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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역사 깊은 도시의 충주박물관

by 즐풍 2023. 2. 18.

2023_010

 

 

 

2023.2.3 (금) 오전

 

 

2년 전 충주박물관 앞에 있는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을 본 후 시간이 없어 그냥 갔던 충주 박물관에 들린다.

어느 지역에 가든 관광 명소와 함께 꼭 봐야 할 곳은 박물관이라고 생각한다.

박물관은 그 지역의 유물과 함께 역사에 대한 큰 틀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충주 역사는 앞서 고구려비 전시관에 들리며 대강 짚고 오긴 했어도 이곳에선 또 다른 무엇인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충주박물관

 

충주박물관은 건물 두 동과 야외 공간으로 나뉜다. 

제1관은 역사실과 민속실로 구분해 불교미술과 민속품을 전시한다. 

제2관은 선사시대부터 이어온 충주의 역사를 설명한다. 

충주 각지에 서린 역사의 궤를 하나로 엮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역사는 거대한 흐름인 양하지만, 박물관을 채운 유물은 개인의 삶과 행복을 묻는다.

박물관 주변으로 흥미로운 장소가 여럿 있다. 

세계술문화박물관 리쿼리움이나 충주조정체험학교등이다. 

충주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낭만이다.                         (출처_충주 문화관광)

 

 

 

충주박물관은 두 동으로 되어 있는데, 먼저 왼쪽 건물로 들어선다.

 

 

 

 

 

 

두 제품 모두 고려시대의 청동거울이다.

왼쪽은 손잡이가 달려있으며 지름은 9cm, 오른쪽은 지름 10cm이다.

왼쪽 거울엔 두 마리의 학과 한 마리의 거북이가 있다.

좌측에 '天下一'이라는 글자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오른쪽 거울은 부식되어 뚜렷이 보이진 않으나 거울의 뒷면에는 고리 하나에 하늘로 뻗친

큰 나무와 나무 아래 남성으로 보이는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남성의 왼쪽 곁에는 귀부인과 하녀로 보이는 인물이 양각되어 있다.

아래로는 말과 말을 모는 사동으로 보이는 사람의 형상이 보인다.   (안내문)

 

 

 

 

 

청동판 불상

 

고려  가로 18.3, 세로 26.7, 두께 05.cm

불당이나 불상 주위를 장식하는 장엄구로 사용되었던 불상판이다.

오른쪽 불상판 가슴에 '卍' 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청동합

 

청자광구병

충주 단월동 출토  고려시대

몸통 양쪽에 철화당초문양을 장식하였으며, 다소 목이 길고 입지름이 큰 병이다.

 

청자광구병                                                                                                             오이 모양 토기 주전자

 

육자진언수막새                                                                                                                      연호문수막새

 

위칸 암막새와 아래칸 수막새

 

청자흑백상감국화문잔 (고려)

 

청자탁잔 (고려)

 

연화문수막새

충주 탑평리 출토 (삼국시대)  각 지름 17.5cm / 14cm

중앙탑 일대에서 출토된 연화문형의 수막새로, 7개의 연자와 6장의 연꽃잎이 복판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청자정병 

고려, 높이 28cm, 둘레 48cm, 바닥 지름 9.3cm

스님의 필수품 중 하나인 정병은 부처님께 가장 깨끗한 물인 정화수를 바치는 공양구로서의 역할을 했다.

불교에서 정병에 담긴 물은 중생의 목마름과 고통을 씻어주는 부처님의 자비를 의미한다. (안내문)

 

 

조선시대의 충주 

 

1395년(태조 4년) 충주는 새롭게 개편된 충청도에 속하여 충청감영을 충주에 두고 관찰사를 배치하여

충청도의 중심지로 자리했다.

1449년(세종 31년)에는 충청좌도와 우도로 나뉨에 따라 충주에는 좌감사가 배치되었으며,

1457년(세조 3년)에는 충주진영이 설치되어 단양, 영춘, 제천, 청풍, 음성 등을 관할했다.

충주는 조령을 넘어 서울과 경상도로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많은 물자와 사람들이 모이고

왕래하는 물산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조선의 3대 도시 충주


충주의 인구는 조선 초부터 계속적으로 증가하여 1759년(영조 35년)에는 20,0765 가구에

인구 107,693명으로 정점에 이르렀고, 

정조 대에도 한양과 평양 다음 가는 인구를 가진 조선의 3대 도시로 번성했다.

하지만 조선후기에는 충청감염의 공주 이전, 조령로의 쇠퇴, 한강 수운의 위축으로

점차 인구도 감소  추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1872년(고종 9년)에는 18,129 가구 45,456명으로
인구가 정점 대비 57.8%는 감소하였다.   (안내문)

 

 

 

 

분청사기주병 (조선시대)

 

 

철릭(綴翼)

 

상의와 하의를 따로 구성하여 허리 선에서 연결시킨 포(袍)

상의와 하의의 비율은 시기마다 달랐으며, 주름 역시 유행이 있었다.

고려 중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사용하였으며, 전쟁 등 비상시와 사냥·사신으로 나갈 때 옹과 신하들이 입었다.

당상관 남색, 당하관은 청색을 사용했다.

주로 군사용으로 쓰였기에 '융복' 또는 '군복'으로도 불린다.

이응해 장군의 철릭은 소매에 단추를 이용하여 탈착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안내문)

 

 

쌍용문경

고려시대

두 마리의 용이 양각된 청동거울

 

충주박물관은 1관으로 들어가 2관으로 나오게 된다.

 

 

충주는 한 때 우리나라 3대 도시에 들어갈 만큼 큰 도시였다는 걸 박물관에서 알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충청감영이라는 큰 관공서가 공주로 떠나고,

수운과 육운도 쇠퇴하며 충주의 번성도 끝나게 되었다.

고구려의 땅이었을 때는 고구려비를 세웠고, 통일신라 시대엔 중앙탑을 세웠다.

몽고가 이곳을 침입했을 때는 여덟 차례나 격퇴했을 만큼 격전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는 신립 장군의 어설픈 전략으로 탄금대에서 대패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충주는 많은 역사가 서린 도시란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