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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충청도·대전·세종

충주 관광의 아이콘인 중앙탑(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과 사적공원

by 즐풍 2023. 2. 19.

2023_011

 

 

 

2023.2.3. (금) 오전에 탐방

 

 

1년 전인 '22년 2월에 장미산의 장미산성을 둘러보고 난 후 중앙탑을 찾았다.

그때는 제법 날씨가 좋아 중앙탑을 근사하게 찍을 수 있었는데, 오늘 날씨는 별로다.

사진보다 더 흐린 날씨지만 사진이 너무 흐려 한참 밝게 만들어야 했다.

여행하는 날이 모두 좋을 수는 없다.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추켜올려져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있어 일제 당시 보수하면서 일부 변형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출처_문화재청)

 

중앙탑의 명칭

 

탑이 설치되는 곳의 대부분은 사찰이다.

어느 사찰이든 탑이 한두 개는 있기 마련이며 석재로 쌓기 힘들면 벽돌로 만든 모전탑,

심지어 바위로 대강 얹는 돌탑까지 있다.

중앙탑은 1917년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해체되어 복원되었다고 한다.

그전까지 상태가 불균형하여 복원을 빌미로 해체과정에서 수습한 사리나 여러 보물의 처리

과정은 알려지지 않는다.

이후 이곳은 사적공원으로 정비되며 형질이 많이 변해 주변에 사찰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찰의 존재가 있었다면 건물이 없어졌다고 해도 초석은 남았을 텐데, 찾을 길이 없다.

 

 

 

 

 

중앙탑은 이미 2년 전에 봤으므로 대강 훑어보고 사적공원을 둘러본다.

 

 

원(願), 1999년 이광기

 

온유한 사랑, 1999 황영숙

 

바다와 하늘 1999 김석우 작

 

풀밭에 누워 1999 김영원 작

 

얼음이 언 충주호

 

신전 1999 유영교 작

 

 

 

대위 1999 류종민

 

명상 1999 김태덕 작

 

파문

 

금수강산·3  1999 장윤우 작 

 

금수의 禽은 날짐승으로 왼쪽에 새를 만들었고, 獸는 들짐승으로 사슴이 있다.

강은 원추형의 층을 만들어 강물의 물결을 형상화했고,

산은 세 개의 원추형으로 山을 의미한다.

하여 다섯 개의 조형물로 금수강산을 표현한 참신한 발상이다.

 

네가 날짐승을 대표하는구나.

 

호반의 대화 1999 유영준

 

민들레 1999 전종무

 

중앙탑과 사적공원을 간단하게 끝낸다.

이곳에서 중앙탑과 관련된 사찰은 흔적이나 전설로도 남아있지 않아 미궁에 빠졌다.

역사가들이 밝혀낼 숙제인데, 언젠가 풀리는 날이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