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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조선 세종 때 만들었다는 당진 면천읍성 탐방

by 즐풍 2022. 3. 8.

2022_23

 

 

2022.3.6 (일) 오전에 잠시 탐방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면천읍성과 신리성지를 중심으로 당진 버그내길을 탐방할 생각이었다.

당진이 비교적 가까워 자차로 이동하는 김에 새벽에 출발해 서산 해미읍성까지 폭넓게 살필 생각이다.

당진 왜목마을과 장고항의 촛대바위를 보고 두 번째 목적지인 면천읍성에 도착했다.

최근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읍성과 산성 탐방의 일환인 것이다.

 

 

 

□ 당진 면천읍성

 

면천읍성은 1439년, 세종 21년에 관아와 행정 소재지를 왜침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평지에 쌓은 평지 읍성으로 

천주교 박해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투가 치러지는 등 역사적 사건의 주요 무대이다.
2007년부터 대규모 복원이 진행되어 현재 남문과 옹성, 장청 등이 복원되었으며, 

읍성 안에는 1,100살이 된 은행나무 2 그루가 있다. 

고려 복지겸 장군이 병으로 누워있을 때 복지겸 장군 딸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아미산의 진달래꽃과 안샘물로 술을 빚어 100일 후에 마시고 집 앞에 은행나무를 심어

정성을 들이면 나을 것 이라고 해서 산신령의 말대로 했더니 복지겸의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깃든 나무이다. 

마을 사람들은 면천은행나무를 신목으로 여겨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목신제를 지내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 551호로 지정된 은행나무이다. 

은행나무 아래에 군자정을 지나면 연암 박지원이 직접 설계해지었다는 건곤일초정과 

봄에는 벛꽃이 여름에는 연꽃이 절경인 골정지가 있다.
그리고, 작가들의 전시공간과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며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체험공간으로 조성된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오래된 미래’ 책방, 수제 공예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진달래 상회’ 잡화점으로 이어지는 레트로 거리가 조성되어 있어 추억여행을 즐기기에 좋다. 

또한 매년 4월에는 국가무형문화재인 면천 두견주와 진달래 관련 문화유적, 민속놀이, 음식 등을 

소재로 한 면천 진달래 민속축제가 펼쳐진다.

                                                                                                             (출처_당진시청)

 

 

 

□ 풍락루(豊樂樓)

 

풍락루는 지금은 사라진 면천관의 문루였던 누각으로 정확한 기록이 없어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원래는 반월루라 했으나 1852년 당시 면천군수였던 이관영이 중수한 후 '풍락루라 이른 지어 현판을 걸고

풍락루기를 남겼다고 한다.

풍락루라 한 것은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살기 좋은 땅에서 백성과 더불어 평안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노후되어 붕괴될 위험이 있어 1943년 철거하였다가 2007년 철거 전의 사진 자료를 토대로

2층 누각 형식의 팔작지붕 건물로 복원하였다. (안내문)

 

 

풍락루 옆 주차공간에 주차하고 반 시계방향으로 면천읍성을 돈다.

먼저, 안쪽 성벽 위로 올라가 천천히 살펴본다.

면천읍성은 지금 밟고 있는 이곳이 처음 세종 때 축성한 그대로 남아 있다.

구간은 오른쪽으로 치성이 드러난 곳을 지나 전봇대 두 대 사이로 길이 난 곳까지이다. 

 

면천읍성은 조선 초기에 만든 읍성으로 인구가 적을 때 지어 규모가 작다.

지금은 면천면 소재지와 접해 있으나 규모가 작아 중심에서 벗어났다.

그래도 성 안에 주민이 살아 성 밖과 연결하기 위해 이렇게 곳곳이 뚫려 원형을 많이 잃었다.

 

세종 때 만든 면천읍성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구간의 끄트머리

 

최근 복원된 구간

 

최근 복원된 구간의 치성에서 보는 성벽 외관이다.

 

우리나라 3대 읍성인 순천의 낙안읍성, 서산 해미읍성, 고창의 고창읍성은 원형이 잘 유지되고 있다.

서산과 가까운 당진의 면천읍성은 규모가 작고 18세기 이후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후 읍성이 헐리며 군데군데 출입구가 생긴 걸 최근 점차 복원하고 있다.

 

 

 

 

2014년에 복원했다는 면천읍성 남문

 

면천읍성 남문은 이렇게 밖으로 빙 둘러 옹성을 쌓아 성안으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좋은 구조로 만들었다.

 

성 밖으로 빠지는 배수로

 

남문 옹성 위의 성벽 구조는 밖으로 활을 쏠 수 있는 총안이 중간중간 마련되어 있다.

안쪽에도 드물게 설치했다.

 

원기루

 

읍성은 산성과 달리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조선 초기에 쌓은 면천읍성의 성벽은 자연석을 다듬어 축조한 것이다.

저수지 공사 등의 사업에서 이곳의 돌을 빼다 써서 유실된 부분을 현재 점차 복원 중이다. 

 

성안의 민가와 복원되고 있는 옛 건물들

 

남문을 지나 동문 방향으로 복원된 지역과 휀스 뒤로 또 복원 중인 구간

 

뒤돌아 본 남문

 

복원 구간의 옛 건물

 

동문 방향으로 복원되는 구간에도 오른쪽으로 치성이 돌출되어 있다.

 

 

 

 

 

마지막 구간에서 성 밖으로 나와 처음 탐방이 시작된 서문까지 둘러볼 것이다.

 

남문을 둘러싼 옹성 입구

 

남문인 원기루 입구에서 원형의 옹성을 바라본다.

 

길 건너편에서 보는 남문 옹성

 

남문 옆 치성

 

예전 성돌과 최근 복원한 성돌이 다소 색깔 차이가 난다.

 

조선 초기에 쌓은 원형이 그대로 남은 서쪽 구간의 성벽

 

서쪽 성벽과 남쪽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서벽의 경우 높이가 3.6m 정도이다.

서벽의 안쪽 부분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비탈지게 쌓았으며 바닥의 폭이 6.8m, 윗면의 너비가 2.4m이다.

 

성벽을 쌓는 데 사용되었던 돌에 ‘기미년(己未年)’이라고 새긴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성을 세종 21년에 쌓았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이 해가 기미년으로 돌에 새긴 기미년은 성을 쌓은 연대를 새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면천읍성 성돌에 새겨진 각각의 의미

 

 

서벽을 밖에서 둘러보고 있는데, 건너편 식당 앞에 주차된 차량 짐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지나가던 차량이 클랙슨을 울려 식당에서 나온 사람이 소화기를 뿌려 화재를 잡는 듯 보인다.

 

소화기가 금세 끝나자 불은 다시 시작돼 수돗물을 연결해 불을 꺼 보지만 물줄기가 불길을 잡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어느새 소방차가 도착해 바로 불길을 잡았다.  

그새 경찰까지 도착해 화재 경위를 조사한다.

하마터면 차량이 전소될 뻔한 위험한 순간이었다.

 

 

면천읍성은 당진의병 전투지이기도 한다.

당진의병이 1906년 5월 10일 일본군 수비대 및 관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당진 의병의 면천성 공격을 이끈 의병장 최구현은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관직을 사퇴했다.

1906년 4월 당진에서 의병을 일으켜 5월 10일 면천읍성을 공격했지만,

일본군 신식 무기에 막혀 물러났다.

최구현은 면천성 전투 후 36명의 의병을 이끌고 당진 소난지도에 들어가 재기를 도모하다가 

8월 24일 일본군에 붙잡혀 희생되었다.

                                                                     (안내문)

 

 

 

면천읍성에 객사를 복원하는 현장 

 

1,100년 되었다는 은행나무 2그루가 옛날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듯하다.

 

 

 

 

 

궁금했던 면천읍성을 보며 일제에 의해 일부 철거된 성벽이 저수지 둑으로 사용된 아픈 현장이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읍성이 을사늑약 이후 의병장 최구현에 공교롭게도 일본군과 싸운 현장이기도 하다.

턱없이 미약한 무기로 최신식 일본군과 죽음을 불사하고 싸운 의병의 기개가 놀랍다.

이런 선조의 살신성인 정신으로 오늘날 우리가 평화롭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