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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충청도·대전·세종

역사를 복원한 석비가 보존된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by 즐풍 2023. 2. 16.

2023_008

 

 

 

2023.2.3. (금)  오전에 탐방

 

 

 

평택으로 이사한 후 경기 이남 지역으로 여행은 훨씬 자유로워졌다.

전에 살던 일산에서 평택까지 두 시간 거리를 줄였으니, 평택에서 충청도 지역은 대략 한 시간 거리 안에 있다.

그렇다고 한들 혼자 차를 끌고 다닌다는 건 효용에 비해 경비가 크게 느껴진다.

마침 오늘은 목우가 쉬는 날이라 평소 가고 싶던 충주 수주팔봉 가는 길에 몇 군데 같이 들려보기로 한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동선을 줄이기 위해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이다.  

1979년 충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고구려비가 발견되면서 우리나라 역사의 한 부분인 고구려 역사의 흐름이 바뀌게 된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지역의 영토 경계나 고구려와 신라, 백제 간의 역학관계를 알 수 있다.

세월의 흔적으로 많은 글자가 훼손되었지만 남아있는 글자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새로운 역사를 복원하고 있다.

 

 

 

충주 고구려비 (忠州 高句麗碑)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출처_문화재청)

 

 

고구려비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이곳에 전시관을 설치하며 고구려비는 거친 자연을 벗어나 전시관 안에 있게 된다.

 

 

 

 

 

 

충주 고구려비를 품은 고구려의 최전선 마을

 

입석마을의 역사는 충주 고구려비와 함께한 역사였다.

예로부터 이름 없는 비석이 서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입석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오랜 세월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입석마을은 1972년 마을 전체를 휩쓴 대홍수 때 충주 고구려비와 함께 슬픔을 경험하였으며,

국보 제205 호로 지정 되었을 때도 기쁨을 같이 했다.

입석마을 주변에는 용전리, 봉항리, 천룡산, 울긍산, 태자뜰 등 고대의 왕실이나 최고의 지배층을 연상할 수 있는

지명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충주 고구려비가 세워진 고구려의 최전선이자 고구려 제2의 도성이었던 국원성의 명맥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1979년 불현듯 1500년의 잠에서 깨어나 고구려의 비밀을 풀어준 입석마을은 오늘도 충주 고구려비와 함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며 건강한 삶터를 일궈가고 있다.

                                                                                   (안내문)

 

 

 

 

 

 

 

 

 

 

 

삼족오를 그린 도자기

 

 

 

 

 

기마병이 말에 탄 위용

 

 

 

 

 

 

 

 

 

장군총 모형

 

 

 

 

 

 

 

 

 

 

 

충주 고구려비 발견 경위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는 1979년 2월 24일 충주의 향토사연구모임인 예성동호회에 의해 발견되었다.
당시 예성동호회장이었던 충주검찰청 유창종 검사가 의정부 검찰지청으로 전보되어 송별답사를 하던 중,
중앙탑 인근 용전리 입석마을 어귀에 있는 입석立石을 조사하게 되었다.
입석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돌기둥 형태의 입석은 전체적으로 이끼와 청태 등이 두껍게 덮여 있었지만 

비문의 일부분에서 글자(國土, 土內, 安城)가 확인되어 단순한 입석이 아니라 석비石碑였음을 알게 되었다. 

두 달 뒤인 4월 7일 단국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단이 비면碑面의 탁본과 해독을 하였고,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를 읽어내면서 시골마을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던 돌덩어리가 

국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고구려비로 자리 잡게 되었다.

                                                                                                  (출처_한국의 석비-고대(국보·보물))

 

 

 

보존상태

충주 고구려비는 발견 당시 입석마을 초입의 경계석으로 서 있었다. 

지난 천오백여 년의 시간 동안 야외에 노출되어 전체적으로 표면 마모와 미생물 피해가 심해 

글자의 육안 판독이 어려운 상태였다. 

1981년 비석의 보존을 위해 보호각이 세워졌으나 창살 틈새로 들이치는 산성비와 조류의 배설물에 의해 

비석의 마모는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2012년 충주고구려비전시관을 건립하여 현재는 실내에 보관·관리되고 있다. 

                                                                                                                    (출처_한국의 석비-고대(국보·보물))

 

 

 

 


형태적 특징

 

충주 고구려비는 돌기둥 형태의 화강암 자연석에 예서체隸書體로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4면에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발견된 1979년 당시부터 마모가 심하게 진행되어 있어서

앞면과 좌·우 측면에만 문자가 확인되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넓은 면인 전면에 글자가 가장 잘 남아 있다.

한 글자의 크기는 3~5cm 정도이고 한 행마다 23자로 되어 있으며,

전면은 10행, 좌측면은 7행, 우측면은 6행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처_한국의 석비-고대(국보·보물))

 

 

 

 

해석문

 

 

구성과 내용

 

발견 당시 2면 비, 3면 비, 4면 비로 보는 견해 등으로 엇갈려 있었으나 이제 4면 비임이 거의 확실시되었고,

 앞면 상단부에서 ‘년年’ 자를 판독해 냄으로써 원래 제액題額의 존재 가능성을 확인하고 

아울러 앞면이 제1면이라는 점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앞면이 첫째 면이고, 왼쪽 면, 오른쪽 면, 뒷면의 순서로 문장이 작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판독된 비문의 내용 중 주요한 특징은 5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신라를 동이東夷라 하고 신라왕을 매금寐錦이라 부른 점, 

여형여제如兄如弟라는 표현이나 고구려왕이 신라 매금에게 의복衣服을 하사下賜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상위의 입장에서 신라를 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외에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 ‘절사節賜’ 등은 고구려가 신라에게 군사적·문화적으로 영향을 주는 

관계였음을 알려주는 기록들이다.

                                                                                    (출처_한국의 석비-고대(국보·보물))

 

 

 

 

 

연구 성과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인이 당대에 직접 남긴 금석문이면서 국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인 만큼 발견된 이래 현재까지 많은 관심과 연구들이 축적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성과라면 ‘高麗太王’, ‘使者’, ‘古牟婁城’ 등의 글자가 판독되면서 고구려비로 확정된 것이다.
그러나 발견 당시부터 비문의 마모가 심했기 때문에 400~500여 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비문 중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200여 자에 불과했다.
더 많은 글자를 판독하고자 하는 연구자들의 바람은 기존의 탁본 이외에 적외선 촬영, 자외선 형광촬영, 

반사율 변환 영상촬영, 3차원스캐닝 등 다양한 과학적 기술을 판독 연구에 적용하게 하였다.
특히, 2019년에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고대사학회가 공동주최한 “충주 고구려비 발견 40주년 기념학술회의”에서 

발표된 ‘충주 고구려비 판독을 위한 과학적 조사방법’은 3차원 스캐닝 기반의 수치 영상 기술을 이용하여 

충주 고구려비의 글자 위치, 자간, 물갈이 흔적 등의 배열 및 형상 특징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비문의 미세 형상을 가시화하여 디지털 판독을 하였다.
금석문 탁본 전문가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이 시대에 3차원 스캐닝 기반의 디지털 판독은 탁본으로 

진행되었던 비문의 판독을 대신할 수 있으며, 정확성과 속도까지 향상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_한국의 석비-고대(국보·보물))

 

 

 

 

 

 

 

고구려 전시관을 나와 밖에 마련된 공원을 둘러본다.

 

고분 벽화를 중심으로 타일을 만들어 벽에 설치했다.

 

 

 

 

 

 

 

삼족오(三足烏)는 세 개의 발에 검은 까마귀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전해지는데, 

새 발이 셋인 이유는 하늘의 상징인 주역(周易)의 건괘(乾卦) 三자에서 연유됐다는 설이 있다. 

삼족오는 태양에 살고 있어 태양을 상징하는 새로 알려져 있는데,

신들이 태양의 후예라는 인식을 하고 있던 고구려에서는 원형의 태양 안에 들어있는 삼족오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충주 여행은 첫 번째 기착지로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을 둘러봤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고구려비를 발견함으로써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150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글자가 마모되어 그중 일부만 복원되었어도 많은 역사가 드러났다.

현대적 과학기법으로 숨겨진 글자를 알아내 더 많은 역사를 복원해 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