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025A
2023.3.2. (목) 오전에 잠시 탐방
카메라 구입 2년을 앞둔 시점에 무상 수리 보증을 받고 선유도 탐방에 이어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약 25년쯤 전에 경복궁 자리에 있을 때 다녀왔으니 아주 먼 옛날이야기다.
역사에 관심을 갖는 만큼 박물관을 방문했다면 좀 더 자주 왔어야 한다.
직장에 매였을 땐 바쁘다는 핑계와 한동안 등산에 진심이었던 시절이니 짬을 내기 어려웠다.
이번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느낀 점은 소장 문화재가 적다는 느낌이다.
워낙 외침이 많았던 데다 먹고 살기에도 바빴을 테니 품위 있고 예술성 있는 작품을 많이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왕실의 물건도 외침이나 전쟁으로 나라가 바뀌면 궁궐이 불타거나 전리품으로 장군이나 병사 차지가 되었겠다.
임진왜란으로 선조는 도망가기 바쁘니 챙긴 물건은 없었고, 왜놈들은 가치 있는 물건은 빼돌리고 궁궐을 불태웠다.
그나마 전시된 유물은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 장식물 등과 도자기류, 사찰에서 전래된 불상 등이 주류를 이룬다.
사찰을 방문하다 보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있기는 하지만 사찰 소유라 대부분 사찰에 보관되어 있다.
이렇게 사찰이나 개인이 소장한 국보급 문화재는 강제로 징수할 수 없으니 도난이나 화재에 취약하다.
한 예로 훈민정음해례본 상주본 소유자는 1,000억 원 가치가 있다며 거액을 요구하던 중 화재로 일부 소실되기도 했다.
이제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지차체는 물론 개인조차도 많은 박물관을 세우고 있다.
가장 많은 유물을 보관한 곳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도자기 등을 전시한 태안과 목포의 해양유물전시관이다.
지자체나 개인이 소장하고 전시하는 박물관은 기술적인 문제로 훼손되는 경우도 제법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곳에 정부 예산이 뒷받침되어 온전하게 후손에게 물려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ㅁ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고,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감동의 공간인
국립중앙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시대와 주제별로 제시된 6개의 상설전시관, 다양한 내용을 선보이는 특별전시관, 관람의 이해를 돕는
전시해설 프로그램, 오감으로 즐기고 배우는 어린이박물관, 다채로운 교육 프로그램,
첨단기술을 활용한 실감콘텐츠 등을 마음껏 누리고 즐기실 수 있습니다.
박물관은 계절에 따라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정원을 산책하며 여유 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도심 속 힐링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상의 짧은 나들이에서 만나는 문화유산과 자연풍광은 기대 이상의 감동으로 여러분의 지적·문화적 갈증을
채워드릴 것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는 아주 먼 옛날부터 가까운 옛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세계 유산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발자취와 전통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구석기시대의 손도끼, 삼국시대의 금관과 반가사유상, 고려시대의 청자,
조선시대의 그림과 글씨는 옛사람들과 오늘날의 우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이자 과거와 현재가
극적으로 만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박물관은 전시를 매개로 시공간을 뛰어넘어 많은 이들이 지녔던 감정과 생각, 꿈과 희망까지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좋은 전시의 기본이 되는 소장품의 수집과 보존, 학술조사연구 등 여러 분야에서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국민 여러분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문화에 대한 바람과 수요를 실현하는 수준 높은 콘텐츠를
생산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이 갖고 있는 문화 정보와 자산을 나누고 공유하면서
현재에 활력을 불어놓고 미래를 빛나게 하는 살아있는 열린 공간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누구나 언제든지 찾아와 머물다 갈 수 있는 휴식의 장소입니다.
모든 것이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박물관은 잠시 쉬어가도 되는 곳, 뒤를 돌아다봐도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찾아오는 분들이 전시를 천천히 감상하면서 정신적 위안을 받거나 진지한 사유와 성찰을 하거나 때로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빛나는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또는 나 홀로 여유를 누리며 찾아오는 가까운 쉼터인 박물관에서 문화와 일상의
가치를 한껏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출처_윤성용 국립중앙박물관장 님의 인사말)
한때 서울 속 미국 땅이었던 용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며 44년 만에 반환받았다.
그 땅에 국림중앙박물관을 이전하며 제법 규모 있게 박물관을 지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뒤 북동쪽에 남산이 있고 앞으로는 한강이 흐른다.
이런 배산임수는 풍수지리에서 길지 중의 길지로 꼽는다.
미군이 방을 뺀 곳에 국립중앙박물관이 터를 잡았으니 국운이 뻗어나가면 좋겠다.
박물관 앞에 거울못이란 연못을 둔 것은 역사적 유물을 볼 때 과거를 거울에 비추어 보듯
앞으로 나갈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겠다.
박물관 밖에는 석등이 있고, 공원에는 여러 석탑에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들어가면서 보니 조그만 마을을 지나면 바로 남산이다.
하늘엔 제트기가 편대를 이루며 오늘도 국토 수호를 위해 비행하고 있다.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이 승탑은 통일신라 말기의 고승으로 신라 선종 산문 중 하나인 봉림산문을 세운 진경대사
심희(855-923)의 묘탑이다.
팔각집 모양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날씬한 몸체에 장식을 절제하면서도 변화를 시도한 조형적 특징을 보인다.
기단부 가운데 꽃띠를 두른 북 모양 중대석은 같은 시기 석등에서 보이는 형식이다.
(봉림사: 경남 창원시 상남동) (안내문)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
이 탑과 석관은 신라 말기로부터 고려 초기까지 활동한 고승 진공대사의 묘탑과 석관으로
1931년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 절터에서 옮겨왔다.
진공대사는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신라 효공왕(재위 897~912) 때에 귀국하여 왕사(王師)가 되었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태조의 왕사가 되었다가 940년(태조 23)에 입적하였는데
태조가 친히 비문을 지을 정도로 대사는 생전에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 탑은 팔각집 모양을 기본 평면으로 하였으나 기단 중간부는 원통형으로 하여 구름과 용무늬를 새겼고,
아담한 탑신 위에는 곡선이 강한 지붕을 얹고 보개로 장식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탑은 고려 태조의 왕명으로 지어진 것으로서 고려시대 초기 승탑 중 우수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출처_국립중앙박물관)
개성 현화사 석등
현화사는 고려 현종(재위 1009~1031년)이 돌아가신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사찰이다.
고려의 큰 사차리 현화사의 명성을 짐작케 하듯, 석등의 규모가 크고 당당하다.
현종은 삼각산 삼천사 주지 법경을 현화사의 초대 주지로 임명하고, 칠 층 석탑과 이 석등을 만들게 했다.
(안내문)
원주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
박물관 앞 드넓은 열린마당 한쪽 벽을 따라 선승을 기리는 장엄한 탑과 탑비가 숲처럼 들어서 있다.
모두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전시품들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염거화상탑(855년 제작)부터
마지막 거돈사(居頓寺)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 1018~1025년 제작)까지 각 시대마다
문파를 대표하듯 거대한 고목과 같이 하늘을 받들고 서 있다.
불가(佛家)의 깊은 깨달음을 얻은 승려를 기리는 석조물들 사이를 거닐다 보면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사람들의 삶과 그 자취가 느껴진다.
당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고승들을 기리고자, 왕실과 지방 호족들의 지원으로 화려한 석조물을 세웠다.
이 승탑은 선사의 입적 연대인 1018년에서부터 탑비가 건립되는 1025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탑신 정면에는 문과 자물쇠가 표현되어 있고 문 위에는 "圓空國師勝妙之塔(원공국사승묘지탑)"이라고 쓴
네모난 액자와 같은 문액(門額)이 있어 주인공을 확실히 알려주며, 이곳이 정면임을 알게 해 준다.
앞뒤 문비 좌우로는 사천왕이 조각되었고 나머지 두 면에는 창호가 표현되었다.
문액의 등장과 더불어 이 탑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탑신 형식은 기둥 대신 화려한 꽃띠 장식을
귀 기둥 자리에 새긴 점을 들 수 있다.
불상 기단과 같이 팔각 대좌 위에 팔각집 모양을 한 전형적인 승탑의 형태는 염거화상탑에서 처음 선보여
원공국사탑까지 기본 형태가 지켜졌다.
이 탑이 원래 자리에서 반출되었을 때 지대석은 함께 이동하지 않아 지대석 2매는 원주 거돈사 터에 남아 있다.
아래쪽 기단부의 높고 커다란 팔각 중대석에 팔부중이 새겨져 있으며,
화려한 연꽃으로 장식된 상대석은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탁월한 조형 감각과 힘찬 느낌을 주는 이 탑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이처럼 웅장한 승탑은 만들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자신의 집에 이 탑을 옮겨놓았다가 해방 후인 1948년 경복궁으로
이전하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입수되었다.
서울 홍제동 오층석탑
사현사의 옛터에 있던 탑으로, 시가지 확장을 하면서 1970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탑은 자연석이 기단(基壇)을 대신하여 5층의 탑신(塔身)을 받치고 있는데, 후대에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있다.
1층 몸돌에는 아무 장식이 없고, 2층 이상은 기둥모양을 새겨 한 면을 둘로 나누고
그곳에 문짝으로 보이는 네모난 액자형을 표시하였다.
각 층의 몸돌은 전체적으로 위가 좁고 아래는 넓어 목조건축을 모방하려 한 의도가 엿보인다.
지붕돌은 넓고 얇은 편이나 육중해 보이고,
두꺼워 보이는 처마는 수평으로 펼쳐지다가 양끝으로 치켜 오르면서 더욱 두꺼워졌다.
현재 기단부가 결실되어 안정감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전체적으로 중후하면서 경쾌함과 안정성을 겸하고 있다.
세워진 연대에 대해서는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보물)의 비문에 의하여
이 절이 고려 정종 12년(1045)에 창건된 것임을 알 수 있어서, 이 탑도 절을 창건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출처_문화재청)
경북 김천 갈항사 동서 삼층탑
갈항사터(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동 소재)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두 탑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하자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며, 서로 규모와 구조가 같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특히 가운데기둥은 두 개씩을 두었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고 있는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의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동탑의 기단에 통일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언적법사 3남매가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으며, 이두문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특기할 만하다.
두 탑 모두 꼭대기의 머리장식만 없어졌을 뿐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잘 남아있다.
두 탑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위아래층 기단에 가운데기둥을 두 개씩 새겨 놓고 있어 당시의 석탑양식이 잘 담겨 있는 탑이다.
(출처_문화재청)
원주 천수사 삼층석탑
탑의 몸체를 받치고 있는 기단부는 통일신라 석탑에서 보이는 2층 기단 형식이다.
탑신부 몸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1층과 2층 탑신 아래에는 굄돌이 놓여 있다.
지붕 처마 층단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고 지붕의 윗면은 경사가 완만하다.
탑의 꼭대기에 해당하는 상륜부에는 네모난 지붕 모양 장식만 남았다. (안내문)
원주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
고려 후기의 승려인 보제존자의 사리탑으로, 모두 2기이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겼는데, 보통 승려의 사리탑과는 달리 석탑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보제존자(1320∼1376)는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화상으로,
신륵사에 그의 사리탑이 남아 있으나 제자들에 의해 영전사에도 따로 사리탑을 세운 것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위·아래층 모두 모서리에 기둥조각을 새겼고, 위층 기단 윗면에는 탑신을 받치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웠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이다.
2기 가운데 1기의 1층 지붕돌은 양식상 차이가 있어 원래 이 탑에 속하였던 것인지 의심스럽다.
탑의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은 2기 모두 완전하게 남아있지는 않다.
고려 우왕 14년(1388)에 세운 것으로, 승려의 묘탑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이며, 더
욱이 거의 같은 양식으로 2기를 건립하였다는 점도 특이한 예이다.
탑을 지금의 자리로 옮길 당시에 각각의 탑에서 사리를 두는 장치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한 탑에서는 죽은 사람에 관해 새긴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이 탑을 세우게 된 과정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훌륭하고 균형을 이루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여주 고달사 쌍사자 석등
고달사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59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높이는 2.43m이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까지만 남아있었으나,
2000년에 경기도 기전매장문화연구원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지붕돌이 출토되었다.
직사각형의 바닥돌 4면에 둥글넓적한 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아래받침돌 대신 2마리의 사자를 앉혀 놓았다.
사자는 좌우에서 앞발을 내밀고 웅크리고 있으며, 등 위로 구름이 솟아올라있다.
가운데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돋을새김 하였고,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다.
그 위에 놓인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뚫었다.
우리나라 쌍사자석등의 사자는 서있는 자세가 대부분인데, 이 석등은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특징적이며,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인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_문화재청)
원주 천수사 오층석탑
하층기단 덮개돌 아래 부재는 없어졌다.
각각의 탑신부 몸돌은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낮아진다.
지붕 처마에는 각 층마다 3단의 받침이 있으며,
네 모서리에는 풍경의 일종인 풍탁을 단 작은 구멍이 네 개씩 남아 있다.
탑 꼭대기 장식인 상륜부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안내문)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
경기도 개성 부근의 남계원터에 남아 있던 탑으로, 예전에는 이 터가 개국사(開國寺)의 옛터로 알려져
개국사탑으로 불려져 왔으나, 나중에 남계원의 터임이 밝혀져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으로 고쳐지게 되었다.
1915년에 탑의 기단부(基壇部)를 제외한 탑신부(塔身部)만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원 위치에 대한 조사 결과 2층으로 구성된 기단이 출토되어 추가 이전해 석탑 옆에 놓았다가
다시 복원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세워져 있다.
탑은 2단의 기단에 7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얼핏 보면 신라 석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는 듯하나
세부적으로는 양식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먼저 기단은 신라의 일반형 석탑에 비해 아래층 기단이 훨씬 높아졌고, 상대적으로 2층 기단이 약간 낮아져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1개의 돌로 조성하였으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두툼해 보이는 처마가 밋밋한 곡선을 그리다 네 귀퉁이에서 심하게 들려져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3단씩의 받침이 얕게 새겨져 있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과 복발만이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남아있다.
이 탑은 고려 중기 이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탑 전체에 흐르는 웅건한 기풍과 정제된 수법은 신라탑의 영향을 받은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1915년 탑을 옮겨 세울 때, 탑신부에서 두루마리 7개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려 충렬왕 9년(1283)에 탑 속에 넣은 불교경전으로, 이때 탑을 보수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_문화재청)
철제갑옷
위: 금 새날개모양 관꾸미개
경북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 5세기 신라
아래: 고깔모양 관
경북 경주 금관총 출토, 5세기 경주
금동 말띠 꾸미개
경북 경주 황남대총 남분 출토, 5세기 신라
3. 금귀걸이 4. 5. 금드리개 6. 금드리개
경주 보문동 출토, 6세기 신라 경주 황남대총 북분 출토, 5세기 경주 경주 노동동 출토, 5세기 경주
금 귀걸이
경북 경주 금척리, 5세기 신라
연꽃무늬 수막새
경북 경주 월성 출토, 6세기 신라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 신라 진흥황 척경비(국보)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10년 넘게 북한산을 등산할 때 비봉 정상에서 보던 진흥왕 순수비는 복제품이었는데
이제야 진품을 보게 된다.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 복제품 보러 가기
경천사지 십층석탑
경천사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있던 절로, 고려시대 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에 세워져 있었던 이 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무단으로 반출되었던 것을 되돌려 받아
1960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3단으로 된 기단(基壇)은 위에서 보면 아(亞) 자 모양이고, 그 위로 올려진 10층의 높은 탑신(基壇) 역시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 자 모양이었다가, 4층에 이르러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기단과 탑신에는 화려한 조각이 가득 차 있는데, 부처, 보살, 풀꽃무늬 등이 뛰어난 조각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4층부터는 각 몸돌마다 난간을 돌리고, 지붕돌은 옆에서 보아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 형태의
기와골을 표현해 놓는 등 목조건축을 연상케 하는 풍부한 조각들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탑의 1층 몸돌에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새로운 양식의 석탑이 많이 출현했던 고려시대에서도 특수한 형태를 자랑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특이하다.
전체적인 균형과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태로 눈길을 끌며,
지붕돌의 처마가 목조건축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러한 양식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일본으로 반출되면서 훼손되었던 원래의 탑 형태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복원작업을 거쳐
현재 새로 개관한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출처_문화재청)
층계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며 찍은 석탑의 부분적인 모습은 매우 정교하다.
대리석은 화강암과 달리 표면의 경도가 물러 정교하게 가공할 수 있다.
근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대리석이 생산되지 않았다.
1970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작성한 지질조사서를 통해 강원도 정선에 대리석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이렇게 하여 생산된 정선 대리석은 2005년 APEC 정상회의가 열린 부산 누리마루의 바닥과 벽면에 사용되고,
이후 지하철 역사나 호텔 등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정선 대리석은 로마의 건축물이나 예술품 등에 쓰인 순백색이 아니라 회색 등 다양한 색상이다.
하여 순백색이 필요한 예술품에 쓰이지 않고, 대부분 건축자재로 쓰인다.
경천사지의 십층석탑이나 서울 탑골공원의 원각사지 십층석탑도 외국에서 수입한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다.
탑골공원의 십층석탑도 경천사지 십층석탑과 모양이 거의 비슷하다.
청자 참외모양 주전자
고려, 12세기, 1951년 입수, 개성
이 청자는 물이 나오는 끝 부분과 뚜껑, 손잡이 상단에 동화무늬가 깊게 들어가 금 도금한 것처럼 보인다.
청자 오리모양 주전자
고려, 13세기
용상인 의자와 병풍
금동반가사유상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걸치고 고개 숙인 얼굴의 뺨에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대어
깊은 명상에 잠긴 모습의 반가사유상이다.
이러한 상은 원래 석가모니가 태자였을 때 인생의 덧없음을 사유하던 모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에서는 이러한 상을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이라고 하였다.
반가사유상은 이 상과 같이 하나의 독립된 형식으로도 만들어졌다.
입가에 머금은 생기 있는 미소, 살아 숨 쉬는 듯한 얼굴 표정, 부드럽고 유려한 옷주름,
상체와 하체의 완벽한 조화, 손과 발의 섬세하고 미묘한 움직임 등 모든 것이 가
장 이상적으로 표현된 동양불교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일본 고류 사(廣隆寺)의 목조반가사유상과 모습이 비슷하여 영향 관계가 주목되는 상이기도 하다. (안내문)
1936년 7월 27일 그리스의 '이 브라디니' 신문사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 우승자에게 그리스 청동투구를 주겠다는 기사를 냈는데,
이 투구는 독일 고고학자 에른스트 쿠르티우스와 조사단이 1875년에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발굴한 것으로
이후 브라디니 신문사가 투구를 갖게 되었습니다.
투구 안쪽에는 두 개의 동판에 간략한 투구 설명과 함께
'1936년 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의 우승자에게'라는 글귀를 새겨놓아
마라톤 경기의 우승자가 곧 투구의 주인임을 밝혔습니다.
투구는 마라톤 경기의 우승자였던 손기정 선생에게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국제 올림픽 위원회 (IOC)에서 '아마추어 선수에게 메달 이외에 어떠한 기념품도 공식적으로 줄 수 없다'라는
규정을 내세웠으며 손기정 선생도 투구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답니다.
결국 투구는 독일 국가올림픽위원회 (NOC)의 관리하에 베를린에 남았고
2차 세계대전 뒤에는 베를린에 있는 샤를 로텐부르크 박물관에 전시되었습니다.
손기정 선수는 우연히 투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나 그 보관처를 알 수 없었는데
1976년 교포인 노수웅의 노력으로 투구의 소재를 알게 되었고,
'이 투구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며 많은 국민에게 투구를 보여주겠다는 노력의 결실로
198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 50주년 행사에서 손기정 선생에게 투구가 헌정되었습니다.
이듬해 정부는 50년 만에 돌아온 투구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보물'로 지정했습니다.
(안내문)
한강의 선유도 탐방 후 서둘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선다고 점심도 못 먹었다.
제법 배가 고파 카페에 들어섰는 데 이미 케이크는 다 팔리고 없어 차와 초콜릿 과자로 허기를 달랜다.
2층으로 올라가며 본 중국관, 일본관, 동남아관 등의 작품은 별도로 포스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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