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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경기 인천

향교의 기능이 사라진 평택 향교

by 즐풍 2022.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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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8.18 (목) 오후에 잠시 탐방

 

 

평택 농성과 내리문화공원 탐방에 이어 귀로에 평택 향교에 들린다.

최근 지역 탐방 후 관광지와 가까운 향교를 더러 다닐 때 대부분 문이 닫힌 걸 알 수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관리가 힘들다는 건 알고 있지만 평택 향교 역시 문이 잠긴 건 마찬가지다.

향교 앞에 있는 향교 교육관에 들어가니 마침 관리자가 있기에 키를 받아 향교를 탐방할 수 있었다.

 

 

 

□ 평택향교 (平澤鄕校)

 

향교(鄕校)는 조선 시대 지방에 세운 공립 교육 기관으로, 중국 춘추 시대의 학자인 공자(孔子, B.C.551년-B.C.479년)와 

여러 성현(聖賢)들의 제사를 지내고, 지방 사람들을 교육하는 곳이다. 

향교는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大成展)과 선현을 모시는 동무ㆍ서무(東廡ㆍ西廡), 학생들의 강학소인 명륜당(明倫堂)과 

그들이 기숙하는 동재ㆍ서재(東齋ㆍ西齋)로 구성되어있다. 그 이외에도 재사(齋祠)를 관장하는 전사청 등이 있다. 

‘평택 향교’는 1413년에 지었고, 1445년에 증설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1637년에 일어난 조선과 청나라의 싸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1797년 복원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잠시 농민학교로 사용되기도 했다. 

평택향교는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外三門) 안쪽에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八(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좌우에는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다. 

명륜당 뒤편 내삼문(內三問) 안쪽에 위치한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이다.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人(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출처_문화재청)

 

 

홍살문 뒤로 보이는 평택 향교

 

향교는 이제 역사적 의무를 다했다.

바쁜 시대에 공자 왈, 맹자 왈 하며 성현의 가르침을 공부할 학생은 없다.

일부 향교엔 교육관이 있어 붓글씨 쓰기나 개인적으로 한자를 공부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평택 향교도 평소엔 문을 잠그고 있어 키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이 작은 연못 주변도 사람이 다니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고 거미줄이 쳐져 들어가기도 애매하다.

동양의 역사는 한자로 기록되어 있으니 한자를 배우는 건 역사 학도나 한문 선생, 한의사 등

특별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았다.

 

향교 뜰에 범부채 꽃이 폈다.

 

향교 앞에 세워진 여러 공적비

 

외삼문은 잠겨 있어 왼쪽 담장에 있는 작은 쪽문을 이용해 들어간다.

 

강학 장소인 명륜당 앞의 오른쪽 동재로 스승이 기거하는 장소다.

 

동재 반대편에 있는 서재로 학생의 기숙사이다.

동재나 서재 모두 군불을 때는 부엌은 북쪽에 두고, 방은 남쪽으로 향했다.

 

강학 장소인 명륜당이다.

이렇게 향교가 있는 지역은 명륜동, 또는 교동이라고 부르는 곳이 많다.

지역 동네 이름이 그렇다면 그 동네는 분명히 향교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 거의 틀리지 않다.

 

정면에서 보는 명륜당의 가운데 세 칸은 창문이다.

날이 좋으면 창문 세 개를 열고, 시원하게 공부할 수 있다.

물론 뒤에도 똑같이 문을 열어 앞뒤로 시원하게 개방감을 높인다.

 

뒤쪽으로 들어와 보는 명륜당 내부의 모습이다.

많은 편액에 작은 글씨가 쓰였으나 읽어본들 내용을 알리 없다.

그저 이런 편액이 세월을 지나는 동안 많은 기록을 남길 만큼 역사가 깊다는 걸 암시할 뿐이다. 

이런 뜻 모를 한자를 보며 세종대왕께서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 내 이를 어여삐 여겨 새로 글자를 만든다."고

하셨으니 훈민정음 덕분에 키보드 시대에 가장 특화된 한글을 쓸 수 있게 되어 감사드린다. 

 

천정은 서까래가 다 드러나도록 건물을 지워 시원한 개방감은 있으나 단열이 부족한 느낌이다.

 

외삼문 공간엔 명륜당이 들어서며 강학 공간이라면 내삼문은 공자와 여러 선현을 기리는 장소이다.

 

 

 

 

대성전은 명륜당 뒤편 내삼문 안쪽에 있으며 그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이곳에서는 공자(孔子)·맹자(孟子)를 비롯한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는데, 

해방 후 1949년의 유도회의 규정에 따라 5성 위, 송나라 2현, 우리나라 18현을 모시고 있다.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제향을 지낸다.

사무실에서 키를 받았으나 대성전 키는 키 뭉치에 없어 문틈 사이로 보니 서 계신 공자상 그림만 보인다. 

 

내삼문과 대성전 사이 양쪽에 400년이 되었다는 향나무가 한 그루씩 고고하게 서 있다.

 

향교에서 은행나무와 향나무를 심는 이유는 벌레가 먹지 않은 은행나무나 향나무처럼 

선비들이 부정부패에 물들지 말고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뜻이라고 한다. 

향교에는 이런 이유로 향나무와 은행나무를 심었다.

 

 

 

안에서 보는 내삼문

 

대성전 서쪽엔 제법  수형이 좋은 배롱나무가 있다.

이젠 꽃이 거의 다 진 상태다.

 

 

사무실에서 향교를 볼 수 있도록 키를 내주어 간단하게 둘러보았다.

시대의 변화로 향교의 교육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의 기능과 지방문화 센터의 기능만 남아 있다.

이젠 붓글씨조차 배우려는 사람이 줄어드는 추세라 어느 순간 향교는 문화 유적으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동양의 유교 사상이 점점 사라지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풍조를 쫓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