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8. (목) 오후에 잠시 탐방
오랫동안 오고 싶었던 논산의 노성산을 산행하는 김에 향적산까지 마쳤다.
노성산에서 주로 본 것은 노성산성이었고, 금강대도 건물과 주변의 총석사를 새긴 바위들이다.
이 산행에 앞서 노성향교 앞 주차장에 주차했으나 아침 햇볕이 너무 약해 하산하면서 제대로 본다.
담을 경계로 이어진 명재고택도 마찬가지 이유로 건너뛰며 오후에 함께 본다.
노성향교와 명재고택을 별도로 포스팅하려다 양이 적어 함께 묶어 처리한다.
□ 노성향교 (魯城鄕校)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노성향교는 본래 지금의 노성초등학교 자리에 세웠다고 하나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고,
1700여 년경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웠다.
단지 조선 인조 9년(1631)에 대성전을 보수하였다는 명륜당 현판의 기록으로 보아 오래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대성전, 동재, 서재, 삼문 등이 남아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안쪽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증자·맹자·안자·자사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동무에는 송나라 1현(賢)과 우리나라 9현을, 서무에는 송나라 1현과 우리나라 9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2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외삼문을 열고 들어오면 동쪽인 오른쪽에 양현재가 위치한다.
스승이 기거하며 학문의 연구하는 곳이다.
왼쪽은 학생들의 숙소로 쓰이는 모화당이다.
대두분의 향교는 동쪽에 스승의 거소가 동재가 있고, 서쪽에 학생들의 거소인 서재가 있다.
명륜당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솟을대문 형식이다.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초익공 양식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막돌 흩트려 쌓기로 구축한 기단 위에 자연 초석 형태의 괴석을 놓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다.
문은 정면과 측면 및 배면에 모두 시설하였으며 띠살문과 판문을 달았다.
익공은 앙설형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한편 측면에는 측벽을 보호하기 위해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출처_문화유적총람에서 발췌)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이다.
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으므로 대성전은 밖에서 찍는다.
대성전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전퇴칸으로 이익공 양식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장대석을 이용하여 중층기단을 구축한 뒤 자연 초석 형태의 괴석을 놓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다.
측면의 안쪽기둥을 고주로 하여 보를 받치는 대신 변주는 평주를 사용하면서 전면을 퇴칸으로 처리하였다.
문은 정면 3칸에만 시설하였으며 모두 2분합의 판문을 설치하였다.
특이한 것은 협칸의 중방 위에 교창을 설치하여 판문을 사용한 데서 오는 실내의 채광을 고려하였다.
익공은 앙설형이며 창방 위에는 화반대공으로 장식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측벽에는 방풍판을 시설하였다.
(출처_문화유적총람에서 발췌)
서재 위쪽으로 보이는 부속건물들
대성전과 명륜당, 서재와 외삼문
노성향교를 간단히 보보 밖으로 나오니 연지란 작은 연못이 보인다.
노성향교의 외삼문과 명륜당, 대성전
노성향교를 둘러싼 당장은 명재고택과 구분된다.
노성향교과 명재고택 앞에 있는 연못이 누구 소유일까 궁금했는데, 명재고택 소유라는 걸 알게 됐다.
연지
사랑채 앞 고택 입구에 있으며 노성향교 진입로와 갈라지는 모퉁이 다 긴 인공 방형지에
작은 석가산을 조성한 정원으로 인공방형지 석가산(人工方形池 石假山으)으로 다리를 놓았다.
석가산 배롱나무 밑에 벤치를 놓고 휴식처로 활용한다.
윤증고택은 바깥 담장이나 삼문과 같은 대문이 없는데 원래 연못 안쪽으로 담장과 솟을대문이 있었으나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담장과 대문을 헐어 버렸다고 한다.
그때 대문이 석가산 옆 진입로에 있었다고 구전된다.
□ 논산 명재 고택 (論山 明齋 古宅)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명재 윤증(明齋 尹拯,1629∼1714)이 지었다고 전하는 집이다.
후대에 수리가 있었던 듯하며 그 세부 기법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노성산성(魯城山城)이 있는 산자락에 노성향교(魯城鄕校)와 명재 고택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고, 왼쪽 1칸 뒤로 ‘一’ 자형의 중문 간 채가 자리 잡고 있다.
중문 간 채는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1칸 돌아 들어가게 중문을 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ㄷ’ 자 모양의 안채가 있어서, 중문 간 채와 함께 튼 ‘ㅁ’ 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집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 연못과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다.
또한 안채 뒤쪽에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이고 있다.
모든 건축부재의 마감이 치밀하면서 구조가 간결하고 보존상 태도 양호한 조선의 양반주택으로 손꼽힌다.
(출처_지나간 시간을 읽다에서 발췌)
사랑채 앞에 있는 우물로써 단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다고 하며, 이웃들과 같이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지붕을 씌워 보호하고 이 집에서는 장을 담을 때 이 물을 쓴다.
우물은 주변 지대보다 낮게 자리하며, 동·서쪽에 계단을 1,200㎜ 두었고 남쪽으로 배수로가 설치되었다
명재 고택의 장맛
명재 윤증 고택 종가의 장은 유명하다.
단아한 한옥마당에는 수 백 개의 장독이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며 줄 서있다.
물은 조상 대대로 먹었던 우물에서 모터를 이용해서 퍼 올려 쓰고 메주는 가을에 농사지은 우리 콩으로 만든다.
소금은 몇 해 동안 간수를 뺀 서해안 천일염을 쓴다.
이 집의 장은 다른 집과 다른 점이 있다. ‘씨간장’, ‘씨된장’이 그것이다.
윤증선생의 13세손인 윤완식(55)씨는
“수 백 년 이어온 전통입니다. 아주 오래전 담근 장맛이 아주 좋았던 때가 있었어요.
한 270여 년 전이지요.
그때 그 장을 따로 보관해서 다음 해 장을 담글 때 사용했어요.
해마다 그렇게 이어져 내려왔어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집 간장과 된장은 ‘전독간장’, ‘전독된장’이라고 부른다.
‘전’은 ‘前’나 ‘傳’을 쓴다.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다는 뜻이다.
메주와 간장을 분리하는 기간도 다른 집과 다르다.
보통 장을 담그면 30~40일 지나 메주와 간장을 분리하는데 이 집은 약 4개월 넘어 분리한다.
윤씨는 “메주 속에 있는 좋은 것들과 맛이 충분히 우러나게 돼요”라고 말한다.
장을 담그는 때도 그해 기후와 온도 등을 판단해서 황국균(메주의 발효를 돕는 균)이 가장 활발한 때를 잡는다.
이 집에서는 보통 정월 말일에 담근다.
예부터 그날이 되면 향긋하고 구수한 메주냄새가 온 마을을 진동해서 마을사람들이 모이곤 했다.
윤씨는 11대 종부인 어머니, 양창호(92) 선생에게서 장 만드는 법을 모두 익혔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어머니의 ‘감’을 못 따라가는 것이 있다.
소금 고르는 법이다. 양씨는 가장 맛난 상태의 소금을 골라내는 기술은 최고봉이었다.
“저도 올해 생산된 소금은 한 움큼 쥐면 감이 와요, 좋은지 아닌지,
하지만 어머니는 3년, 5년 간수를 오랫동안 뺀 소금들도 한 번만 쥐어보시면 ‘됐다’ 금방 아셔요.”
그는 아직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19살에 시집와서 70년 넘게 한 가문의 종부 역할을 한 어머니의 맛에 대한 감각을 따라갈 수가 없다.
소금은 한 움큼 쥐었을 때 손에 붙지 않고 바삭바삭한 것이 좋다.
잘 붙는 것은 쓴맛이 있고 그것으로 장을 담그면 장도 쓰다.
좋은 소금으로 절인 배추는 그것만 먹어도 맛난 법이다.
독도 중요하다. 북쪽으로 갈수록 그 항아리 모양은 위와 아래가 같은 원통이다.
빛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다.
아래쪽 지방일수록 가운데가 넓고 주둥이가 좁다.
윤씨는 온도가 점점 올라가서 전라도에서 많이 사용했던 독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독의 겉에는 한지를 버선모양으로 잘라 거꾸로 붙였다.
조상들의 지혜가 숨어있다.
“한지가 빛을 많이 반사해서 벌레들이 꼬이지가 않지요.
어머니는 그 한지 위에 ‘꿀독’이라고 글자를 적었어요, 꿀처럼 맛난 장이 되라고 기원하신 거죠”라고 말한다.
전희정 교수는 그 유래가 버선본에 있다고 말한다
. 우리 어머니들은 집안에서 가장 잘 안 찢어지는 종이인 버선본을 사용했다.
명재 고택 사람들은 한국전쟁 때 딱 하루 집을 비운 것 빼고는 늘 이 장을 지켜왔다.
나들이 다녀오면 깨끗하게 몸을 씻지 않고는 장독대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윤씨는 “그때는 미신인가 했는데 잡균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 선조들의 지혜였죠”라고 말한다.
장맛은 그렇게 집안사람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출처_장독대를 훔쳤다 중에서)
명재 고택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명재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190호)은 부드러운 곡선의 노성산의 산줄기가
세 갈래로 흘러내린 가운데 능선 끝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 흘러내린 언덕 위로 보이는 지붕의 곡선들이 안정감이 있다.
정면에서 보면 기와의 지붕 용마루 곡선이 산의 곡선과 같은 반경으로 맞아떨어져
부드러우면서도 자연스럽게 산과 하나가 되는 느낌을 체험할 수 있다.
가옥은 산 아래 높은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팔작지붕의 사랑채와 행랑채를 정면으로 배치되어 있다.
집 앞에는 커다란 연못과 바깥마당 그리고 정갈한 우물이 자리하고 있다.
연지 가운데에는 둥근 동산을 꾸미고 커다란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으며 연지 끝자락,
즉 명재선생 고택 옆으로는 노성향교가 자리하고 있어서 고전적이고 그윽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 가옥은 사랑채 정면과 동쪽 편에 언덕을 이루고
그 위에 소나무를 심어 마을길에서 직접 보이지 않도록 꾸며져 있다.
동쪽 언덕으로는 이 집의 역사를 내려다보는 듯한 세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어
여름이면 녹음이 마당 가득히 짙어진다.
또한 이 가옥의 뒷산 자락에는 곡선미가 아름다운 노송 숲이 집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는 풍경이 장관을 이루고,
사방으로는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계절 따라 변한다.
이렇듯 명재고택은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새의 둥지처럼 자리하고 있는 아름다운 공간을 감상할 수 있다.
(출처_민속문화재, 이야기를 입다에서 발췌)
볕이 잘 드는 곳에 장독대를 만들어 장맛이 좋겠단 생각이 든다.
위 명재 고택의 장맛이란 글에서도 장맛을 얘기했으니 맛은 보증된 셈이다.
명재 고택 사당
정침의 담장 동쪽 끝자락 언덕 위에 별도의 담장을 꾸미고 자리하고 있다.
3칸짜리 맞배지붕의 사당은 잘 다듬은 긴 장대석을 외벌대로 돌리고 그 위에 둥근기둥에 단청이 칠해져 있다.
특히, 반 칸은 마루로 꾸미고 뒤로 물러 신위를 모시는 방을 만들고 있다.
특히 안채에서는 서쪽 부엌에서 사당으로 가는 협문을 두고 있으며,
사당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보기만 해도 넉넉한 커다란 장독들이 질서 정연하게
줄을 맞추고 있어 멋진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
탐방객이 볼 수 있는 명재고택은 사실상 사랑채와 바깥에 있는 정원, 장독재 정도다.
안채는 사생활 공간인 데다가 지금은 건물 복원 중이라 들어갈 수 없다.
사랑채 툇마루
동쪽 툇마루
충남 논산의 노성리에 가면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 고택이 있다.
함양 개평에 있는 일두 정여창 고택과 더불어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고택이 명재고택이다.
이 집안은 보통 노성魯城 윤씨尹氏라고 불린다.
충청도에서 1급 양반으로 꼽히던 집안이 회덕의 송씨(우암 송시열 집안), 광산 김씨(사계 김장생 집안),
그리고 노성의 윤씨 집안이다.
명재는 벼슬을 거부한 처사處士로 유명하다.
‘정승 세 명이 대제학 한 명만 못하고, 대제학 세 명이 처사 한 명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처사는 벼슬을 하라고 해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공부하는 선비를 가리킨다.
명재는 임금이 40번 넘게 벼슬하라고 불렀어도 끝내 벼슬을 거부한 학자이다.
마지막에는 임금이 명재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우의정을 준다고 했지만 이것도 거부했다.
‘탕평인사’라는 명분에 맞지 않는 벼슬은 절대로 받지 않았던 것이다.
‘대제학 세 명이 처사 한 명만 못하다’는 경우는 바로 일생동안 처사였던 명재를 가리킨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처사는 두 명 있다고 한다. 명재와 지리산 밑에 살았던 남명 조식이다.
명재가 지닌 카리스마는 대단하였다. 그만큼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소론少論의 당수로서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명재는 자기가 죽은 뒤에 제사상의 크기도 미리 정해 놓았다.
제사상의 크기를 가로 세로 석자(90㎝)를 넘지 말게 하라는 당부였다.
음식을 간소하게 차리라는 당부였던 것이다.
지금도 명재 고택에 가보면 석자 안 되는 제사상이 남아 있다. 음식 몇 가지 올리면 상이 다 차버린다.
당시에 명재 집안의 윤씨들이 뽕나무 사업이 잘된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뽕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를 안 명재는 “우리 집안은 뽕나무를 키우면 안 된다.
이는 가난한 서민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심는 나무인데,
우리 같은 양반 집안마저 뽕나무를 키우면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되겠느냐,
절대로 뽕나무를 심으면 안 된다”라고 엄명을 내렸다.
윤씨들은 이를 그대로 지켰다.
현재 남아 있는 명재 고택도 사랑채에 담장이 없다. 대문도 없다.
외부인이 곧바로 사랑채에 접근하거나 쳐다볼 수 있는 구조이다.
집안에 담벼락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집안은 거리낄 것이 없다’는 표시이다.
이 집안의 이러한 가풍이 있었기 때문에 6·25 때에도 이 저택은 불에 타거나 손상당하지 않았다.
충청도 양반을 대표하는 집안이다.
우리나라는 조선조가 망하면서 양반도 몰락하였다.
양반들도 약자를 착취하는 토색질을 많이 하였다.
하지만 양반의 나쁜 점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좋은 점도 같이 사라졌다.
양반의 자존심과 주변을 배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같이 사라진 것이다.
해방 후에 남은 것은 ‘상놈정신’이다.
상놈정신의 좋은 점은 체면 따지지 않고, 근면성실하고, ‘너와 내가 동등하다’는 평등의식이다.
상놈 정신의 나쁜 점은 졸부근성이다.
‘남이야 죽건 말건, 내 배만 부르면 장땡이다’는 의식이 바로 상놈의식이다.
이 부정적 의미의 상놈의식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 ㅣ조용헌 칼럼니스트
문간채와 사랑채
명재는 임금이 불러도 벼슬에 나서지 않은 처서로 유명하다.
우의정 자리도 마다할 만큼 명분 없는 자리는 탐하지 않았다.
양반의 자존심을 지켰기에 6·25 때도 집이 불타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었다고 하니
요즘 회자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자이기도 하다.
요즘 세태에 멋진 교훈을 던저주는 양반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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