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3. (일) 오후에 잠시 탐방
장성에 있는 입압산 등산을 끝내고 임실의 옥정호 출렁다리를 보러 가는 길에 전봉준 기념관이 보인다.
이달 초 전주에서 동학혁명 기념관을 본 적이 있어 이곳에도 들려본다.
고부군수 조병갑이 부정과 착취를 일삼는 악랄한 학정이 계속되자 농민뿐만 아니라 부민들도 분노가 쌓여갔다.
이런 학정으로 촉발된 동학농민운동은 처음에 제법 세력을 키우며 정부군을 제압하고 여러 지역을 휩쓸었으나
일본군이 개입하며 고액의 포상금이 붙자 부하로 있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전봉준이 체포된 곳으로 "전봉준 피체지"에 녹두장군 전봉준(기념)관을 세운 것이다.
기념관 주소: 전북 순창군 쌍치면 피노길 65-29
□ 전봉준
봉건제도를 타파하려 했던 동학의 지도자로 별명은 '녹두장군'.
전라북도 고부군의 잔반 출신으로 1890년 동학에 입교하여 1892년 고부지방의 접주로 임명되었으며
제1차 농민전쟁 당시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제2차 농민전쟁에서는 친일적인 개화파정권을 타도하고 전국 차원에서 폐정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의 변혁 의지는 일본군 의해 좌절당했지만 조선의 봉건제도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실증했고,
민중을 반침략, 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원동력이 되었다.
(출처_다음백과 전봉준 요약본)
전봉준의 동학농민전쟁은 전라 ·경상, ·충청도 외에도 강원도·황해도·평안도까지 봉기하며
온 나라가 싸움에 휘말렸다.
동학농민전쟁의 봉기는 반봉건 항쟁이자 갑오개혁에 의한 노비들의 신분해방운동,
반일·반침략에 대한 항쟁 등 평등사회 구현이었다.
아래 폐정개혁안에서 보듯 당시 사회문제 전반을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동학란 때 일종의 동요, 즉
아랫녘 새야 웃녘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청포 밭에 앉지마라
녹두 덩굴 다 썩는다.
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동학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물론 누구나 그 뜻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난을 지내고 보니 즉 전의 노래는 아랫녁(下道의 뜻)인 전주 고부에서 전녹두
(全綠豆=전봉준의 별명)가 동학란을 일으켰다가 외국청병(外國請兵) 아래 패한다는 뜻이요,
뒤의 노래는 동학이 갑오년에 속히 성골을 못하고 을미년까지 지지하게 끌다가
병신년에는 꼼짝도 못 한다는 것을 의미함이었다.
과연 그랬었다. 갑오년에 만일 외국의 청병이 없고 동학군이 서울을 급거 점령하여
시간만 잃지 않았었으면 동학당이 그 당시에 용의 하게 벌써 대성공을 하였을 것이다.
(출처_차상찬의 「갑오비화」에서 발췌)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동학농민전쟁은 가장 허무하게 끝난 것으로 기록된다.
숫적으로 우세했던 농민군은 현대적 병기를 가진 소수의 일본군과 관군에게 무참히 깨졌다.
농민군과 그 가족들은 대부분 이들 손에 죽거나 재산을 빼앗겼다.
사상자 수는 20만에서 50만으로 본다고 한다.
패배한 농민군은 산으로 들어가고 섬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부지하면서
무기를 땅에 묻고 골방에 숨겼다가 나중에 의병항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희생정신으로 지켜온 나라가 지금 어떻게 흘러가는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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