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06
2023.1.22. (일) 13:20~14:10, 50분 탐방
서산 용현리에 있는 백제시대에 만든 마애여래삼존불을 보고 바로 태안에 있는 해양유물전시관으로 넘어왔다.
안내데스크에서 전시해설 자동음성 안내기를 대여받아 귀에 꽂고 입장한다.
이 음성 안내기는 해설사의 도움 없이 특정 지역을 지날 때마다 전시 작품에 대해 자동으로 해설해 준다.
형님은 해설을 귀로 듣는 한편 안내문과 유물을 꼼꼼히 읽으며 열심히 관찰하신다.
덕분에 즐풍도 좀 더 주의 깊게 관찰하며 조상이 남긴 유물을 세심하게 보는 기회가 되었다.
□ 국립해양문화연구소 · 태안해양유물전시관
국립해양연구소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바닷속 문화유산을 발굴·보존·전시·활용하는 문화재청 소속 기관이다.
1976년 신안선 발굴을 계기로 목포에 처음 자리한 이후 지금까지 총 14척의 배와 10만여 점의 유물을 발굴했다.
현재 5만여 점의 유물을 소속 전시관인 국립해양유물전시관(목포)과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 보관·활용하고 있다.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은 2000년대 이후 서해 중부해역의 획기적인 해양 문화유산 발굴 성과에 힘입어 탄생했다.
2007년 태안선을 발견을 시작으로 서해 중부해역 전역에서 침몰선과 유물이 지속적으로 발견되자,
2018년 이 지역 해양문화유산 조사·보존·연구·활용을 전담할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을 개관하였다.
교류와 소통의 공간 바다를 무대로 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바다에 잠든 문화유산이 빛을 보고,
바다가 역사의 현장으로 새롭게 조명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안내문)
태안 원청리 조간대는 2019년 9월 조개를 캐던 주민이 취두를 발견하면서 처음 존재가 알려졌다.
조사지역은 태안군 남면 남서쪽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간대 지역으로 만조시에는 바닷물에 잠겨있다가 간조시에만 조간대가 드러난다.
하루동안 조사할 수 있는 시간은 2~3시간 정도이다.
시굴조사는 2021년 5월 24일부터 6월 11일까지 진행하였다.
갯벌이 많은 남해안과 서해안에서 난파된 선적이 묻힌 곳은 타임캡슐이나 마찬가지다.
때로는 도굴범에 의해, 더 많은 경우엔 어민들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졌다.
진도 명랑대첩교 해역의 수중유물은 도굴사범의 진술로 존재가 알려진 곳이다.
우리나라의 수중문화재는 목포와 태안에 해양유물전시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이곳의 수장 유물은 수중에서 발굴하거나 어민이 발견하여 신고한 것, 그리고 압수된 수중문화재이다.
목포와 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 소장된 유물은 약 5만여 점이라고 한다.
가끔 TV에서 진행하는 「TV쇼 진품명품」을 보면 고려시대의 청자 하나에 몇억씩 가격이 매겨지는 걸 볼 수 있다.
이렇게 수장된 유물이 5만여 점에 가까우니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문화재인 것이다.
난파선이 가라앉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치며 이가 나갔지만, 완벽한 형태로 남았다.
한쪽뿐인 사슴뿔
사진 아래쪽에 각각이 이름이 붙어있다.
유물이 발견될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태안해안유물전시관에서는 서해안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한다.
벌굴된 지역에 따라 태안선, 마도 1호선~4호선까지 이름을 붙였다.
그중 마도 1호선을 고증을 통하여 이렇게 실물 형태로 복원·전시했다.
임진왜란 때 쳐들어온 왜놈들의 선박은 장거리 행해를 위해 바닷물을 빠르게 가르며 진행하기 위해
V 자 형태의 모양이었다.
조선의 대표적 수군 선박은 밑바닥이 평평한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재질이 무겁고 강한 소나무였고, 일본 배는 약하고 가벼운 삼나무로 만들었다.
판옥선은 속도는 느리가 방향 전환이 쉬웠고, 일본 배는 속도는 빠르나 방향전환이 어려웠다.
그러니 해전에서 판옥선은 치고 빠지기 쉬웠으며 충돌해도 파손이 적었다.
□ 사슴뿔(鹿角)
길이 75.0, 너비 3.0
사슴의 두개골로 좌, 우측 녹각이 모두 잔존한다. 뿔의 가짓수로 보아 5살 이상으로 추정된다.
왼쪽의 가지 끝 2곳(trez tine, terminal tine)에 굴껍데기가 부착되어 있다.
(출처_태안해양유물전시관 홈피)
생후 5년 이상 자란 사슴뿔로 두개골 일부가 붙어있다.
마도 3호선에서 발견된 사슴류의 뼈 중 두개골과 뿔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마도 3호선에 실린 화물은 무신정권기 최고 권력자들이 수신자로 등장하는데,
그에 걸맞게 사슴뿔과 같은 고급 물품이 실려 있었다. (안내문)
□ 청자 발우(靑磁陰刻牡丹唐草文鉢盂)
크기/높이 4/3.8cm, 입지름 16.5/16.3cm, 바닥지름 4.8cm
청자발우로 기측선은 수평으로 벌어진 저부에서 약하게 올라가다 동체 상부에서 꺾여 직립된 형태이다.
구연부 아래 1줄의 음각선이 돌아가고, 내면에 음각으로 모란당초문을 시문하였다.
유약이 고르게 시유되었으며, 유색은 일부 어두운 색을 띤다.
굽은 평저굽이며, 굽접지면의 유약을 닦아 내고, 4곳에 내화토빚음을 받쳐 번조하였다.
(발굴당시 태안-8397,8398,8399와 함께 포개어져 출토됨)
(출처_태안해양유물전시관 홈피)
□ 청자상감모란연화문표형주자(사진 왼쪽)
높이 24.0cm, 입지름 2.4cm, 바닥지름 8.9
크고 작은 타원형의 윗 동체와 아랫 동체로 구성된 표주박모양의 주자로 주구 일부는 파손되었다.
꼬인 넝쿨모양의 손잡이와 살짝 바깥쪽으로 휘어진 주구는 동체의 양쪽 면에 붙어 있다.
주구는 여섯 면으로 각을 주고 수직에 가깝게 곧추선 형태로 부착되었다.
아래 동체에 모란절지문과 연화절지문을 상감기법으로 표현하였다.
주구와 손잡이가 동체에 부착된 부분에 팔능형의 화창을 흑상감과 백상감을 사용하여 2겹으로 장식하였다.
주 문양인 모란과 연꽃 주변에 음각기법으로으로 운문을 두어 주구는 그 안에 음각기법으로으로
능형 화엽문을 2단으로 장식하였다.
유색은 녹색과 황록색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잘 발렸다.
굽은 평저로, 굽 안바닥을 얕게 파내고 굽 주변은 내화토모래 빚음을 여섯 곳에 받쳐 구웠다.
(출처_태안해양유물전시관 홈피)
한쪽 벽면의 1/4 정도만 찍은 사진이다.
이렇게 많은 유물이 있다는 건 우리의 서해안이 우리 민족에게 보내는 선물이다.
□ 청자 모란 국화무늬 베개(靑瓷象嵌牡丹文枕)
청자 베개는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장방형長方形의 몸체에 머리를 베는 부분은 둥글게 곡선을 그리며 좁아져 있고 양 옆면에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
외면에 정면 문양은 상감象嵌으로, 가장자리는 연주문대를 돌리고 몸체에는 국화꽃을 장식하였다.
측면에도 가장자리에 연주문대를 돌리고,
중앙의 둥근 구멍에 선을 그리고 정면과 같이 모서리에 4개의 국화꽃을 장식하였다.
유색은 담청색으로 전면에 발랐고 빙렬이 확인된다.
태토는 회색을 띠며, 비교적 정선된 태토를 사용하였다.
한쪽 측면에는 유약이 녹지 않아 회백색을 띠며, 모서리 4곳에 굵은 규석받침을 받쳐 구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출처_태안해양유물전시관 홈피)
선원들의 선상 생활은 어땠을까?
이렇게 일정하고 정교한 작품은 지금 기계로 찍어낸 듯 보인다.
작풍성이 뛰어난 예술품이다.
□ 죽찰(竹札)
죽찰에는 ‘준(樽)’이라는 기명의 명칭과 내용물이 기재되어 있어 고려시대 매병의 표기와
꿀을 담았던 매병의 당시 용도를 알 수 있게 하는 시대성과 희소성을 지니고 있다.
앞면과 뒷면 모두 글자가 있고, 앞면 8 자 뒷면 7자 총 15자다.
앞면에는 “중방도장교오문부(重房都將校吳文富)”가 적혀 있는데 수취인을 적은 것이다.
뒷면에는 “택상정밀성준봉(宅上精蜜盛樽封)”이라고 적혀 있어서 준(樽)에 꿀을 담아 올린다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출처_문화재청)
어쩌면 뱃사람들이 사용했을 일상적인 식기·대접일지도 모른다.
막 쓰기에 부담 없는 수수한 그릇이다.
형님이 이렇게 구부러진 청동 숟가락을 보고 예술성이 좋다고 하지만, 실용성을 좀 떨어지는 느낌이다.
□ 철제 솥(복제)
높이 29.5, 너비 33.8, 두께 0.3
H5-2 그리드에서 출수된 철제 삼족솥이다.
바닥은 오목한 형태를 나타내며, 전은 대부분 형태를 갖추고 있다.
입구와 전 사이에 음각기법으로 된 3줄의 선이 관찰되며, 다리는 3개 중 2개는 일부 깨졌다.
솥뚜껑은 완형을 이루며 중심부에는 손잡이 흔적이 관찰된다.
(출처_태안해양유물전시관 홈피)
곰방대가 보인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전래된 것은 16세기로 의견이 모아진다.
이 곰방대는 황동으로 만든 것으로 적어도 임진왜란 이후의 것으로 보니는 데, 어찌 된 것일까?
조운선이 아니라도 무역선이나 운반선은 언제든 존재했다.
고려시대의 서울인 개성으로 가거나 조선시대 한양으로 갈 때 남쪽에서 출발하는 한 달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다.
중간중간에 음식 장만을 위해 항구에 내리기도 하겠지만 선상생활은 지루하고 고될 것이다.
잠시 짬이 나면 이렇게 바둑이나 장기를 두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과거의 수많은 유물이 해저에서 출토되며 죽찰이 있으면 어느 시대에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특정된다.
마도 1호에서 4호선은 물론 다른 난파선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로 당시 생활을 어느 정도 끌어낼 수 있다.
역사의 순간순간이 이렇게 하나둘 꿰어지며 복원되는 것이다.
파도나 폭풍우로 배가 난파되고 전복되며 스러진 아까운 희생이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실마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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