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지역별 탐방/전라도·광주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봉안된 전주 경기전

by 즐풍 2022. 11. 2.

2022_193

 

 

 

2022.10.1 (토) 오전에 잠시 탐방

 

 

전주에 도착해 경기전을 제일 먼저 보려고 했으나 전주 한옥마을에 들어서며 한옥마을부터 탐방했다.

이후 동학혁명 기념관, 최명희 문학관을 거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모셔진 경기전에 도착했다.

역대 조선의 임금을 그린 어전은 6.25 한국전쟁 부산으로 옮겼으나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어 7점만  내려오고 있다.

그 마저도 얼굴을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경우가 많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하는 전각, 경기전

 

1991년 1월 9일 사적 제339호로 지정되었다.

1410년(태종 11)에 임금은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하는 전각을 짓고 어용전(御容殿)이라 하였다. 

경기전은 왕조의 발상지라 여기는 전주에 세운 전각으로, 세종 때 붙인 이름이다.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14년(광해군 6)에 중건하였다. 보호 면적은 49,590㎡이다.

경기전의 경역은 정전(正殿)과 조경묘(肇慶廟)로 나뉜다. 

정전(보물 1578)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국보 317호)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다. 

지대석(地臺石)과 면석(面石) 및 갑석(甲石)을 갖춘 기단 위에 세운 다포계(多包系) 형식의 맞배집으로, 

그 전면 가운데에는 1칸 규모의 기단을 돌출시켜 쌓고 그 위에 첨각(添閣)을 세워 배례청을 시설했다.

마치 능침(陵寢)의 정자각(丁字閣)과 같은 형상이다. 

이 첨각 기단의 3면에 벽돌을 깐 보도를 연결하였다.

정전 북쪽에 있는 조경묘는 태조의 22대 조이며 전주 이 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1771년(영조 47)에 지은 것이다.

이곳에 남아 있는 경기전 조경묘 도형의 그림을 보면 지금은 없어진 전사청(典祀廳)·동재·서재·수복방·제기고 등 

부속건물들과 별전이 따로 있는 광범위한 성역이었다. 

전주시가 관리하고 있다.                                                                                    (출처_전주시청, 문화관광)

 

 

 

 

 

 

□ 전주 경기전 하마비

 

하마비는 누구든지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려야 한다고 적혀 있는 비석으로

조선시대에 궁궐, 종묘, 문묘, 향교 등의 문 앞에 세웠다.

경기전 하마비는 광해군 6년(1614)에 경기전을 고쳐지을 때 처음 세웠고, 철종 7년(1856)에 고쳐서 다시 세웠다.

비석의 앞면에는 '기차개하마 잡인무득입 (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해서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라고 적혀 있다.

하마비는 일반적으로 사각의 받침돌과 비석 몸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경기전 하마비는 사자 혹은 해치 암수 두 마리가 직사각형 받침돌에 세운 비석 몸체를 등으로 떠받치고 있는

보기 드문 형태이며, 말에서 내리도록 안내하는 기능뿐 아니라 경기전을 수호하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출처_안내문)

 

경기전 정문

 

경기전 출입구

 

조선왕조실록 보존 기념비

 

경기전은 오래된 유적지라 노거수가 많아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 예종대왕 태실과 비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태반과 탯줄)를 태항아리에 담아 석실에 묻었는데 이를 태실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조선 8대 임금인 예종의 태를 묻은 태실과 태실비가 있다. 

원래는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 마을 뒷산에 있었다. 

1928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전국에 있는 태실의 태항아리를 서울로 가져가면서 태실들이 훼손되었는데, 

예종의 태실도 이때 훼손되었다. 

이후 태실은 구이초등학교 북쪽으로 옮겼다가, 1970년에 경기전으로 옮겨왔다.

비석은 태실과 함께 옮긴 것으로, 앞면에는 '예종대왕 태실'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선조 11년에 처음 비를 세웠으며,

영조 10년에 다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를 담았던 내 항아리와 자석은 국립 고궁박물관에, 내 항아리를 담은 외항 아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출처_안내문)

 

 

□ 전주 사고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을 기록하였으며,

한 임금이 전왕 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여 이를 실록이라 하고 특별히 설치한 사고에 봉안하여 왔다.

조선왕조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09년(태종 9)부터 1413년(태종 13)까지 4년간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1426년(세종 8)에 정종 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31년(세종 13)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정종·태종의 3조 실록 

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과 1부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2부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므로 1445년(세종 27)에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각 1부씩 분장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춘추관·충주·성주의 3 사고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방화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손홍록, 안의 등이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이안, 사수하였기 때문이다.

전주사고에는 실록 784권 514책 47궤, 기타 전적이 64종 556책 15궤가 봉안되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실록각은 소실되었는데 1991년 이를 복원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호)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문종실록과 단종실록

 

 

□ 전주사고

 

1439년 외사고의 설치가 결정되었으나 1445년 실록 봉안이 이루어질 당시까지 전주에 사고가 건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전주사고에 보관하기 위해 내려보낸 「태조실록」~「태종실록」은 전주성 내의 승의사에 안치되었다.

이후 실록은 1464년 가을에 전주 객사 북쪽에 있는 진남루로 옮겨졌다가 1472년 「세종실록」과

「예종실록」이 완성됨에 따라 전주에 양성지를 봉안사로 파견하고, 이를 계기로 경기전 동편에 실록각을 건립하였다.

이후 실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각 왕대의 실록이 순차적으로 봉안되었다.

전주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각종 서적 총 1,322책이 60개의 궤

(실록 47궤, 기타 13궤)에 보관되고 있었다.  (안내문)

 

 

정조실록과 태종실록

 

 

□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방법

 

조선의 역대 실록은 왕이 승하한 후에 만들어졌다.

신록 편찬은 사관들이 시정기, 사초, 승정원일기 같은 기록들을 모으는 일에서 시작된다.

사관들은 그 자료를 기초로 초초를 작성, 이를 검토 후 중초를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쇄 대본이 되는 정초를 완성한다.

실록이 완성되면 실록 편찬에 사용되는 모든 자료는 기밀 방지를 위해 세초하였다.  (안내문)

 

 

세종대왕 실록

 

 

□ 조선왕조실록 사관과 사초 

 

사관은 전임 사관과 겸임 사관이 있다.

전임 사관은 항상 왕이 곁에서 국정에 관한 모든 일을 기록했고, 겸임 사관은 각 관청에서 사관을 겸임하고 있는 자들로

관련 부서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업무처리 내용을 기록하였다.

전임 사관이 작성하는 사초에는 매일 작성하여 춘추관에 제출한 입시 사초와 비밀 사항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를 기록한 뒤 

집에 보관했다가 실록청이 설치되면 제출하는 가장 사초가 있다.

가장 사초 제도는 비밀을 보장하고 그 내용의 첨삭 등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왕도 사초를 볼 수 없으며, 이를 바탕으로 편찬된 실록도 볼 수 없었다.

실록의 편찬은 역사의 기록이면서 최고 통치자와 위정자들에 대한 견제와 감시였다.  (안내문)

 

 

세조실록 예종실록

 

 

□ 세계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대부터 철종 대까지 총 25대 472 년간 조선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것으로

분량이 888책(1,893권)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책이다.

여기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을 비롯해 천문, 풍속에 이르기까지 조선사회의 제반 모습이 총망라되어 있다.

조선왕조는 실록의 안전한 보존을 위하여 첫 번째 실록인 「태조실록」이 완성된 후부터 실록의 복본을 만들어

춘추관과 지방의 충주, 성주, 전주에 사고를 지어 보관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를 제외한 실록 전체가 화를 당하자 실록을 정족산, 태백산, 묘향산(후에 적상산으로 이동),

오대산의 산간지역에 4개 지방 사고로 짓고 실록을 보관해 왔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기초적 사료이며, 우리나라 인쇄문의 전통과 높은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서로

199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안내문)

 

 

전주사고를 본 후 경기전 전정으로 들어간다.

 

경기전 전정은 조선 왕릉의 정자각과 같은 구조인 T자형 건물이다.

 

정전은 양쪽 끝에 긴 회랑으로 연결된 새로운 형식이다.

 

 

□ 조선 태조어진

 

태조어진은  평상시 집무복인 익선관과 청령포 차림의 전신상이다.

태조는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귀가 아주 컸다고 한다. 

전주는 태조의 본향으로 그 선대들이 살았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1410년(태종 10) 태조어진을 전주에 보관하였으며, 

1872년(고종 9) 구본이 낡아 조중목을 비롯해 10인의 화사가 새로 모사해 경기전에 모셨다. (안내문)

 

 

정전에 모셔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

현존하고 있는 유일한 태조어진 전시하고 있다. 평상시 태조어진 모사본을 전시하고, 진본은 특정 기간에만 공개하고 있다. 

 

 

정전과 회랑

 

경기전의 중심은 정전을 지나 다른 공간으로 들어간다.

 

 

□ 전사청

 

이곳은 국가의 제사에 쓸 제수 준비와 제사상 차리는 일을 담당하는 전사관(나라의 제사를 맡아보는 벼슬아치)이

사무를 행하면서 제사 준비를 하는 곳이다. (안내문)

 

 

 

 

□ 조병청

 

조병청은 떡이나 유밀과(튀겨서 꿀을 바른 약과와 비슷한 과자), 다식(곡물 가루를 꿀에 반죽하여 판에 박아 만든 과자) 등의

제사 음식을 만들고 보관하는 장소이다.

국조오례의(국가와 왕실, 왕과 신하와의 관계 등을 규정하는 제도를 도식으로 엮은 책)에 기록된 진전의 찬실도(제사 음식을

차리는 방법을 그린 그림)에는 중박계(약과), 붉은 산자, 흰 산자, 다식, 과일, 각색 떡, 탕 등을 사용한다고 되어 있다. (안내문)

 

 

□ 용실(舂室)

 

제례에 사용되는 음식을 만드는 용실의 디딜방아다.

참나무로 만든 디딜방아는 얼마나 오래 썼는지 닳고 닳아서 반들반들하다.

이 디딜방아를 나타내는 한자 용舂은 디딜방아 모습 그대로인 상형문자에 가깝다.

절구통을 나타내는 臼(절구 구)는 글자의 균형을 위해 아래에 배치했다.

이 舂 자는 자주 안 쓰다 보니 볼 때마다 늘 새롭게 익혀야 한다. 

 

 

 

담장 밖으로 나오면 어진 박문관이 있으나 보수작업으로 관람할 수 없으니 언젠가 다시 와야 한다.

 

□ 조경묘(肇慶廟)

 

조경(肇慶)은 ‘조선왕조 창업의 경사가 시작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과 시조비 경주 김씨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조선 왕실의 시조 사당이다. 

이한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21대 조이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이안사가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도 의주로 옮겨갈 때까지 

전주 이씨가 대대로 살던 곳이다. 

조경묘는 영조 47년(1771)에 경기전 북쪽에 세워, 영조가 세손(정조)에게 쓰게 한 전주 이씨 시조 내외의 위패를 모셨다.

조경묘는 태조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신 경기전, 이한의 묘역인 조경단, 태조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가 살던 

이목대와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안내문)

 

조경모는 개방되지 않은 곳이라 출입할 수 없다.

 

 

 

경기전은 전주 한옥마을과 가까운 곳이다.

한옥마을에서 한복을 빌려 입은 청춘남녀들이 한창 사진 찍기 놀이에 빠졌다.

젊은 날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이미 본 곳이다.

 

 

 

□ 서재

 

이곳은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어진 집으로 재각(무덤이나 사당 옆의 제사의 소용으로 지은 집)이라고도 하며,

제향(제사)을 맡은 관원들의 재계 의식을 하기 위한 곳이다.

재계 의식은 제사에 임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 신은 맞을 준비를 하는 의식이다. (안내문)

 

□ 제기고

 

재향(제사) 때 사용하는 각종 그릇, 기구 등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제사 때 사용하는 그릇은 일반 그릇과 달리 정갈하고 성스러운 물건이어서 별도의 건물에 보관하여야 하는 것이다.

대개 제기고와 같은 건물은 바닥을 마룻바닥으로 만든다.

마룻바닥은 지면과 분리되어 있어 습기가 차지 않아 기물을 보관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안내문)

 

 

□ 수복청

 

이것은 경기전에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낮은 지금의 벼슬아치들이 있던 곳이다.

살림집의 안채 같은 형식이지만 주로 큰일이 있을 때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일정 기간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다.

「세조실록」  세조 8년 8월 6일조에 의하면 전주 경기전에 수복의 수가 관노(종) 1명,

양민(일반 백성) 18명이 교대로 지켰다고 한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수복청에는 항상 몇 명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전주 경기전은 도심 속에 있는 작은 왕궁같은 느낌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중심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여러 시설은 수라상을 차리는 장소로 생각하기 쉽다.

정전 뒤로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조경묘가 있는가 하면, 어진박물관도 있다.

전주사고까지 있어 어린아이들과 함께 역사 공부하기도 좋다.

뿐만 아니라 오래된 노거수가 많아 이곳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