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19. (화) 오전에 관람
지난번에 서울 한양도성을 순성 할 때 「윤동주 문학관」은 월요일이라 개방하지 않았다.
그동안 인왕산을 여러 번 다녀갔어도 윤동주 문학관을 들리기는 처음이다.
윤동주 시인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시인도 없을 것이다.
그의 '서시'나 '별 헤는 밤'은 국민 대부분이 외우거나 머리에 뱅뱅 돌 것이다.
당시의 시인으로는 김소월이나 백석도 좋아하는 시인 중 하나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백석은 우리나라 시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중국 길림성 출신이고, 김소월과 백석은 북한 출신이다.
백석은 6년 선배인 김소월을 동경하며 시인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세 명이 시인이 모두 북쪽 출신이란 게 참 아이러니하다.
백석은 전쟁이 끝난 후 북한 정부에 종사했다는 이유로 남한에서 해금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남북의 이념이 문화·예술까지 편을 가르고 이 정부에서 그 발작은 더욱 심화되는 꼴불견을 보인다.
종로구 문인협회에서는 윤동주 문학관에 이어 「김소월 문학관」 건립을 추진한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윤동주 문학관
영혼의 가압장, 윤동주문학관
윤동주 문학관이 자리 잡은 이곳은 1974년부터 청운동에 위치한 수도 가압장이었다.
윤동주 문학관을 세우기 위해 쓰임을 다하고 방치되어 있던 청운 수도가압장을 활용하기로 했고,
단순히 낡은 건물을 고치는 리모델링이 아닌 새로운 가치를 더하는 재생 작업이 이루어졌다.
감춰져 있던 2개의 물탱크는 '우물'이라는 콘셉트로 설계가 되었다.
하나의 물탱크는 지붕을 걷어내 중정으로 삼아 '열린 우물'이 되고,
다른 하나는 한 줄기 빛만 들어오는 원형 그대로의 공간을 보존하여 '닫힌 우물'이 되었다.
그래서 제2전시실과 제3전시실벽면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새겨진 물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1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우물 목판을 보면 우리는 '자화상'이라는 시를 떠올리게 된다.
우물을 들여다보며 자기 내면과 대화한 시인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부끄러움의 시인 윤동주가 자기 성찰을 했던 매개가 우물이었던 것처럼,
물탱크였던 이 공간은 다시 '우물'로 태어났다.
수도가압장은 고지대로 올라오면서 약해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느슨함을 용납지 않고 다시금 거세어지는 물살, 일평생 순수하기를 바랐던 시인 윤동주,
'영혼의 가압장'이라는 윤동주문학관의 정체성을 건물 곳곳에서 느껴보시기를 바란다. (안내문)
「윤동주 문학관」을 방문했을 때 제법 많은 사람이 해설사 님의 안내를 듣고 계신다.
종로, 청운수도가압장, 그리고 시인 윤동주 시인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문과 재학시절,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1909-1988)의
집에서 문우 정병욱과 함께 하숙생활을 했다.
당시 시인은 종종 이곳 인왕산에 올라 시정(詩情)을 다듬곤 했다.
<별헤는 밤>, <자화상>, 그리고 〈또 다른 고향>...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그의 대표작들이 바로 이 시기에 써졌다.
그런 인연으로 종로구는 2012년,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크를 개조해 윤동주문학관을 만들었다.
가압장은 느려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세상사에 지쳐 타협하면서 비겁해지는 우리 영혼에 윤동주의 시는 아름다운 자극을 준다.
그리하여 영혼의 물길을 정비해 새롭게 흐르도록 만든다.
윤동주문학관은 우리 영혼의 가압장이다.
* 본 문학관의 전시품은 윤동주 시인 유가족들의 자료협조와 감수를 통하여 마련되었다. (안내문)
전시된 책은 2012년 개관 당시 수집한 그의 시간 들어간 서적들이다.
그에 대한 책은 여전히 계속 새롭게 발간되고 있으니 지금은 종류도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을 것이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시절에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후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
그의 시재를 펼쳐보기도 전에 악랄한 왜놈들에 의해 이렇게 스러져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천수를 누리셨다면 우리에게 남겼을 수많은 시가 피어나지도 못한 것이다.
청운수도가압장이었던 이 건물은 그가 갇혔을 감옥을 보는 듯 마음이 무겁게 느껴진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어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옥사하셨다.
일본과 언제까지나 척을 두고 살 수 없겠지만,
이 정부는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오염수의 해양 방류를 시원하게 용인해줬다.
우리 국민들이 그에 따른 오염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수산물을 못 먹겠다고 하니 방류하기도 전에 국민의짐당
국회의원들은 수산물 시장에 가서 먹방을 하는 추태를 보였다.
반면 중국은 일본에게 수산물에 문제가 없으면 너네가 먹으라며 수산물 수입을 전면 거부했다.
같은 연안을 사이에 두고도 우리와 중국은 이렇게 처신이 다르다.
이번만큼은 중국을 응원한다.
제3전시실은 윤동주의 일생에 대한 작은 영상이 상영된다.
시간이 되면 전부 들어야 하겠지만, 오늘은 갈 길이 머니 잠깐 둘러만 본다.
3 전시실은 천장까지 다 닫혔고, 작은 창을 통해 겨우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온다.
윤동주 시인의 아린 마음을 이곳에서 함께 느낄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의 원고
윤동주 시인에게 징역형을 때린 판결문이다.
우물로 쓰이던 목재
시인 윤동주
1917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 출생
1925 명동소학교 입학
1936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항의 표시로 숭실중학교를 자퇴
용정 광명중학교 중학부 4학년 편입
1938 법대, 의대를 원하는 부친과의 대립 끝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연희전문 기숙사 생활 시작
1940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정병욱과 교류. 정병욱은 훗날 윤동주 시인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1941 정병욱과 함께 종로구 누상동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시작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함」 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1942 부친의 권유로 일본유학을 결심하고 히라누마(平沼)로 창씨 고국에서의 마지막 작품 참회를 씀
4월 릿코대학 문학부 영문과 입학
10월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학과에 전입학
1943 여름방학 중인 7월 10일 송몽규가 교토 시모가모경찰서에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
나흘 후, 귀향길에 오르려 차표를 사놓고 짐까지 부쳐놓은 윤동주도 같은 혐의로 검거
1944 윤동주와 송몽규는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독립운동) 죄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송
1945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교회 묘지에 윤동주 유해 안장
3월 7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송몽규 운명
1948 유고 31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좀」 란 제목으로 정음사에서 시집 출간
「윤동주 문학관」을 나서니 한옥과 골목길, 문화예술이 만나는 세종마을이 소개된 안내판이 보인다.
세종마을은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준수방, 인달방, 순화방, 웃대,
우대, 상대 마을(上村)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은 조선시대 중인과 일반 서민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세종대왕의 생가터, 백사 이항복의 집터가 있다.
또한 옥계시사(玉溪詩社, 백일장)가 열리고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추사 김정희의 명필이 탄생한
마을이기도 하다.
근현대에는 이중섭, 윤동주, 이상, 박노수 등이 거주하며 문화예술의 혼이 이어졌고,
현재 600여 채의 한옥과 골목, 전통시장, 소규모 갤러리, 공방 등이 어우러져 문화와 삶이 깃든 마을이다.
2010년부터 주민들은 세종대왕의 얼이 살아 있는 문화예술마을로 가꾸고자 하는 열망을 담아 세종마을이라
이름 지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Sejong Village is located in the area between the eastern part of Inwangsan Mountain and Gyeongbokgung Palace.
During the Joseon Period Period it was known by various names including Junsubang, Indalbang, Sunhwabang,
Utdae, Udae and Sangdae village, and was largely populated by jungin(middle people) and commoners.
The village is home to such historic sites as the Birthplace Site of King Sejong and the Site of Yi Hangbok's House.
It is also the place where a famous writing contest called Okye Sisa was held, and where Inwang jesaekdo(Scene of Inwangsan Mountain after Rain) was produced by the renowned painter Jeong Seon (pen - name:Gyeomjae).
A house in which the noted calligrapher Kim Jeong-hui (pen-name:Chusa) once lived can also be found in the village. During modern times, many painters and poets including Yi jung-seop, Yun Dong- ju,
Yi sang and Park No-su resided in this village, maintaining the area's artistic spirit.
Currently, the village is filled with nearly 600 Hank(Korean traditional houses), a traditional market, small galleries,
and craft workshops.
In 2010, the local residents named the area Sejong Village with the aspiration of inheriting the spirit of King Sejong the Great and developing the area into a cultural art village.
중국인을 위해 그들의 문자인 간체자로 안내했는데,
아이패드에서는 사진을 단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간체자로 구현하는 마법을 부렸다.
世宗村位于仁王山东面及景福宫之间, 在朝鲜时代被称为俊秀坊, 仁达坊, 顺化坊或上村。
该村庄是朝鲜时代两个身份阶层, 即中人和常民赖以生存的小区。
世宗大王故居遗迹白沙李恒福故居遗址就在这个地方。
不仅如此, 这里是玉鸡诗社(赛诗场)举行地点, 也是画家谦斋郑的(仁王霁色图)和秋史金正喜的名笔作品的诞生地。
近代以来, 画家李仲變, 诗人尹东柱诗人李箱, 画家朴鲁寿文化艺术家居住于此, 发展了文化艺术的精髓。
现有600多户的韩屋及胡同, 传统市场, 小规模画廊, 艺术工坊等齐聚于此, 文化和生活自然地融为一体。
从2010年起, 居民们都一心渴望使该村庄发展为弘扬世宗大王的伟大精神精髓的文化艺术村庄, 开始將该村庄称为世宗
村, 并沿用至今。
이곳은 세종대왕 생가터라고 조그만 인연의 끈을 놓치지 않고 「세종마을」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1398년까지 재위했으고, 정종이 1400년까지 잠시 왕위를 지켰으니
이방원이 왕위를 이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며 1397년에 세종이신 이도를 이 마을에서 출산했다.
세종대왕께서 태어나신 곳이니 터가 좋은 곳이다.
윤동주 문학관에 이어 세종마을은 덤으로 올리며, 간단하게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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