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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충청도·대전·세종

백제의 미소가 아름다운 서산 마애여래삼존불상

by 즐풍 2023. 2. 4.

2023_05

 

 

2023.1.22. (일)  11:50~12:20까지 30분 탐방, 흐림

 

 

평생 가족을 위해 일만 하시던 형님이 은퇴한 이후 가보고 싶은 곳이 많다.

전에 친구분들과 보령해저터널을 다녀오실 때 태안 해양유물전시관에 들렸으나 휴일이라 발걸음을 돌렸단다.

하여 오늘 유물전시관에 함께 갈 때 길목에 있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먼저 보기로 한다.

이곳은 형님도 전에 너무 감명 깊게 본 곳이라 다음에도 한 번 가려고 했으나 위치를 몰라 못 갔다고 한다.

 

마애여래삼존상 관리사무실(☎ 041-660-2538)에 전화하여 언제 가야 햇빛이 가장 잘 드는지 문의했다.

사무실에서는 설 전후 시점에서는 아침 10:40~11:30에 삼존불상에 햇빛이 다 드니 이때 방문하는 걸 추천한다.

막상 방문할 땐 날이 흐려  햇빛과 상관없는 날씨가 돼 다소 아쉬웠다.

여행할 땐 날씨가 좋기를 바라나 날씨는 제 맘대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니 인력으로 되지 않는다.

 

 

 

□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여 형성되었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다.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 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천의를 걸치지 않은 상체는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여래삼존상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출처_한국의 사지 현황조사 보고서 上, 2014년 발간)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다.

계곡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마애삼존상 관리사무실이 나온다.

삼존상 방향으로 불이문이 있고 좀 더 위쪽엔 삼신각까지 있으며 예전엔 고란사란 사찰이 있었다.

 이젠 관계 기관에서 사찰을 매입하여 관리사무실로 쓰고 있다.

 

 

 

 

마애불은 1965년 목조 보호각을 설치한 상태로 보존되어 오다가 2007년에 보호각을 철거하고, 

2009년에는 암반의 균열부를 중심으로 한 보존처리공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마애불의 존재는 1959년에 알려지게 되었다. 

황수영 박사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이곳은 주민들에 의하여 ‘고란사’로 전칭 되어 온 곳으로, 

암반 아래 계곡 주변에는 ‘강당터’로 알려진 건물지가 있으며 그곳으로 통하던 석축의 교각이 있었다고 한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국보 제84호로, A구역 암반에 남동향(S-35°-E)으로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1959년 발견되어 황수영 박사에 의하여 최초로 보고되었다.
본존은 여래입상으로, 두광과 대좌를 포함한 전체 높이 280㎝, 불신 높이 205㎝, 두부 높이 28㎝, 어깨너비 60㎝이다. 

머리는 소발이며 육계가 높게 솟아 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두 눈을 크게 뜨고 있고,

비익은 양 옆으로 약간 벌어져 있으며 양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미소 짓는 모습이다. 

이마 중앙에는 백회공이 있으며, 양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지 않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착의법은 통견으로, 옷깃이 복부에서 크게 ‘U’ 자형을 이루며 드리워져 있고, 

하반신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러운 ‘U’ 자형을 그리며 내려간다. 

열린 가슴에는 ‘y’ 자형의 승기지와 군의 띠매듭이 드러나 있다. 

수인은 시무외·여원인으로, 왼손의 약지와 소지를 구부린 백제 불상 특유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발은 정면을 향하여 발가락만이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너비 90㎝, 높이 16㎝이며 단판단엽의 복련이다.
광배는 보주형의 두광으로 직경은 117.5㎝이다. 

중앙의 단판단엽 연화문 두원광을 중심으로 화염문이 감싸고 있으며, 

두원광 테두리에 면하여 좌, 우, 중앙에 각각 1구씩의 화불이 3구 새겨져 있다.

                                                                        (출처_한국의 사지 현황조사 보고서 上, 2014년 발간)

 

 

우협시는 보살입상으로, 두광과 대좌를 포함한 전체 높이 171㎝, 

보살상 높이 127.5㎝, 두부 높이 15㎝, 어깨너비 28.5㎝이다. 

머리에는 중앙에 술장식이 달린 높은 보관을 쓰고 있으며, 양 어깨에 관대와 보발이 드리워져 있다. 

둥근 얼굴에 눈은 가늘게 떴으며 작은 입은 다물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모습이다. 

목에는 끝이 약간 뾰족한 목걸이를 착용하였으며, 팔에 걸친 천의는 복부에서 ‘U’ 자형으로 걸쳐져 있다. 

상반신은 나신이며 하반신에는 대좌까지 늘어지는 요포를 걸치고 있는데, 

복부에 요포자락 윗부분을 되접어 입은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보살상은 양손을 복부에 모아 보주를 쥐고 있는데, 

이는 삼국 중 백제계 보살상에서만 보이는 특징으로 주목된다. 

양 발은 본존과 마찬가지로 정면을 향하였으며 발가락만 드러난 상태이다. 

광배는 보주형으로 중앙에 단판단엽의 연화문 두원광을 배치하고 주변은 문양이 없는 원형 테두리를 둘렀으며, 

보주형으로 뾰족하게 치솟은 외연은 화염문 등의 문양 없이 단순하게 표현하였다. 

대좌는 본존과 동일한 단판단엽의 복련으로, 간엽이 표현되어 있다.

                                                                        (출처_한국의 사지 현황조사 보고서 上, 2014년 발간)

 

 

 

좌협시는 반가사유상으로, 전체 높이 166㎝이다. 

우측 팔과 무릎 일부, 왼팔 일부가 파손유실되어 있는 등삼존상 중 훼손도가 가장 높다. 

의자에 걸터앉아 오른쪽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얹은 반가의 자세를 취하고 

오른팔을 오른쪽 무릎 위에 괴어 오른손의 중지와 검지를 뺨에 살짝 대고 있다. 

머리에는 삼산관 형태의 보관을 착용하였는데, 우협시보살상의 것보다 높이가 낮으며 장식 문양도 다르다. 

반가사유상의 보관 중앙에는 6 엽의 화문이 배치되어 있다. 

양 어깨로는 관대와 보발이 드리워져 있다. 

반가사유상의 얼굴은 우협시보살상과 유사하게 둥근 얼굴에 가는 눈이 표현되어 있으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목에는 끝이 뾰족한 형태의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다. 

상반신은 나신으로 천의는 착용하고 있지 않으며, 하반신에는 긴 요포를 착용하였다. 

요포의 옷자락은 의자를 모두 덮은 형태로, 옷주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발은 발가락만 드러나 있으며, 연화족좌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하부에는 단판단엽 복련의 연화대좌가 표현되어 있으나 암반 경계부에 새겨져 있어 우

협시보살상의 것에 비하여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으며 일부는 박리되어 있다. 

두광은 우협시보살상의 것과 동일한 보주형 두광이다.

                                                                       (출처_한국의 사지 현황조사 보고서 上, 2014년 발간)

 

 

 


이 삼존상은 중앙의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우측에 봉보주보살입상, 

좌측에 반가사유상을 협시로 둔 독특한도상을 취하고 있으며, 

그 유례가 드문 백제의 마애불일 뿐만 아니라 작품성 또한 뛰어나 세간의 주목을 받는 작품이다. 

 

삼존상에 대해서는 도상 및 양식 등에 관한 다각적인 방향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본 상은 태안 동문리 마애여래삼존상,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과 함께 

백제 불교미술의 양식을 파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본 상은 특히 중국 6세기 北齊 및 남조 梁의 영향이 엿보이고 있어 

6세기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태안과 예산의 상보다는 후대에 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본 상의 존명은 학자에 따라 본존 석가여래 혹은 아미타여래, 우협시 관음보살 혹은 제화갈라보살, 

좌협시 미륵 등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현재는 본존 아미타여래, 우협시 관음보살, 좌협시 미륵보살이라는 견해가 유력시되고 있다.


한편, B구역에서 A구역으로 향하는 등산로 동쪽의 암반 위에는 석등재 1매가 있다. 

전언에 의하면 이 석등재는 보원사지에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원래 이 위치에는 석등재 이외에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1구가 함께 놓여 있었으나, 2005년 3월 도난당했다고 한다.

석등재는 하대석으로 전체 높이는 38㎝이다.

지대석은 70×68×20㎝의 크기로 방형이다.

상부의 하대석은 단판단엽의 연판문 16 엽이 배치되어 있는 복련으로 팔각형이며 직경은 66㎝이다.

상면 중앙에는 직경 13㎝, 깊이 7㎝의 간주공이 마련되어 있으며,

간주공 외연은 원형의 단을 2단으로 얕게 마련하였다.

팔각형 한 면의 폭은 29㎝로, 각 면에 능화문 형태의 안상이 새겨져 있다. 석등재는 문양의 형태 등으로 보아

고려중기 무렵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_한국의 사지 현황조사 보고서 上, 2014년 발간)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옆쪽에서 바라보면 아래쪽이 깊이 파인 바위벽에 부처를 새겼고 가운데 본존불상의 코 높이가 가장 높은데

두께가 20cm는 넘어 보이니 그 정도까지 바위를 깎아 내려가면서 부처를 드러내는 데에

상당한 공력과 예술적인 표현력이 필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은 이례적인 경우로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도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을 볼 때 6세기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즉 백제의 예술이 절정을 이루던 사비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충청인의 넉넉한 성품을 고스란히 간직한

불교미술의 정수로 손꼽힌다.


또한 이곳은 백제시대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여래삼존상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왜 백제인들은 외진 산 바위벽에 그토록 어렵게 부처를 새겨 놓았을까?
백제는 초기에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고구려와 사이가 좋은 시절에는 육로를 통해 중국과 교역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수왕의 남하에 따라 남쪽으로 천도를 하게 되고 그 후 신라가 강성해져 한강유역을 빼앗아 가 버린 뒤에는

중국으로 가는 길을 바다에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당진, 태안 지역은 중국의 산둥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이어서 이곳이 교역항이 되었는데,

여기에서부터 웅진(공주)이나 사비(부여)로 가는 길이 태안에서 서산을 거쳐 예산의 가야산으로 통하는 길이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그러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볼 때 백제인들은 교역의 길목에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안녕과 평안을 빌 수 있도록 큰 절을 세우고

불상을 새긴 것이 분명하다.

그런 까닭에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의 미소가 넉넉하고 따뜻한 것이다.

                                                                                                (출처_충청권 문화유산과 그 삶의 이야기)

 

 

 

 

 

삼존불인 이 불상은 가운데에 본존인 여래가, 오른쪽에는 보살이 서 있고,

왼쪽에는 한 다리를 다른 쪽에 포개 앉은 반가사유상이 있는 특이한 배치이다.

그중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역시 가운데 본존부처이다. 
본존부처는 둥근 얼굴에 눈을 한껏 크게 뜨고 두툼한 입술로 벙글벙글 웃고 있다.

전체 조각 가운데 본존의 얼굴이 가장 두드러져서 높은 돋을새김을 이루고 있다.

양 어깨를 가린 법의 안쪽에 속옷 매듭 자락이 매우 선명하여 본존 조각의 섬세함과 두드러짐을 느끼게 한다.
연꽃잎을 두껍게 새긴 대좌(臺座) 위에 늠름히 서 있는 여래입상의 얼굴은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으로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 광배 중심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그 둘레에는 불꽃 줄기가 은근하게 타오르는 불꽃무늬가 있어 

넉넉한 미소와 함께 부처의 넓은 품을 느끼게 하는 불상이다.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다. 키는 작은 편인데,

중앙의 여래입상처럼 연꽃대좌에 서 있고,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약합 같은 것을 쥐고 있다.

얼굴은 가운데 본존처럼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천진한 미소를 풍기고 있다.

천의를 걸치지 않은 상체는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사유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고개를 약간 외로 틀어 귀엽게 웃는 모습,
어딘지 짧은 듯한 4등신의 팔다리 비례와 통통하게 오른 볼 등이 네다섯 살 한창 귀여운 어린아이를 떠올리게 한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으며,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생각하는(思惟) 자세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반가사유상은 7세기 초 무렵 삼국에 공통했던 신앙 경험을 보여 주는 상으로 

이 마애불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삼존불이 보여주는 백제의 미소는 넉넉하고 따뜻하다.

뿐만 아니라 신비롭다.

불상의 표정이 햇빛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출처_충청권 문화유산과 그 삶의 이야기)

 

 

마애삼존불상을 보기 위해 오르내릴 때 삼존불상이 있는 바위 전체가 보인다.

우측 상단의 바위에 생긴 균열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계측기가 설치된 게

붉은 선으로 연결되어 정보가 수집되고 있나 보다.

 

우측 하단 바위 오른쪽에 마애여래삼존상이 조각되어 있다.

한때 이 삼존상을 보호할 목적에 보호각을 설치했으나 오히려 균열이 생기는 등 손상을 초래했다.

그대 보호각을 설치했던 사각 홈이 몇 개 보인다.

 

 

위에 사진을 한 번 더 가져왔다.

본존불의 두상을 클로우즈 업한 사진을 보면 잔잔한 균열이 많이 생겼다.

두상 위의 광배엔 세로로 흰색으로 균열을 메꾼 것이 보인다.

보호각을 세우며 습기가 제대로 배출되지 않아 이런 균열이 생기자 42년 만에 보호각을 철거한 것이다.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찾아가는 길이 멀어서 그렇지 이 삼존상을 보면 예술성에 놀란다.

천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거의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모습을 보며 경외심에 빠진다.

태초에 생긴 바위는 오랜 세월에 검게 침착되었는 데 반해 불상은 어제 깎은 듯 선명한 모습이다.

여러 전문가의 평가를 대신 옮기는 것으로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의 포스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