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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충청도·대전·세종

백제의 미소로 잘 알려진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by 즐풍 2022. 3. 11.

 

2022_27

 

 

2022.3.6 (일) 오전에 잠시 탐방

 

 

당진에서 서산으로 넘어올 때 안국사지 석탑과 마애불상을 찾아갔다.

석탑은 4층까지 남아 있으나 몸돌은 1층만 있어 다소 아쉬웠다.

바로 윗단에 모셔진 마애불상은 본존불 양 옆으로 보살상이 함께 계신다.

푸른 하늘 아래 흰색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과 마애불상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서산으로 넘어오면 꼭 봐야 할 곳으로 용현리에 있는 마애여래삼존상을 꼽는다.

통일신라의 불국사와 석굴암이 석조 문화의 극치라면 백제문화에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다.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마애여래삼존상은 우리나라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한다.

당진 안국사지에서 넘어오는 길은 낮은 구릉에 목초지를 조성해 목장이 넓게 펼쳐지며 반갑게 맞아준다.

 

 

 

 

□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여 형성되었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천의를 걸치지 않은 상체는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여래삼존상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출처_문화재청)

 

 

용현집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조금만 오르면 관리사무실을 만난다.

관리사무실에서 마애여래삼존상으로 가려면 작은 쪽문인 불이문을 나서야 한다.

관리사무실과 불이문이 있는 걸로 보아 전에 작은 암자였던 것을 지자체에서 관리 편의상 수용했겠단 생각이 든다.

 

이 불이문을 통과하면 마애삼존불을 만나게 된다.

 

언젠가 오전에 왔을 때도 위쪽에 살짝 그늘이 졌었다.

오늘도 그늘이 지면 어쩌나 싶었는데, 우협시 보살입상만 조금 빛이 들었을 뿐이다.

지금 공식 명칭은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이지만,

흔히 쓰이는 서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더 마음에 닿는다.

 

빛이 삼존불을 다 비출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며 하나씩 확대해 찍어본다.

본존 여래입상의 얼굴과 광배 부분이다.

1965년 마애삼존불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목조 보호각을 설치하였으나 균열이 발생하는 문제가 생겼다.

여러 민원 발생으로 2007년 보호각을 철거하고, 2009년 암반 균열부를 보존 처리했다고 한다.

 

협시보살의 얼굴과 광배 

 

이번엔 좌협시 반가사유상이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본다.

 

10여 분 지나자 처음 왔을 때보다 햇빛이 더 들어왔다.

나무 그림자가 본존불과 우협시 보살입상 사이로 파고든다.

 

본존불 우측, 본존불 입장에서 보면 좌측에 있다고 하여 좌협시 반가사유상이라고 한다.

반은 연꽃 좌대에 앉아 생각하는 모양이란 뜻이다.

 

 

 

이번엔 본존불 위주로 사진을 담아본다.

통으로 걸친 가사는 U자 모양의 무늬를 여러 개 밑으로 내렸고, 가사 밑으로 발가락이 드러났다.

 

좌협시 보살상 위쪽 광배와 아래 왼쪽에서 가사를 거쳐 발가락까지 길게 틈이 벌어졌다.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아야겠다.

마애여래삼존상 양 옆의 좌협시, 우협시의 협시(挾侍)는 "윗사람이나 주인을 좌우에서 가까이 모신다"는 뜻이다.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해 찾아보았다.

 

좌협시 반가사유상은 양팔 모두 훼손되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태안 동문리 마애여래삼존상,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과 함께 

백제 불교미술의 양식을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본 상은 중국의 6세기 북제 및 남조 양(梁)의 영향을 엿보이고 있고 

6세기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태안과 예산의 상보다는 후대에 제작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한다.

 

내려오면서 보는 마애여래삼존상이 있는 바위 전체를 담았다.

위로 큰 바위가 우산 역할을 해 빗물을 받아낸다.

아래 정면에 보이는 바위의 홈의 전에 보호각을 세울 때 기둥을 박은 자리다.

 

철거되기 전의 보호각

 

 

하산하며 관리사무소 앞에 있는 안내문을 다시 읽는다.

 

 

앞으로도 서산에 갈 기회가 있으면 늘 이곳을 찾을 것이다.

이런 세기의 명작을 관람료도 없이 볼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조그만 사찰도 문화재 명목으로 국민의 호주머니를 터는 문제를 최근 어느 국회의원이 제기했다가 큰 곤욕을 치렀다.

이번 기회에 국민의 민의를 대변한 정청래 국회의원님께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