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_26
2022.3.6 (일) 오후에 탐방
서산 해미읍성을 둘러볼 계획을 세울 때 주변에 갈만한 곳이 있는지 지도를 검색했다.
약 700m 지점에 해미순교성지가 있다는 걸 알고 방문하기로 한다.
집을 나서며 아이패드와 당진시청에서 발행한 당진 안내책, 탐방할 장소를 적은 메모지를 지참한다는 걸 잊었다.
짧은 하루 동안 방문할 곳이 많지 않아 대부분 기억나지만 딸에게 전화해 메모지를 찍어 보내라고 했다.
해미읍성 탐방을 끝내고 당진 신리성지로 넘어가려는 순간 카톡으로 받아 든 메모지에 해미순교성지가 있다.
그 순간 아~ 해미순교성지가 있었지 하고 실소를 날리며 내비를 찍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제 겨우 이순을 넘긴 게 엊그제인데, 이렇게 자주 깜박깜박한다.
그러니 나이가 들수록 메모가 중요하다는 걸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순간이다.
□ 해미국제성지
해미 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백 년의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해미는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당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이 박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 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 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한 명씩 처형하는 데 지친 관헌은 1866년 병인년에서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아무 데나 땅을 파고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버리는 참혹한 행위가 수없이 되풀이됐다.
이렇게 스러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132명의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으나
그나마도 불확실하고 나머지는 이름 석 자 하나 남기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다.
이들이 숨져 간 유적지는 현재 깨끗하게 단장돼 있다.
"예수 마리아"를 부르는 교우들의 기도 소리를 '여수 머리'라 알아듣던 주민들의 입을 통해
'여숫골'이라는 지명으로 전해오고 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 읍성에는 교우들이 갇혀 있던 감옥터가 있고
그 옆에는 고문대로 쓰던 호야나무가 남아 있다.
이 나무 위에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이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서문 밖 순교지에는 1956년에 서산 성당으로 이전, 보존되었던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에 원위치를 찾아 보존되다가 2009년 1월에 여숫골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1935년에는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돼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돼 있었는데 최근 1995년 순교자 대축일에 원래의 순교 터인 생매장 순교지 순교탑 앞으로 이장됐다.
해미 성지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성지는 한티 고개이다.
이 고개는 당시 죽음의 길로 악명 높던 순교자들의 압송로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도 그 기록이 나온다.
외길이지만 압송로 표지 리본이 눈에 잘 띄게 달려 있어 별 어려움 없이 순례할 수 있다.
해미 성지는 교통이 사통팔달(四通八達)로 시원스레 뚫려 있어
다소 거리는 멀지만 당일이나 1박 2일로 순례하기는 안성맞춤이다.
인근에는 수덕사로 유명한 덕산 도립 공원과 가야산, 덕산 온천, 태안 해안 국립공원
그리고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볼 수 있는 안면도 등이 자리하고 있어
주말 가족 순례 코스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출처_해미국제성지 홈피)
해미순교성지 표지석을 세울 때 관리자가 제법 나이가 많은 성직자였나 보다.
즐풍은 어렵게 않게 읽을 수 있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겠다.
성지와 국제성지란?
성지(순례지)는 많은 신자들이 교구 직권자의 승인 아래 특별한 신심 때문에
빈번히 순례하는 성당이나 그 밖의 거룩한 장소를 뜻합니다.(제1230조)
교회법전이 말하는 것처럼(제1231조, 제1232조 참고),
성지의 종류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교구장이 승인하는 교구 성지
둘째, 주교회의가 승인하는 국가 성지
셋째, 교황청이 승인하는 국제 성지가 그것입니다.
2020년 11월 29일 대림 제1주일에 ‘해미순교성지’가 교황청이 승인한 '국제 성지'로 선포되었습니다.
(출처_해미국제성지)
대성당
망루와 사제관
등대만큼이나 높게 솟은 망루가 특이하다.
천주교 박해로 많은 교도가 스러져간 이곳에 구천을 맴돌 망자를 위로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벽면 수행을 위한 공간이라도 되는 걸까?
□ 천주교 박해의 역사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 해미에서는 인언민(마르티노)과 이보현(프란치스코)이 순교하였고,
1811~1839년의 기해박해 이전에는 김진후(비오)가 1814년에 옥사한 것을 비롯하여 모두 8명이 순교하였다.
또 1866년 이후의 병인박해기에는 122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이처럼 해미의 유명 순교자는 모두 132명에 이르는데, 여기에 무명 순교자 47명 이상의 수를 더하면,
기록으로 확인되는 박해기의 순교자 총수는 179명 이상이 된다.
한편 해미 순교자들의 순교 형식은 교회 순교록을 통해서만 67명이 확인되는데,
그중에서 교수형이 33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참수와 옥사가 각각 5명, 병사가 4명,
생매장이 3명, 장사가 3명, 미상이 14명으로 나타난다.
해미읍성 안의 진영 동헌 앞은 순교자들이 갖은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 한 장소가 되며,
읍성의 옥은 신앙 증거 장소요 중요한 순교 터가 된다.
또 서문 밖의 교수형(혹은 참수형) 터와 문 마리아, 박 요한, 방 마리아 등이 생매장으로 순교한
조산리의 생매장(교수형 포함) 터도 교회사는 물론 지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해미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생매장 순교 터와 그 순교자의 유해가 확인 발굴되고
보존되어 왔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유박해 [辛酉迫害]
1801년(순조 1) 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때문에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 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서교(西敎)를 엄금·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이 박해로 이승훈·이가환·정약용 등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 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기해박해 [己亥迫害]
1839년(헌종 5)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박해사건,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에서는 시파(時派)인 안동 김 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僻派) 풍양 조 씨가 일으킨 것이다.
1834년(헌종 즉위년) 헌종이 8세에 즉위하자 순조의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하였으며,
왕대비를 적극 보필한 사람은 그 오빠 김유근(金?根)이었다.
1836년부터 병으로 말조차 못 하던 그는, 1839년 유진길(劉進吉)의 권유를 받고 세례까지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 김 씨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유근의 은퇴로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변하였다.
형조판서 조병현(趙秉鉉)으로부터 그동안의 천주교 전파 상황을 보고받은 그는 1839년 3월 입궐하여,
천주교인은 무부무군(無父無君)으로 역적이니 근절하여야 한다는 천주교에 대한 대책을 상소하였다.
이어 사헌부 집의 정기화(鄭琦和)도 천주교의 근절을 위하여 그 원흉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따라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인은 43명이었으며,
그중 대부분이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남명혁(南明赫)·박희순(朴喜順) 등 9명은 끝내 불복, 사형되었다.
5월 25일에는 대왕대비의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내렸으며,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정하상(丁夏祥)·유진길·조신철(趙信喆) 등 중요인물이 붙잡혔으며,
당시 주교 앵베르는 교인이 고초 받는 것을 막기 위하여 모방과 샤스탕에게도 자현(自現)할 것을 권고한
쪽지를 보내고 자현함으로써, 조선 교회 재건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정하상은 척사윤음에 대하여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올려 천주교를 변호하였다.
조정에서는 6월에는 이광열(李光烈) 이하 8명을, 8월에는 앵베르·모방과 샤스탕을 군문효수(軍門梟首)하고,
정하상과 유진길도 참형에 처하였다.
이때 피해를 입은 교도수는 《헌종실록》에 따르면, 배교하여 석방된 자가 48명, 옥사한 자 1명,
사형된 자가 118명 등이었다.
그러나 현석문(玄錫文)이 쓴 《기해일기》에 따르면, 참수된 자가 54명이고,
교수형 장하(杖下)에 죽은 자· 병사한 자가 6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세도가문은 안동 김 씨에서 풍양 조 씨 가문으로 옮겨졌다.
병인박해 [丙寅迫害]
조선 후기 대원군이 가톨릭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
이 사건의 원인(遠因)은 당시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1864년(고종 1)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교도들은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불·영 3국 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당시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러시아인의 월경과 통상 요구가 시일이 경과하여
한낱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을 때였다.
그리하여 3국 동맹이 체결되면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선교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들은 지둔(遲鈍)과 무책임한 주선(周旋)의 발설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톨릭교를 서학(西學)·사학(邪學)이라 하여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天主學) 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대비(趙大妃) 이하 정부 대관들이 가톨릭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가톨릭교도를 탄압하기로 결심하였다.
1866년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산속에 피신하여 쫓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려 죽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출처_해미국제성지)
해미순교성지 기념관으로 들어가니 먼저 포승줄에 묶여 이동하는 가톨릭교도들의 행렬이 보인다.
처형되는 장면을 여러 부문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
선교사 입국 없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유일한 조선이란 나라다.
당시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하며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는
지배계층에게는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당시 세도가는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며 자리를 더욱 확고히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뿔나팔
옛 충남 대덕군 기성면 오리 공소에서 종 대신 사용하던 것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신부가 만들었다고 한다.
기증자: 백성수 신부
순교 자리개 돌
해미읍성 서문 밖 수구 위에 놓여 있던 돌다리로서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자리개질로 처형했던 사형 도구이다.
그동안 서문 밖 순교지에 보존했으나 해미 도시계획 도로개설로 인하여 2009년 1월 8일에 생매장 순교성지(여숫골)로
옮겨 보존 중이며, 그곳에는 모조품으로 꾸며져 있다. (안내문)
진둠벙(죄인둔벙)
팔을 묶여 끌려오던 신자들을 거꾸로 떨어뜨려서 이 둔벙 속에 처박혀 죽게 하였다. (안내문)
우측 십자가를 든 사람은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갓을 쓴 사람은 복자 김진후 비오
무릎 꿇은 사람은 복자 이보현 프란치스코
2014년 8월 16일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시복 하신 해미 순교자 3위 복자상
지상의 인간 세계가 어떻든 하늘에선 그들의 주인인 새가 평화롭게 비행한다.
한국 천주교회의 특징
한국은 선교사 없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유일한 나라이며,
1784년 평신도만으로 구성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약 100년 동안 가해진 박해시기 초기, 한국교회의 신앙인들은 박해를 피해 산속에서
소규모의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교황 프란치스코의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의 정신을 이미 실천하며
살았던 분들이며 순교를 통하여 신앙을 증언하였다.
(출처_해미국제성지)
해미 국제성지 순례길의 탁월성
해미 국제성지 순례길은 순교자들의 탄생지와 순교지·무덤·복음 전파 장소가 어울려 길을 이루었다.
19세기부터 현재까지 신자들의 순례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문 이후로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순례자 수가 증가하고 있다.
해미 국제성지 순례길 중 신앙적 가치가 탁월한 장소는 사제가 상주하며(해미, 솔뫼성지, 합덕본당, 신리성지,
공세리 본당, 덕산본당, 고덕본당 등) 순례자를 위한 다양한 성사의 은총을 제공하고 있다.
성지의 여건에 따라 매년 정기적으로 대규모의 도보 성지순례, 성체거동, 매 주일 성체강복,
매일 미사와 고해성사가 거행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 이후 도로의 명칭이 '프란치스코 교황로'가 된 곳도 있으며,
이로 인해 순례길이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천주교 신앙 유산의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여 문화재로 지정하는 한편,
순례자의 안전과 편의를 위한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대전교구와 협력하여, 내포지역 순례길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출처_해미국제성지)
성모 마리아 뒤에 걸린 걸개그림은 스러져간 많은 신자가 꽃으로 피어나는 형상이다.
종교의 특성상 순교란 희생 없이 교세가 확장되기는 어렵나 보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지금 해미성지는 세계적인 순교 성지로 거듭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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