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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충청도·대전·세종

충주 누암리고분에서 영혼의 안식을 얻다

by 즐풍 2023. 2. 17.

2023_009

 

 

2023.2.3. (금)  오전에 잠시 탐방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을 둘러보고 다음 여정으로 준비한 곳이 1km 남짓 떨어진 누암리 고분군이다.

평소라면 떼무덤인 고분군에 관심도 없겠지만 2년 전 함안군청 뒷산에 있는 말이산 아라가야 고분군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누암리 고분은 역사에 일천한 즐풍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곳이지만 분명 뭔가 감동을 줄 것이라 믿었다.

조그만 산길의 고개를 넘으며 오른쪽으로 아기자기한 떼무덤이 눈에 들어온다.

누암리 일대에 산재한 230여 기의 고분 중 이곳에만 26기의 고분이 몰려있다.

 

 

 

 

충주 루암리 고분군 (忠州 樓岩里 古墳群)

 

신라말기에 조성된 이 고분군은 신라 진흥왕이 충주지방까지 그 영역을 확대한 후 중원소경을 설치하고자 

귀척(貴戚)들을 이주시켜 한강유적을 경영하고자 하였던 사실을 증명하는 유적으로서, 

누암리 일대에만 230여 기의 고분이 위치하고 있다. 

 발굴된 26기의 고분 가운데 주류를 이루는 것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 石室墳)이고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 石槨墳) 2기, 소형의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 石槨墓) 3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외방무덤(單室墳)임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짧은굽다리접시, 바리, 합, 항아리 등의 후기신라양식 토기류와 쇠손칼(鐵刀子), 

덩이쇠(鐵鋌) 등의 철기류, 청동제띠끝장식(靑銅制帶端金具丘), 금동제귀고리 등의 장신구류, 

가락바퀴(紡錘車) 등의 토제품이 있다. 

                                                                   (안내문)

 

 

 

누암리 고분 (中原 樓岩里 古樓)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누암리 산 41 번지 일대에 있는 고 신라 말기의 고분군이다.

고분군이 위치한 곳은 충주시에서 서북으로 약 5 km에 있는 남한강의 서안 구릉지대이다.

이 구릉은 북서에서 남동으로 뻗은 산지에서 북동의 한강을 향해 뻗는 능선의 말단부에 해당된다. 

구릉의 북쪽에는 한강에 의해 형성된 탑평리 일대의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고,

남동으로 약 1.5km에 달천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합수나루가 위치하여 수운교통(水運交通)의 요지로 볼 수 있다.

고분은 이 구릉의 해발 150m 정도의 능선 지맥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

 

고분군에서는 1989년 문화재연구소에 의해서 2기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1990년 문화재연구소에 의해서 4기의 굴식돌방무덤이,

l991년 충북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굴석돌방무덤을 비롯한 26기의 고분이 발굴되었다.

발굴된 고분 가운데 주류를 이루는 것은 굴식톨방무텀이었고,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 石槨墳)이 2기,

소형의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墳)이 3기인데, 구덩식돌덧널무덤의 경우 1기 (4-2호)만이 단독으로 조성되었고 

나머지는 굴식돌방(7호)의 배장묘(配葬墓,7-l·7-2호)로 축조되어 있었다.

이외의 고분들은 모두 외방무덤(單室墳)으로 확인되었다.

 

고분들 가운데는 둘레돌(護石)을 둘러 묘역을 표시한 것들이 다수 있었는데,

가장 큰 1호분의 경우 직경이 20m 내외의 원형이었다.

굴식돌방은 경사진 지반을 ‘L’ 자 상으로 깎아서 무덤구덩이(墓壙)를 만들고 축조한 반지상식이다.

평면 형태는 방형에 가까운 장방형(長方形)이고, 

널길 (羨道:연도)은 남벽의 좌측, 우측, 중앙에 낸 것으로 나누어지는 데,

좌측에 낸 것이 가장 많았고, 중앙에 단 것이  다음, 우측에 단 것은 1기(9호)에 불과하였다.

널방(玄室)은 대부분 깬돌 (割石)을 이용하여 네 벽을 내경 시키면서 궁륭상(穹窿狀)으로 좁혀

천정의 마무리는 쐐기돌을 꽂은 형태로 추정되나, 전정이 완전하게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특이하게 21호 분은 천정에 대형 판상의 깬돌을 덮은 것으로 추정되어 다른 양상을 보였다.

 

널방 내부에는 납작한 깬돌을 장방형으로 깔거나 쌓아서 주검받침대(屍床臺)를 만들었다.

널방에는 1대의 주검받침대만 둔 것도 있었으나 2대 또는 3대의 주검받침대를 갖춰 추가장이 확인되는 것도 있다.

주검받침은 안벽 측에 나란히 붙여 설치한 특징이 있고,

그 주검 받침 위에서는 베개로 사용된 석재들이 발견되어 피장자의 머리 방향을 알 수 있었는데, 그 방향은 동쪽이다.

따라서 주검받침의 위에는 대부분 바로 시신을 안치한 것이 보통임을 알 수 있는데,

널못(棺釘)이 발견되어 나무널(木棺)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널방 가운데 주검받침과 주검 받침이 접한 벽에 회를 두껍게 바른 것이 발견되기도 하였다(21호분).

그리고 널방의 안벽 쪽 주검받침 아래에서부터 널길의 중앙으로 배수구를 판 것도 발견되었다(1호분).

 

널길은 대부분 깬돌로 막았다. 

가장 대표적인 1호분의 경우 널땅은 길이, 너비, 높이가 27×23×49~5.1m 정도로 추정되며,

널길은 35×0.75×1.2m이다.

앞트기식돌덧널 2기는 평면 형태가 장방형이고 굴식돌방보다는 규모가 작았다. 

돌덧널은 장축을 등고선의 방향과 나란하게 두었고, 입구를 서쪽에 두었다.

입구의 아래는 돌덧널과 같이 쌓고 나머지 위를 입구로 사용한 특징이 있다.

돌덧널의 바닥에는 전면에 걸쳐 납작한 깬돌을 깔았고, 단장(單葬)으로 추정된다.

누암리 고분군에서는 짧은굽다리접시, 바리(鉢), 항아리(盒) 등의 후기 신라 양식 토기류와 쇠손칼(鐵刀子),

덩이쇠(鐵鋌) 등의 철기류·청동제띠끝장식(靑銅製帶端金具), 금동제 귀고리 등의 장신구류 가락바퀴(紡錘車)

등의 토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로 보아 이 고분군은 진흥왕의 북변 개척 이후인 6세기 중엽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 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은 진흥왕대 초에 충주에 신라의 소경(小京)이 설치되고 

중앙의 귀족들이 이곳으로 이주되는 등의 역사기록 등과 함께 고려해 볼 때,

이때에 충주지역을 거점으로 한강유역을 통제하려는 신라에 귀속된 중요한 세력집단으로 볼 수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사전)

 

 

 

제일 아래에 있는 이 봉분이 제일 크다.

흔히 묘지를 만들 때 맨 위에서부터 차례로 묘지를 만든다고 보면 조성 시기가 제일 나중이겠단 생각이 든다.

 

 

 

 

26기의 봉분이 발굴되었다고 하니 이곳에 있는 봉분 모두가 발굴된 셈이다.

이 봉분을 발굴하며 부장품인 토기가 제법 많이 발견되었다.

발굴된 토기의 일부는 아래쪽에 게시한다.

 

 

 

 

 

 

 

 

 

 

 

 

 

 

 

이집트나 고대 중국, 로마제국의 무덤은 휘황찬란하다.

경주에 있는 왕릉 역시 이집트나 중국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그래도 제법 큰 편이다.

이에 비해 누암리 고분은 장난감처럼 아기자기한 멋이 있다.

 

이곳 봉분을 발굴하면서 출토된 토기의 일부

작은 봉분은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도로 작다.

어린아이의 봉분이겠단 생각이 든다.

 

 

 

 

 

 

 

 

 

 

 

 

 

 

 

 

 

 

 

 

 

 

 

 

 

 

 

 

안내문에는 귀척들을 이주시켰다고 하지만, 경주에서 이곳까지 밀려난 토호세력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곳에 이렇게 묻힐 정도면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지방 토호세력이겠다.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충분한 누암리 고분군도 보면 제법 재미있는 상상의 나래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