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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이천 설봉산 등산과 설봉산성 탐방

by 즐풍 2022. 2. 17.

2022-13

 

 

2022.2.16 (수) 09:40~12:37 (2시간 56분 탐방(설봉공원 포함) 7.5km)  아침 최저 -11℃, 낮 최고 -5℃

 

 

진작부터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과 신륵사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두 군데 모두 거의 30여 년 전 이천에 살 때 다녀온 곳이나 다시 가고 싶었다.

지하철로 검색하니 여주역까지 2시간 54분 걸리는 데, 운 좋게 급행을 타면 10~20분 단축된다.

게다가 두 번 환승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이매역에서 경강역으로 갈아타야 하는 데, 종점인 여주역까지 가는 전철은 20분을 기다려야 한다.

10분 앞서 부발행까지 가는 전철로 이천역에서 내려 마지막 순서인 설봉산을 먼저 타기로 한다.

 

입춘을 지나 우수를 목전에 두었으나 꽃샘추위가 닥쳐 오지게 춥다.

추운 만큼 미세먼지는 보통 수준인 녹색에서 하루 종일 좋음 상태인 청색으로 표시된 날이다.

푸른 하늘이 그리워 추위를 감행하고 나서며 뒤늦은 동장군에 맞서는 여행길이다.

설봉공원에 들어서며 비로소 하루 일정을 시작한다.

이천에 살 땐 길 건너 아파트에 살며 출근 전 설봉공원의 저수지를 한두 바퀴씩 조깅하기도 했다.

설봉공원에 들어서며 옛 추억이 하나둘 소환된다.

 

 

□ 설봉산

설봉산은 이천의 진산이다. 

삼국시대 격전장의 역사를 담은 설봉산성, 이천의 성현을 모신 설봉서원, 불교문화의 산실 영월암, 

시민의 안식처 설봉공원 등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이천의 아이콘이다. 
해발 394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이천시민들에게는 정체성을 심어주는 상징적 산이다. 

식생 밀도가 높아 녹색댐 효과가 크며, 화강암 풍화토로 지하수 정화능력이 뛰어나 약수터가 발달하였다. 
설봉산 정상에서 여주 방향을 내려다보면 낮은 저산성 평지가 끝없이 펼쳐지는데 

이 지형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발달한 저위평탄면 지형이다.

 

설봉산은 역사적으로 백제·고구려·신라가 격전을 벌였던 기록을 담고 있다.
설봉산성은 세 곳으로 칼바위 주변을 두른 성이 주성이고,

정상과 장암리 쪽으로 뻗은 봉우리를 두른 성이 부성이다.

성의 형태는 봉우리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이다.

이천은 고대로부터 동서남북 교통의 요충지였다.

넓고개를 넘어온 도로의 한 줄기가 송정동 쪽으로 뻗고,

다른 줄기는 기치미고개를 통과하는데 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설봉산성이다.

장대지와 칼바위 쪽은 높으며 신둔 방향으로 낮아지는 산성의 지형은 천혜의 관측 기지였다.

다만 용인 방향이 설봉산 정상 봉우리로 막혀 관측이 어려운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상부에 부성 2개를 쌓고 주성과 능선으로 연결하였다.  

설봉산성은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4세기 후반 백제에 의해 축성된 석성으로 판명되었다.

백제시대 석성이 삼국 중 가장 늦은 6세기 후반에 나타난다는 기존의 학설을 깨는 중요한 사료로 인정되고 있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이 최고조인 장수왕 때에는 고구려의 요새로 이용되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을 위한 북진 때는 신라의 중요한 군사기지 역할을 하였다.  

칼바위 주변 장대지 아래에서 8 각형 석축이 발견되었는데, 건물터라기보다는 제단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에서 제사 유적이 발견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로 상당한 격이 있는 산성에서만 발견된다.

신라는 한때 이천에 정·군사적으로 중요한 남천주와 남천정을 설치하였는데 

그와 연계하여 설봉산성의 제사유적을 해석해 볼 수도 있다.

현재는 이 8각 석축에 사직단 간판이 붙어 있다.


설봉산은 화강암 산지로 모래의 공급이 많다. 

1968년 설봉호수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설봉산에서 흘러온 하천 주변으로 넓은 모래사장이 발달하였는데 

이곳이 ‘마전터’이다.

많은 아낙네들이 이곳에 모여 빨래를 하고 모래사장에 빨래를 펼쳐 건조한 데서 연유한 지명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조선시대 대규모 줄다리기가 매년 진행된 기록이 전해온다. 

1921년 3월 20일 자『동아일보』에 보면 ‘육천 명의 대해희'라는 제목으로 

당시 이천 읍내에서 행해진 줄다리기를 소개하고 있다.

줄다리기에 직접 참여한 인원이 6,000여 명이요, 구경꾼의 수가 3만여 명에 달하였을 뿐 아니라 

줄다리기에 사용한 줄의 길이가 800여 m이고,

줄의 두께가 60㎝라고 하였으니 그 규모에 놀랄 뿐이다.

신문에서 줄다리기 중 죽은 사람이 3명에 사상자가 9명이었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당시의 줄다리기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이 간다.

드넓은 백사장에 약 3만 6,000여 명이 모여 줄다리기를 하는 장면은 

오늘날 올림픽 개폐회식에서나 볼 수 있는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대규모의 이천 줄다리기는 1921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볼 수 없는 놀이가 되었다. 

3·1 운동에 겁먹은 일제는 한꺼번에 수만 명이 운집하는 줄다리기 놀이가 

자칫 항일 저항운동으로 번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금지시켰던 것이다.

                                                                                              (출처_이천시청)

 

 

 

 

등산로 입구에 하마비와 설봉서원 유허비가 있다.

유허비 내용을 보면 이천 부사 정현이 미란다호텔 열 안흥지 주변에 향현사를 창건한 게

경기도 내 효시였다고 한다.

선조 때 이곳으로 옮기며 설봉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이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다.

 

설봉저수지 

 

이천에 살 때만 해도 등산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어 나지막한 설봉산을 오르지 않았다.

한껏 간다는 게 목우 따라 어느 약수터까지 간 게 전부다.

이제야 설봉산에 발을 디딘다.

 

좀 더 위로 가면 호암 약수 입구란 표시가 보인다.

어쩌면 이 바위가 호랑이 바위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호암 약수 입구 

 

□ 설봉산성

설봉산성(雪峯山城])은 경기도 이천시 사음동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사적 제423호에 지정되었다. 

부학산성, 무학산성, 관고리성이라고도 부른다. 

계곡을 감싸면서 쌓아진 포곡식 산성으로 설봉산의 7~8부 능선 칼바위를 중심으로 3만여 평의 고원지대에 있다. 

이천시, 장호원, 양평, 안성 등 주변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본성과 관측용 부성 2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벽 대부분은 흙으로 되어있지만 군데군데 돌로 쌓은 석축도 보인다. 

그러나 석축은 거의 무너졌거나 매몰된 상태다. 

백제시대, 고구려 점령기를 거쳐 삼국 후반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및 삼국통일 때 요충지였던 곳이다. 

또한 토기 제작이 활발해 백제, 신라, 통일신라의 토기문화 흔적들이 뒤섞여 나타나는 곳이기도 하다. 

설봉산성 서문이 있던 자리 원토층에서는 백제의 토기들이, 점토층에서는 신라의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어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은 시기의 백제에 쌓아져 신라시대 때 보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산성 곳곳에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평기와, 토기, 자기, 석제류, 철제류 등이 출토되었다. 

그 외에도 건물터임을 알 수 있는 인공 주춧돌과 장대지, 제사 터, 군기를 꽂았던 바위 등이 발견됐다. 

설봉산은 이천의 진산으로, 이 산의 7~8부 능선, 속칭 칼바위를 중심으로 한 

약 3만 여평에 달하는 고원지대가 바로 옛 산성터이다. 

이 일대에서는 석축, 석편, 토기편은 물론 정면 9m, 측면 6.30m의 건물터임을 알리는 

인공의 주춧돌 9개가 정연히 배치되어 있어, 이곳이 웅장한 규모의 삼국시대 산성지임을 알려준다.

                                                                                                           (출처_이천시청)

 

 

처음 지을 때의 성벽은 흔적도 없고, 지금은 이렇게 복원된 성벽이 눈길을 끈다.

 

땅덩어리 좁은 나라도 예전에 서로 뺏고 뺏기기 일쑤였나 보다.

작은 부족 국가가 땅을 넓히며 점차 고대국가로 넘어가는 과정에 전쟁은 필수로 자리한다. 

 

설봉산성 출입구

 

성화봉 입구 

 

성화봉 터

 

 

 

사직단에 누군가 등산 스틱과 배낭을 제물로 놓았다.

 

새 천년 탑

새로운 2천 년이 시작되며 이천시는 같은 이름 때문에 세간의 많은 이목을 받았다.

그때 세운 탑이다.

 

 

□ 남장대지

 

장대는 장수의 지휘소이다.

보통 장대는 전투 시 군사 지휘가 편리하고 산성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에 세웠다.

남장대지는 설봉산성에서 가장 높아 산성 전체가 내려다 보여서 군사 지휘가 편리한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초석 15기가 노출되어 있다.

초석의 배치로 보아 남장대의 규모는 정면 5간, 측면 2간으로 동성 14.3m 남북 5.7m로 추정된다.

발굴 조사 시 담장, 온돌 등의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건물은 누각 형태로

사방이 트여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통일신라 말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한다.

                                                                                                (안내문) 

남장대지의 초석이 보인다.

 

설봉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이 고개를 중심으로 산성이 복원되어 규모가 조금 작다는 생각이 든다.

 

산성 마지막 구간 

 

 

 

 

 

연자봉 

 

설봉산 정상 표지석

 

설봉산 정상은 희망봉이란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설봉산은 낮은 산인 데다 특별히 볼 게 없다는 생각에 더 진행할 생각이 없다.

마침 아래쪽에 제법 멋들어진 바위가 보여 내려갔더니 영월암과 만난다.

영월암은 별도로 포스팅한다.

 

영월암에서 큰길 따라 바로 내려가지 않고, 앞에 있는 고개를 넘어가니 삼형제바위 뒷면이 보인다.

삼형제바위에 올라가 사방은 조망한다.

 

 

□ 설봉산 삼형제바위

 

설봉산 등산로 입구에서 15분 정도 오르면 산 중턱에 나란히 서있는 커다란 세 개의 바위를 볼 수 있다.

설봉산 삼형제바위라고 부르며 이천 9경 중 제3경에 지정되어 있다.

세 개의 바위는 나란히 모여 있는 형태로 효성 지극한 삼 형제의 슬픈 전설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가난한 집에 우애와 효심이 깊은 삼 형제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어느 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간 삼 형제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 어머니가 산으로 갔다.

집에 들어간 삼형제가 다시 산으로 가 어머니를 찾던 중 호랑이에게 쫓기고 있는 어머니를 보고 놀라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동시에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는데,

그 순간 삼 형제가 세 덩어리의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로는 홀어머니를 모시던 삼형제가 3년 동안 병사로 가게 되자

어머니가 아들들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3년을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뒤늦게 돌아온 삼형제가 어머니의 무덤가에 엎드려 오래도록 울다가 세 덩어리의 바위로 남겨졌다는 것이다.

                                                                                                       (출처_이천시청)

 

당겨본 삼 형제바위

 

 

삼 형제바위를 끝으로 사실산 설봉산 산행을 마친다.

이어서 설봉서원, 충혼탑, 설봉공원의 여러 풍경은 별도로 올릴 예정이다.

짧은 산행에 설봉공원까지 볼거리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