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지역별 탐방/경기 인천

수원 용인의 광교산과 의왕 백운산 연계산행

by 즐풍 2024. 1. 24.

2024_05

 

 

 

2024. 1. 4. (목) 09:26~14:31, 5시간 5분 산행(24분 휴식 포함), 14.9km 이동

 

 

새해 첫날 산행지로 가까운 수원의 광교산과 의왕의 백운산을 연계 산행하기로 한다.

두 산을 묶어서 산행한다고 해도 산이 낮고 정상 간 거리가 가까워 힘들지 않은 산행이다.

직장 다닐 때 1~2년에 한두 번씩 다니던 교육원을 광교산이 품고 있어 안방처럼 드나들던 곳이다.

새로울 것도 없지만 새해를 맞아 산신령님께 문안드리는 셈으로 산을 오른다.

 

 

 

수원 광교산~의왕 백운산 연계 등산 코스

 

 

버스를 타고 경기대 정문에서 내려 후문으로 이동하여 광교산에 들어선다.

 

광교산 줄기를 중심으로 남서쪽은 수원, 남동쪽은 용인이 각각 1백만 시민을 거느린 지역의 진산이다.

산길은 고속도로인 듯 넓게 야자매트가 깔려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많은 시민의 사람을 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고도를 높이자 눈길이 시작되지만 빙판이 아니니 하산할 때까지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길 양쪽으로 625 전쟁으로 산화한 국군장병의 유해 발굴장소라는 표지석이 마련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호사는 이런 희생의 대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바위가 많은 척박한 곳에서 잘 자라는 소나무가 많다.

 

 

 

눈 덮인 겨울엔 이런 야생동물은 먹이활동이 어렵겠다.

벌레나 열매를 찾기 힘든데, 날씨까지 추워 긴긴 겨울을 어떻게 견딜까.

이럴 땐 쉬며 에너지 낭비라도 줄여야 한다.

 

형제봉에 오르면 한 고비를 넘긴 셈이다.

 

형제봉에서 300여 m 떨어진 수리봉을 잠깐 다녀오기로 한다.

 

수리봉은 툭 불거진 봉우리로 광교산 정상 방향으로 조망이 트였다.

 

맑겠단 일기예보를 믿고 왔으나 먹빛 하늘은 야속할 만큼 어두운 풍경이다.

 

 

 

수리봉에서 다시 형제봉으로 복귀한 다음 광교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 김준용장군 전승비가 있다는

이정표를 따라 들어선다.

 

 

김준룡 장군 전승지 및 비 (金俊龍將軍 戰勝地·碑)

• 지정번호 : 경기도기념물 제38호 • 조선시대 • 지정일 : 1977. 10. 13.

 

이 비는 병자호란(1636년 12월~1637년 1월) 때 광교산에서 청나라 군사를 물리쳤던 김준룡金俊龍(1586~1642) 장군의 전승지에 비 모양으로 암반에 글자를 새긴 것이다.

김준룡은 원주 김씨로 1609년(광해군 원년)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재임하던 중 병자호란(인조 14)이 일어나자 병사를 이끌고 광교산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적장수였던 양고리楊古利(청태조의 사위) 등을 사살하였다.

김준룡 장군은 1792년 정조대왕 때 '충양공忠襄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화성華城축성의 총리대신이었던 채제공이 석재를 구하기 위해 광교산에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김준룡 장군 전승 사실을 이곳에 새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검색한 내용도 이 비문과 별 차이는 없다. 다만 "좌우 하단에 '병자호란공제호남병(丙子胡亂公提湖南兵)'과 '근왕지차살청삼대장(覲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는 작은 글씨를 새겼다. 작은 글씨는 “병자호란 당시 공이 호남의 병사를 이끌고 임금을 뵈러 가는 길에 여기에서 청나라 대장 3명을 죽였다.”는 의미라는 글이 추가로 더 보인다.

 

 

김준용 장군에 대한 더 자세한 자료를 찾고 싶어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했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1637년) 1월 5일 을사 3번째 기사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들어와 광교산(光敎山)에 주둔하며 전투에 이기고 전진하는 상황을 치계(馳啓)하였다. 당시 남한 산성이 오래도록 포위되어 안팎이 막히고 단절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구원병의 소식이 잇따라 이르렀으므로 성 안에서 이를 믿고 안정을 되찾았다.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는 직선거리로 22km 서남쪽에 있는 광교산에서 김준룡 장군의 승전보를 듣고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1637) 1월 9일 기유 3번째 기사

"이의배(李義培)는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았고, 이시방(李時昉)은 김준룡(金俊龍)을 구원하지 않아 광교(光敎)에서 패배를 당하게 하였으니, 모두 분통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두 사람을 처벌하여 군율을 밝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령이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가 아뢰기를,

"오늘 승려를 모집해서 원수(元帥)에게 보내 먼저 이의배를 참(斬)하게 한 뒤 통솔할 장수를 대신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불과 4일 만에 김준룡 장군이 광교산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의배와 이시방이 김준룡을 돕지 않아 패했다며 이의배의 목을 베자는 처벌을 주장한다. 인조는 현지 상황이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지만 병조 판서는 단호하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1637) 2월 11일 신사 1번째 기사

양사가 합계하기를,

"군부(君父)가 외로운 성에 거의 두 달이 되도록 포위당하여 군사는 고단하고 양식은 적어 조석을 보전할 수 없었으므로 머리를 들고 발돋움하며 구원병이 이르기만을 날마다 기다렸지만 팔도의 군사를 거느린 신하로 한 사람도 성 밑에서 예봉을 꺾고 죽기를 다투는 이가 없었으니, 군신(君臣)의 분수와 의리가 땅을 쓴 듯 없어졌습니다.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 경상 감사 심연(沈演), 황해 감사 이배원(李培元), 북병사 이항(李沆), 남병사 서우신(徐佑申),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 황해 병사 이석달(李碩達),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 충청 병사 이의배(李義培)를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경징·이민구·장신 등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신경진·강진흔 등은 그들이 지킨 곳을 김경징에게 물은 뒤에 처치하라. 민성휘 등은 용서할 만한 도리가 없지 않으니 우선 죄를 논하지 말라. 삼남(三南)의 병사는 이미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하였다.

 

한 달 만에 분위기가 변해 김준룡 장군을 포함해 성밖에 있던 군사들을 잡아다 단죄하자고 한다.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문신들이 병자호란을 촉발하고도 반성은 없이 저간의 사정은 알지도 못한 채 벌을 주자는 것이다. 마지막 글에 "삼남(三南)의 병사는 이미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는 걸로 보아 전라 병사 김준룡도 죄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1637) 3월 11일 경술 4번째 기사

여러 도의 병사도 마찬가지로 머뭇거려 군율을 잃은 잘못은 조금도 차이가 없는데, 최선을 다하여 싸웠으나 패전한 김준룡(金俊龍)은 이미 먼 곳으로 유배되었으니,.....

 

김준룡 장군은 이후 어느 전투에서 패하여 앞서 일군 전공에도 불구하고 유배되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건 신하들이 특정 장군을 모함해도 "그가 그럴 리가 없다"라며 믿었기에 자기를 믿어주는 임금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렸다. 그렇기에 사마천은 『사기』 에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여인은 자기를 기쁘게 해 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고 했는데, 당시 김준룡 장군이 마음이 어땠을까.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1637) 3월 26일 을축 2번째 기사

비국이 아뢰기를,

"김준룡(金俊龍)이 전라 병사로서 비록 패군 한 죄는 있으나 광교산(光敎山)의 싸움에서 한 차례 대승리를 하였는데 잡아다가 국문하고 유배 보내는 것은 억울할 듯합니다. 연신이 죄를 용서해 주라고 청한 것은 실로 공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상이 사면하였다.

 

신하들이 김준룡 장군은 광교산 전투에서 대승을 했는데도 유배를 보냈다는 자책 끝에 임금에게 사면을 요청하자 받아들였다.

 

 

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1791) 1월 22일 정유 4번째 기사

사직(司直) 신기경(愼基慶)이 상소하여 당면한 문제 12조 항을 올렸다. 첫째는...., 넷째는 병사(兵使) 김준룡(金俊龍)은 오랑캐를 섬멸하여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 주어 장려하자는 일이고,....

 

정조의 충신이던 채제공이 수원화성 축성에 필요한 석재를 구하기 위해 광교산에 들렀을 때 주민들에게 병자호란 때 김준룡 장군의 공적을 듣고 역사를 참고하여 공론을 거친 후 사직 신기경이 상을 내릴 것을 청했다.

 

정조실록 35권, 정조 16년(1791) 9월 29일 을축 3번째 기사 1792년

증 찬성 김준룡(金俊龍)에게는 충양(忠襄)의 시호를 내렸다.

 

김준룡 장군은 광교산 대승 이후 155년 만에 충양공의 시호를 받으며 명예를 되찾았다. 채제공은 김준룡 장군이 시호를 받은 이후 이곳에 충양공 김준룡 전승비를 세우며 위로에 나섰다. 명군(名君)에 명신(名臣)이다.

 

 

김준룡 장군 전승비에서 바로 바위를 치고 오르며 이동거리를 줄인다.

 

종루봉과 망해정(望海亭)

 

신라 대학자 최치원(857~?)은 12살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많은 공부를 하고 29세에 귀국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정해진 벼슬인 말단 6두품 밖에 할 수 없었다. 관직을 버리고 전국 곳곳을 돌던 중 광교산 문암골에 머물며, 종과 종루가 있던 이곳 종대봉에서 서해를 바라보며 종은 있지만 울릴 사람이 없으니 종과 자신의 신세가 같다며 한탄하며 다시 당나라로 돌아갈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국에서 저술과 후학에 힘쓰며 나라를 깨우는 것, 이것이 선비의 길이라 여겨 그 길을 선택했다고 전해진다.

                                                                                                                        (안내문)

잠시 후 만난 망해루

 

드디어 광교산 정상에 올랐다.

새해를 맞은 첫 산행으로 오른 광교산은 평일이라 산객도 별로 없어 고요하다.

2023년 우리나라 무역수지는 세계 200위인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라 경제만큼 우중충한 날씨지만, 올해는 경제가 좀 피어나길 기대한다.

 

광교산의 주봉인 시루봉은 용인시 땅이라고 한다.

백운산으로 가는 길목엔 억새밭이 있으나 계절이 지나 이젠 다 스러져 보이지도 않는다.

안내문을 보면 억새와 참억새, 무늬억새를 구획을 정해 심었다는 게 보인다.

 

 

 

 

 

백운산 정상의 통신탑을 지나며 드디어 백운산에 마련한 정자를 만난다.

 

이곳은 의왕시 경계에 있는 백운산 표지석이다.

잠깐 동안의 산행으로 수원과 용인, 의왕의 땅을 밟은 셈이다.

올 한 해도 건강과 행운이 계속되기를 소망해 본다.

 

새해 첫 산행치고는 날씨가 참 고약하다.

 

광교산에서 수원 파장동 방면으로 하산한다.

광교산이나 백운산은 숯이 우거져 조망처가 별로 없다.

이렇게 숲이 우거진 곳에 해돋이광장이라는 팻말이 붙었는데, 이게 뭐람...

 

 

100m를 더 보태 15km를 걸었다면 제법 장거리 산행이다.

어느 산이나 다 오르내림은 있으나 대체로 평이한 산이라 점심 먹을 때를 제외하면 계속 걸었다.

이틀 전에 박물관 세 군데를 들렸으나 산행기부터 올린다.

올해도 건강하고 좋은 일만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