

아카이블실을 나와 1층 로비에 전시된 현대의 작품이다.

 

고전을 벗어난 새로운 기법이 참신하게 느껴진다.

 

 

마블링 패턴의 카토나쥬 가구

혼합재료 Mixed

1. 약상자(어드벤트캘린더) 83.4x141.9x17cm

2. 젠가 Jenga|45x45x150cm,

3. 호기심의 방(작가의 도구),39.4x26 7x13.4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