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지역별 탐방/전라도·광주

춘향전의 배경이 된 남원 광한루원

by 즐풍 2022. 12. 2.

2022_213

 

 

 

2022.10.22. (토)  오후에 탐방

 

 

오전에 순창 용궐산과 채계산을 둘러보고 곧장 남원 광한루원으로 달려왔다.

채계산 주차장에서 광한루원까지 18km에 불과해 30분도 안 걸리는 짧은 거리다.

광한루에 도착하면서 평생 처음으로 남원이란 땅을 밟는다.

남원은 감명 깊게 읽었던 혼불의 주요 무대라 꼭 방문하고 싶었던 고장이다.

 

「혼불」은 1930년대 후반을 전후로 무너져 가는 남원의 어느 종가를 지키려는 종부와 천민들의 삶,
관혼상제 등을 자세히 묘사하여 민속 백과사전 격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민속학과 우리말의 보고로 칭송받고 있으며, 아름다운 문학의 진수로 평가받기도 한다.

작가는 혼불을 17년간 월간지에 연재하면서 혼기도 놓치고 결국 병으로 사망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남원에서 가장 볼만한 곳은 당연히 광한루원이다.

어린 시절부터 춘향전은 소설이나 판소리, 심지어는 영화까지 수없이 재생산되는 걸 지켜봤다.

춘향전의 드라마틱한 배경이 되는 장소가 바로 광한루이니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광한루를 찾는 데 내비게이션은 광한루원 주차장으로 안내한다.

 

 

 

 

 

□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광한루원

 

1960년대 광한루원 확장사업 이전에 광한루원의 호수 남쪽은 성밖시장인 남원장이었다.

동학의 교주 수운 최제우 선생에게 혹세무민, 사도 난정의 죄목이 걸렸다.

이에 최제우는 1861년 경주에서 피신 차 남원에 들어와 광한루 오작교 주변 서형칠의 약방에 머물다가 

공창윤의 집을 거쳐 교동산성 내 덕밀암으로 옮겨 은적암이란 현판을 걸고 경전 집필과 포교활동을 했다.

이것이 호남에 동학이 전파된 시초다.

서형칠 약방은 광한루원 경내인 완월정 앞 호석 근방으로 추정된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음) 11월 28일 전라좌도 농민군이 민보군에게 남원성을 빼앗기고 물러난 뒤

많은 농민군들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잡혀 처형되었는데, 

대부분의 농민군들이 성밖시장 저잣거리에서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그 위치는 광한루원 정문에서 본 잔디광장 시작 지점 부근이다. (안내문) 

 

 

현재의 정문인 청허부의 위치에는 1970년도 당시에 전북에서 제일 큰 규모의 남원시장(南原市場)과

우시장(牛市場)이 있었으나 화재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

남원군수 채봉채가 매입하여 그 자리에 정문을 세웠다.

당시 완월정의 주변에 있던 정미소를 철거하여 광한루원을 확장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청허부인 외삼문

 

완월정

 

완월정은 겹처마 8작 지붕의 전통적 조선 건축양식이다.

1971년에 신축한 완월정은 광한루를 월궁이 있는 천상계로 간주하고

달나라 풍경을 감상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남원시의 주요 행사인 춘향제를 비롯한 문화행사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영주각

 

용성지의 누정 편에 보면, '전라관찰사 정철이 요천에서 끌어온 물이 누 앞을 좁다랗게 흐르고 있던

개울을 넓혀서 평호로 하고 은하수를 상징케 했으며 주위를 석축으로 하고 호수에 세 개의 섬을 만들어

하나에는 녹죽을 심고, 하나에는 백일홍을 심었으며, 다른 하나에는 연정을 세웠다'라고 한다.

이 문헌에 따르면 영주각은 관찰사 정철이 주도한 광한루 확장 공사 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영주각은 정조 19년(1795)에 부사 이만길이 재건하고 영주각이란 편액을 손수 써서 걸었다고

「증보 남원지」에 기록되어 있다.

1963년부터 경내가 확장, 정화되면서 1965년에 36회 춘향제를 준비하면서 지금과 같은 단청이 되었다.

                                                                                                                           (출처_광한루원)

 

 

 

광한루원은 예전에 관아와 훈련청이 있던 곳이라 정부 관리 아래 있어기에 수목이 비교적 잘 관리되었다.

세월이 지나 이젠 노거수가 많아 이곳을 찾는 방문객에게 청량감을 안겨준다.

도심에 이렇게 멋진 공원을 갖는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능수버들은 나뭇잎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늘어선 모습이 여느 나무와 다르다.

 

연못에 있는 세 개의 섬에서 잘 자라는 나무는 연못 밖 나무와 자연스러운 조화를 보인다.

 

 

 

요즘은 어느 지역이든 광한루원처럼 고전적 여행지엔 이렇게 한복을 대여해 입을 수 있다.

서울 창덕궁이나 수원 화성, 전주 경기전, 남원의 광한루 등에서 이렇게 한복을 대여한다.

이런 관광지에선 외국인도 한복 체험을 하려고 입고 다니는 걸 보면 간편하게 개량 한복으로

세계 시장에 내놓아도 잘 팔리겠단 생각이 든다.

 

광한루원을 방문한 날이 10월 22일인데 벌써 12월에 들어섰으니 오래전 일이다.

이때는 경 단풍이 들기 시작할 때라 아직은 푸른 나뭇잎이 많다.

새순이 돋는 초봄이나 단풍 든 가을이 멋지겠다.

뭐, 낙엽 진 나무에 눈꽃이 펴도 좋겠다. 

 

광한루

 

시인묵객들은 궁궐에는 경회루가 있고, 지방에는 광한루와 더불어 평양의 부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이라 불려지는데 그중 으뜸은 광한루라 했다.

경회루는 궁궐의 건물로 왕실에서 지은 곳이다.

지방의 누각 중 평양의 부벽루는 애석하게도 아직은 가볼 수 없는 곳이고,

진주 촉석루는 안타깝게도 6ㆍ25 때 불에 타 지금의 건물은 1960년 5월경 복원하여 역사가 짧으며, 

밀양의 영남루 역시 1844년에 지어 복원 역사가 길지 않다.

광한루는 1419년에 지어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으나 1626년에 복원하였으니 역사도 깊다.

광한루원은 경복궁 경회루의 지원과 전남 담양군에 있는 양산보가 조성한 소쇄원과 함께

한국의 정원을 대표할 만큼 우수하며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 모체가 되고 있다.

                                                                                                                  (출처_광한루원)

 

 

오작교

 

광한루원 앞에는 동서 100m, 남북 59m에 이르는 정방형의 호수와 호수 속의 3개의 섬(삼신산), 

그리고 서편에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로 구성되어 있다. 

오작교는 평교지만 교각의 형태가 원형으로 된 홍예교로 누정원을 구성하는 구성물의 일부로 처리되었다.

직선적이고 평탄한 노면에 율동감을 주어 경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요소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호수에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을 고이는 돌인 지기석을 넣고 견우가 은하수를 건널 때 쓰는 배인

상한사를 띄워 칠월 칠석의 전설의 은하수와 오작교를 상징한다.

                                                                                                         (출처_광한루원)

 

 

 

이제 막 단풍이 드는 나뭇잎 건너 오작교를 지나는 여성의 한복이 곱게 느껴진다.

이렇게 예쁜 한복을 보면 예전 여성들의 외출은 지금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웠겠단 생각이 든다.

예전의 한복은 지금보다 더 격식을 많이 차리는 복장이라 세시풍습에 따라 입는 옷가지도 많았다.

지금은 드러내는 패션이라면 예전엔 가리면서도 더 여성스러운 자태를 보였을 것이다.

 

이 풍경을 보면 가을에 제대로 단풍이 들었을 때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자라돌

 

방장정

방장정은 건축양식보다는 소박한 멋을 살린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광한루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당했던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었다.

l909년부터 l928년까지는 일제가 누각은 재판소로, 누각 마루 밑은 감옥으로 사용했다.

 

 

 

 

 

 

 

1970년 광한루원 남측 성밖시장 화재를 계기로 토지매입이 대거 진행되면서 광한루원 권역이 확장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곳 시장을 남원읍성 밖에 있는 시장이라고 하여 성밖시장이라고 불렀다.

남원성 고지도를 보면 광한루는 남원성(2011.7.28. 남원읍성으로 변경)의 남문 밖에 위치했다.

성밖시장이 화재가 나자 남원군은 대규모 필지를 매입하여 오늘날 광한루원의 규모를 지니게 되었으며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됨에 따라 그 영역성을 보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래 남원성 고지도로 남원성과 광한루원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다.

 

 

 

 

 

오작교 뒤로 보이는 광한루

 

이 노거수는 광한루원의 가장 오래된 토박이처럼 보인다.

 

가슴 높이의 나무가 이렇게 용트림하며 올라간 걸 보면 이 나무에서 신목의 기운이 느껴진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우리 전전 세대의 굴곡진 아픔을 나무 표피가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이에 더해 625 전쟁 등을 지나며 아픈 역사를 치유하는 가 싶었는데 다시 혼돈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루속히 어둠이 걷히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해야 한다.

 

이 소나무도 제법 품위가 좋다.

 

 

광한루의 앞뒤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 계관(桂觀), ’광한루(廣寒樓)란 편액이 걸려있다. 

호남제일루라는 말 그대로 호남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라는 뜻이며, 

광한과 청허부는 하늘나라 월궁의 옥경에 들어서면 ‘광한 청허지부’가 있다는 신화적 전설을 상징하고,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신궁을 상징한다. 

광한루 누각에 걸린 여러 편액 중 광한루란 편액은 신익성이 호남제일루와 계관의 편액은 1

855년 남원부사 이상억이 누각을 중수하면서 손수 써 걸었다. 

이 중 계관의 편액은 동학란 때 없어진 것을 1930년대 광한루를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남원유지 강대형이 다시 써 건 것이다. 

또한 현재 광한루에 걸린 광한루란 편액은 전 민의원 조정훈이 쓴 글씨라고 하는데 

금암봉의 금수정과 용성관의 편액 글씨도 썼다고 전해온다.

                                                                                                 (출처_광한루원)

 

광한루 곳곳에 있는 건물은 이곳 풍경과 조화롭게 잘 지었지만,

그중에 으뜸은 연못과 오작교, 그리고 노거수의 어름다운 조합이다.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개성을 나타내는 옷차림도 여기선 이런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여러 공적을 기리는 비석 군

 

 

열녀 춘향의 굳은 절개를 기리기 위한 춘향사당이다.

사당의 대문을 단심문이라고 하는데, "임 향한 일편단심"이란 의미다.

단심문 안에 있는 열녀 춘향사는 문이 잠겨 춘향의 영정을 볼 수 없다.

 

열녀춘향사

 

한쪽에서 판소리 경연대회가 열리고 있다.

이곳을 지날 때 초중등부 어린 학생이 나와 창을 읊고 있다.

 

채근담 글귀 하나

 

 

 

충혼불멸비는 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지리산에 은거한 공비를 토벌하며 순국한 민간인과 청년단원 286명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시설이다.

 

 

월매집 안에 마련된 춘향이 방

 

 

 

월매집 밖의 정원 

 

 

 

 

 

 

 

월매집은 옛날 집으로 꾸몄으나 춘향관은 입구만 전통 방식을 뿐 건물은 현대식이다.

잠깐 들어가다 바로 나온다.

 

 

 

남원의 광한루를 찾았으나 이곳을 일종의 정원으로 꾸며 광한루원이란 명칭이 붙었다.

며칠 전 전주의 한옥마을과 경기전을 보며 경기전의 규모에 놀랐는데, 이곳에서 또 놀랐다.

전주는 제법 큰 도시라는 걸 알았지만 남원의 광한루가 이렇게 큰 줄 몰랐다.

작은 나라에 이렇게 멋진 문화와 역사 공간이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