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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경기 인천

미완으로 남겨둔 평성읍 객사

by 즐풍 2022. 8. 21.

 

 

 

2022.8.18 (목) 오후에 문 밖에서만 봄

 

 

 

평택 향교 인근에 팽성읍 객사로 이동한다.

주차 공간이 마땅치 않아 팽성읍 행정복지센터에 주차하고 객사로 도착하니 앞마당은 공사 중이고,

팽성읍 객사는 문이 잠겼다.

일하는 사람들이 객사 문 열쇄를 가졌을 리 없다고 생각해 팽성읍 행정팀 청사 담당에게 문 좀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담당이 시청 담당자 전화번호를 알려주기에 통화했더니 지금 공사 중인 책임자에게 키가 있다고 한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공사하는 사람에게 물어봤으면 좋았겠단 생각을 하며 다시 객사로 이동했다.

객사 앞 공사를 하던 사람들은 오늘 일정이 끝났는지 그새 모두 떠나고 없다.

나중에 시청 직원에게 키를 받아 다시 걸음을 해야 한다.

밖에서 보이는 대로 사진 한 장만 찍고 쓸쓸히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팽성읍 객사 (彭城邑客舍)

 

팽성읍 객사는 조선시대 팽성현의 객사이다. 

객사는 고을에 설치했던 관아로, 관리나 사신이 숙소로 사용하거나, 고을 수령이 망궐례*를 행했던 시설이다.

팽성읍 객사는 망궐례가 행해지는 건물인 정청을 중심으로 숙소로 사용되는 익사*가 양 옆에 있다. 

정청은 좌우의 익사보다 높게 지어졌으며 지붕 위 용마루의 양 끝에는 용 모양의 장식 기와가 올려져 있다. 

이는 관아로서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으로, 맞은편 대문의 지붕 용마루에도 놓여있다.

이 객사는 성종 19년(1488)에 지어졌으며, 그 후로 두 차례의 수리를 거쳤다. 

일제강점기에는 양조장으로 사용되다가 주택으로 바뀌었으며, 1994년 해체·수리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는 대문간채와 본채가 남아 있다.

본채는 전체 9칸으로 가운데 3칸은 중대청이고 양 옆에 동·서헌이 각각 3칸씩 있다. 

중대청은 안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관리들이 한 달에 두 번 절을 하던 곳이다. 

이곳은 지붕도 동·서헌보다 높여 건물의 격식을 높였다. 

동·서헌은 다른 지방에서 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로 사용되었다. 

중대청과 대문의 지붕 꼭대기 양끝에는 용머리 조각을 놓아 관리청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냈다.
팽성읍 객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객사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망궐례: 직접 궁궐에 나아가서 왕을 뵙지 못할 때 멀리서 궁궐을 바라보고 행하는 예.

익사: 주건물 좌우에 붙어 있는 부속 건물.

                                                                                                                               (출처_문화재청)

 

 

 

팽성읍 행정복지센터

 

 

팽성읍 사무소 앞에 있는 350년 된 향나무다.

예전엔 팽성현 관아가 있던 건물이었겠으나 지금은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오른쪽 기와 담장은 경찰서 지구대가 들어섰고, 그 옆이 팽성읍 객사가 있다.

팽성읍 사무소와 경찰서, 객사까지 그리 넓은 면적은 아니다.

관아 건물은 사라지고 객사 하나가 옛 영화를 말해준다.

 

팽성읍 사무소를 나와 경찰서 지구대 앞을 지나면 이내 팽성읍 객사를 만난다.

객사 앞에 홍살문이 있다는 게 재미있다.

 

객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밖에서 사진만 찍고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객사 건물 밖에 있는 것으로 동헌의 일부일 거란 안내문이 있다.

요즘 말로 현관을 중심으로 양 옆에 세 칸과 네 칸짜리 집무실이 보인다.

 

 

평택 농성을 본 김에 내리문화공원과 평택 향교에 이어 방문한 팽성읍 객사다.

이발하고 오후에 들렸어도 서로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므로 네 군데를 들렸다만,

팽성읍 객사는 키를 수배하지 못해 다음 기회로 미룬다.

미완의 비망록으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