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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충주 남산-충주산성(남산성)-마즈막재-계명산 산행

by 즐풍 2022. 2. 11.

2022-12

 

 

2022.2.9 (수)  10:40~17:41 (7시간 산행, 1시간 휴식, 14.3km 이동, 평속 2.3km/h)  구름과 미세먼지 살짝 

 

 

큰딸이 산후조리를 위해 집에 오자 즐풍은 외손자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생김새나 잠자는 모습이 예뻐 마냥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세상에 천사가 존재한다면 분명 아의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딸이 결혼 전에는 그렇게 깔끔 떨더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변을 받아내기까지 한다.

 

설 명절(2.1 화)이 지나고 여태 산행이나 여행을 다니지 못했다.

내일은 사둔 어른이 손자를 보러 오신다니 오늘 잠깐 가까운 산에 가기로 한다.

충주까지 바로 가는 기차가 없어 조치원에서 환승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충주 남산 입구까지 가는 버스를 어물쩍거리다 놓쳐 택시로 이동했다.

 

설이 지나 실질적인 2022년 임인년 호랑이 해를 맞아 앞으로의 산행이나 여행 목표를 새로 설정해야겠다.

호시우행[虎視牛行]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고려의 지눌 스님의 부도에 적힌 글귀로서 「호랑이의 눈빛을 간직한 채 소 걸음으로 간다」는 뜻이다.

산행과 여행할 때 호랑이처럼 예리하게 관찰하려면 소 걸음으로 느긋하게 걸어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산행은 사실 많은 것을 알고, 보기 위해 더 멀리 걷는 데 주안점을 뒀다.

그러다 보니 한정된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빨리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호시우행 하며 즐풍의 닉 그대로 비가 오거나 세찬 바람이 불어도 산행할 만큼 열정을 가져야 한다. 

임인년 벽두에 첫 산행을 시작하며 갖는 앞으로 산행과 여행에서 가져야 할 다짐이다.

 

 

충주 남산~계명산 등산 코스

 

 

□ 충주 남산

남산은 높이가 636m로 충북 충주시 안림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충주시내 동남 편에 위치한 산으로

일명 금봉산이라고도 한다.

마즈막재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 위치한 계명산과 마치 형제처럼 마주하고 있다.

이 산 남쪽 기슭에는 신라시대 때 창건하였다는 창룡사를 비롯하여,

시내 쪽 기슭에는 각종 체육시설 약수터가 있어 충주시민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산으로

충주사과의 주생산지가 넓게 퍼져 있다. (충주시청)

 

 

 

 

등산로와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범바위다.

이정표가 없어 특별히 관심 갖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곳에 있다.

 

삼성전자 서비스센터에서 내렸을 때 가장 먼저 이 범바위가 눈에 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충주 남산 등산로를 탈피해 범바위(호암) 오거리에 있는 남산 1봉으로 올라야

범바위를 만날 수 있다.

등산로 입구에 있는 안내문 외에 범바위에 대한 이정표나 별도의 안내문은 없다.

큰길에서 위치를 미리 봐 뒀기에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이 범바위를 받치는 바위는 가려져 그렇지 족히 7~8m 높이로 거대하다. 

 

남산은 충주의 중심인 남한강과 달천 일대에서 보면 남쪽에 자리한다.

대두분 남향으로 집을 짓기에 바로 보이므로 앞산인 셈이다.

하여 남산은 앞산이란 의미도 갖는다.

남산을 다 오를 때까지 숲이 우거져 거의 조망은 없다.

드디어 남산 정상인 충주산성 서문터까지 올라왔다.

삼성전자 서비스센터에서 남산 1, 2봉을 거쳐 정상까지 3.8km로 95분인 한 시간 반 걸렸다.

 

서문터에 올라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바로 위에 남산 표지석이 있을지도 모를 만큼 평이하다.

다행히 70m 전에 배지 지급 알람이 울리는 바람에 정상이란 걸 알았다.

 

조금 더 위에서 바라본 충주산성 서문터

요즘 산성이나 읍성에 좀 더 관심을 갖다 보니 좀 더 돌아보기로 한다.

정상에서 서문터를 바라보며 왼쪽으로 가면 남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북문이 나온다.

통상 계명산까지 연계한다면 북문을 거쳐야 하는데, 일단 남문으로 방향을 튼다.

 

□ 충주산성

충주산성은 충주시 안림동 산 56-1과 직동 산 24-1 및 목벌동 산 54에 걸쳐 있으며,

남산성 또는 금봉산성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성은 외축 내착형이며 산 정상을 이어 쌓은 퇴뫼식 산성이다.

축성 재료는 석재를 고루 쌓아 전형적인 고식을 보인다.

성 둘레는 83년 충주시 조사에 의하면 1,145m이며, 중간중간이 무너지고 5개소에 775m의 성곽이 남아 있다.

성안의 넓이는 46,524㎡이고, 성벽의 높이는 7 ~ 8m에 이른다.

성안에는 우물 자리 2개는 현재 물은 나지 않으며, 동서의 산 능선상에 문지가 있고 동쪽으로 수구가 있다.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 편 및 기와 쪽이 발견되었다.


충주산성은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몽고병을 물리친 곳으로 추정되며,

고려 고종 40년(1253) 9월 몽고가 제4차 침입을 감행하여 충주산성을 공격하자 충주 창정, 최수가

매복한 금당협에서 몽고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포위당한지 70여 일에 군량이 다하고 사기가 저하되자 방호별감 승장 김윤후가

전군과 관노까지 격려하며 사력을 다해 싸워 적을 격퇴하였다.

다음 해 2월에 김윤후를 감문위섭상장군으로 삼았고 4월에는 충주를 승격하여 국원경으로 하였다.

1254년 9월에는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갑자기 비가 오고 바람이 불 뿐 아니라

성안의 고려인이 열심히 싸우자 차례로 물러갔다.

몽고의 침입을 받아 전 국토가 유린되었으나 충주산성은 끝내 수호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마고선녀가 7일 만에 축성하였다고 하며,

백제 개로왕 21년(475)에 축성하여 적을 방어하였다고도 한다.

개로왕이 바로 이 성 북쪽에 있는 안림동에 도읍을 옮기려 하였다는 설과 일치하고 있음에 주목된다.

1977년에 무너진 곳의 일부를 보수하였고,

1986년도에 지방 예산을 투입 충주공업전문대학 박물관 팀에 의해 발굴 조사하였다.

                                                                                                                            (충주시청)

 

남문으로 가는 길의 성벽은 되게 높다는 생각을 갖기에 충분하다.

높이가 보통 5~6m가 실히 넘는다.

 

남문터를 말없이 지키는 노송

 

현문식 남문과 노송

 

충주산성의 서문, 남문, 북문에는 현문식 구조라고 안내하고 있다.

현문식[懸門式] 구조는 사다리를 이용하여 출입하는 다락문 형태의 구조를 말한다.

남문터 의자에서 간단하게 식사한 후 동문으로 내려가지 않고 다시 서문터로 향한다.

동문 방향을 보니 그늘이 져 눈길인 데다 낙차로 인해 성벽이 보이지 않아 포기한다.

 

되돌아가는 길에 보는 잔디밭 위는 제법 넓은 공간이다.

 

잔디밭인 이곳은 지척인 남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인데, 

몇 개 판석이 깔린 것을 보면 예전에 군사용 누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안내문이 없어 짐작만 할 뿐이다.

 

남문에서 서문까지 성벽의 절반 정도는 무너졌다.

드러난 성벽을 보면 안쪽까지 약 1m 정도를 돌로 쌓아 견고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성벽을 쌓는데 많은 돌이 필요해 근방의 돌은 물론 부족한 경우 바위까지 쪼갰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문터를 지나 북문터로 가는 방향의 성벽이다.

서문터에서 남문터까지 무너진 성벽이 많고 나머지 구간은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언젠가 복원된 구간도 있겠으나 그 흔적을 찾기 어려울 만큼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북문터를 지키는 노송

 

태초에 그러니까 이 성벽을 처음 만들 때부터 이 자리를 지켰을 소나무일 것이다.

당시에도 제법 큰 소나무라 베어지지 않고 이 자리를 지키며 성황당 구실을 하는 나무로 보호받았겠다.

따로 안내문이 없어 보호수로 지정받았는지 알 수 없다.

세월을 더하며 충주산성의 가치를 드높일 멋진 소나무이다.

 

계명산으로 가는 길은 이 북문을 통과해야 한다.

여기서 동문까지 다녀온 후 이 문을 통해 다음 여정으로 진행한다.

 

 

 

북문 끝에서 멀리 월악산 영봉을 불러온다.

가까운 곳은 시야가 좋으나 먼 곳은 미세먼지로 조망이 별로다.

 

왼쪽 제일 높은 봉우리는 주봉산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북문 방향과 좀 전에 본 멋쟁이 소나무

 

눈 내린 지 며칠 지났지만 여전히 응달에는 눈이 많다.

등산화를 타고 올라는 눈이 등산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한동안 차가움이 계속된다.

타이트한 바짓단으로 등산화를 덮었으나 어느 순간 벗겨진 틈새를 눈이 게릴라처럼 치고 들어온 것이다.

 

당겨 본 소나무

 

 

 

동문터로 내려가기 전 자연적인 둔덕이 치성[雉城] 역할을 한다. 

 

성벽 아래로 임도가 있어 산책하기도 좋다.

 

아래쪽 동문에서 한참 전에 본 남문터까지 300m 거리다.

남문에서 보이지 않던 성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쪽 성벽도 6~7m 정도로 제법 높아 전시엔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을 만큼 훌륭하다.

 

복원된 동문터

복원되었다고 하나 이곳의 석재가 흰색인 화강암이 아니고 검은색 돌이라 표가 나지 않는다.

원래부터 있던 성벽으로 깜박 속기 쉽다.

 

동문터를 지나 남문으로 가는 길이다.

특별히 동문에서 남산성 우물터까지만 이렇게 성벽을 길 위에 허벅지 높이까지 쌓았다.

 

남문터로 오르는 막바지 길

 

복원한 남산성 우물이다.

처음 충주산성을 돌 때 산 위에 있는 퇴뫼식 산성이라 식수를 어떻게 처리했을지 궁금했다.

우물터를 복원하였고, 하나의 우물이 더 있다고 하니 식수 문제의 궁금증이 해결됐다.

충주산성은 남산에 있기에 남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마고 선녀가 7일 만에 쌓았다고 하여 마고성이라고도 불린다.

하나의 성에 세 개의 이름이 있으니 그만큼 인기가 많은 산성인 셈이다.

 

남산성 우물을 너무 티 나게 현대식으로 복원한 게 흠이다.

 

우물터까지 보고 북문터로 되돌아간다.

 

동문터를 지나는 성곽

 

동문터도 반원 모양의 U자 현문식으로 복원했다.

제법 높이가 있어 애초에도 이런 형식이었다면 성문을 지키기 가장 좋은 곳이었겠다.

 

 

 

북문터로 가는 길

 

북문터 오름에서 뒤돌아 본 동문 방향의 성곽이다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라더니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전국에서 많은 산성을 만날 수 있다.

 

북문을 지나 마즈막재로 내려가면 잠시 후 계명산을 만나게 된다.

 

마즈막재로 내려가는 길에 방송사에서 송수신하는 통신탑을 만난다.

멀리서 볼 때 멋진 전망대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통신탑이란 걸 알고 계면쩍었다.

 

 

마즈막재에서 만나는 무공수공자공적비이다.

아직은 길 안쪽이라 남산 자락에 있다.

 

□ 충주 무공수훈자 공적비 우리 고장 현충시설 선정


충북북부보훈지청(지청장 윤형중)이 ‘10월 우리 고장 현충시설’로 충주시 마즈막재 정상에 위치한 

‘충주시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선정했다고 17일 밝혔다.
공적비는 나라를 지키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 희생한 무공수훈자와 보국수훈자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지난 2011년 8월에 건립했다.
충주시는 오랜 세월 노후·훼손됨에 따라 2019년 사업비 1억 원(국비 2천만 원, 시비 8천만 원)을 지원받아 

높이 4.8m, 넓이 121㎡로 재 건립했다.
탑신의 4면에는 동서남북을 대표하는 독도, 백령도, 한라산, 백두산 사진을 새겨 넣고 

공적비와의 거리를 표시했고 중앙에는 무공수훈자회 상징 마크를 부착, 

한반도의 중심 도시인 충주의 의미를 부각했다. 

공적비에는 ‘스마트 펜스’ 시스템을 도입, 실시간 영상 촬영, 전송, 위험 동작 인식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한편,

이를 통해 실시간 파악 가능한 현충시설 관리 개선에 앞장서고 있다.
                                                                                          [출처_충청매일 박연수 기자 2021.10.17]

 

마즈막재는 충주호수로와 안림로가 만나는 삼거리이다.

옛날에 단양, 청풍, 수산 및 경상, 강원 일부 지방의 죄수를 충주 감영으로 이송할 때 

이 고개를 넘으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마즈막재가 되었다는 애처로운 전설이 있다고...

 

 

마즈막재 도로를 지나 계명산을 오르자면 있는 대몽항쟁 전승기념탑은 마즈막재 주차장에서 보일만큼 가깝다.

계명산을 오르는 관문인 셈이다.

 

 

□ 부조벽 전문

예로부터 우리는 끊이지 않은 외세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나라를 지키며

민족의 자주성과 전통을 지켜온 민족이다.

13세기 몽고제국의 집요한 침략전쟁에 대하여 고려가 치열한 항전을 벌였을 때.

이곳 충주는 가장 대표적인 싸움터였다.

1231년부터 약 30년 동안 역사 기록에 남겨진 것만 아홉 번의 커다란 싸움이 이곳 충주에서,

충주 사람들에 의하여 치러졌다.

충주성, 충주산성, 금당협, 다인철소, 대원령, 월악산성, 박달재 등은 당시의 전투지역이다.

이렇게 치열한 항전이 가능했던 것은 충주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함께

이 지역 사람들의 투철한 자주 민족의식과 애향정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8백 년 전 이 땅의 선조들이 치렀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억하고, 나라와 향토를 사랑했던

위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충주 시민의 뜻을 모아 이 탑을 세운다.

 

1253년 몽고군은 다섯 번째로 고려를 침략하여, 충주산성 공격에 나서게 된다.
산성에는 침략군을 피하여 들어간 이 지역의 관리, 군병, 농민, 승려, 노비 등이 함께 있었고,

방호별감 김윤후는 이들을 지휘하여 몽고군의 대공세에 맞서게 된다.

공방전이 석 달째 장기전으로 접어들자 성안에는 식량조차 바닥이 나면서 위기는 목전에 당도하였다.

그때 김윤후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외쳤다.
“만일 힘을 다해 적을 막는다면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벼슬을 내리겠소”
성안의 사람들은 아래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사력을 다하여 싸웠다.

견디지 못한 몽고군은 포위를 풀고 고려 땅에서 철수하였다.

싸움이 끝나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약속대로 신분에 관계없이 관직이 내려졌다.
이때 충주는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는데,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한 충주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던 것이다.

 

 

 

□ 김윤후

 

고려 후기 충주산성 방호별감을 역임한 무신이자 승려이다.

그는 용인 백현원(白峴院)의 승려로 1232년(고종 19) 몽골병이 침입해 오자 처인성(處仁城)]으로 피란하여

성민들을 지휘하였다.

이때 처인성의 주위를 지나던 몽골 원수 살리타이[撒禮塔]를 활로 쏘아 죽여 몽골군을 퇴각시켰다.

이 전과로 인해 고종이 김윤후를 상장군으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공을 타인에게 양보하고 관직을 사양하였다.

이에, 관직을 낮춰 섭랑장(攝郞將)으로 임명하자 그때서야 관직을 받아들였다.

1253년(고종 40)년 10월 김윤후는 충주산성 방호별감 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이때 야굴이 이끈 몽골의 대군이 쳐들어 오자 그는 70여 일 동안 몽골의 대군을 맞아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하여 적을 물리쳤다.

김윤후는 식량이 떨어져 위태롭게 되자, “만일 힘을 다하여 싸우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관작을 제수할 것이니 그대들은 의심하지 말라.”하고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이어서 관노의 노비 문서를 불사르고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 주니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워 몽골군을 물리쳤다.

조정에서는 그 공을 높이 평가하여 김윤후를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에 임명하였고,

그밖에 전공을 세운 자들은 관노, 백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작이 제수되었다.

조정에서는 충주산성 전투의 공로로 충주를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시켰다.  (충주시청)

 

 

계명산 오르는 길에 만나는 돌무더기 사이로 길을 냈다.

마즈막재는 남산과 계명산을 가르는 고개인 만큼 두 산은 한 몸처럼 보아도 무방하다.

마즈막재가 일종의 안부인 셈이다.

두 산이 같은 시기에 태어났을 테니 토질이나 바위의 암질도 같겠다.

주변에 이렇게 돌이 있어 충주산성을 쌓기 쉬웠겠단 생각이 든다.

 

계명산도 남산과 다를 바 없이 숲이 우거져 조망은 별로 없다.

 

 

 

계명산도 남산처럼 숲이 무성해 오르는 동안 조망은 별로 없다.

거의 정상을 지척에 두고 헬기장이 마련됐다.

 

물에 잠긴 충주호

 

 

□ 충주 계명산

계명산은 충북 충주시 안림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774m로 충주시내 동북 편에 위치한 산이다.

산세도 절경이지만 산 위에 올라 충주호를 굽어 보는 경관이 아름다운 산이다.

마즈막재를 가운데 두고 동북쪽에 계명산이, 남동쪽에는 남산(636m)이 충주시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그 운치를 더 해주며 시내에서 가깝기 때문에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토질이 비옥하고 일조환경이 좋아 이 산기슭에서 생산되는 사과는 우수한 품질로 인정을 받고 있다.

                                                                                                                        (충주시청)

 

많은 등산객이 계명산 하산 종점을 충주댐 휴게소로 잡는다.

즐풍은 대중교통 이용 편의를 위해 시내 방향인 연수주공 4,5단지 아파트를 날머리로 잡았다.

하산 코스는 제법 가파르게 걸어야 돼 불편한 느낌이다.

제법 턱이 진 능선에 작은 샛길이 보여 거리를 단축시키겠다고 질러서 내려간다.

이곳도 경사가 급하긴 마찬가지인데 참나무 낙엽이 많아 낙엽을 밟으면 미끄러지며 넘어지기 쉽다. 

거리를 제법 많이 단축시켰으나 충주대원고등학교 앞 정류장에서 검색한 버스 간격이 너무 길다.

좀 더 걸어 시내까지 내려가 택시로 충주역에 도착했다.

 

하산 구간에는 「보건의료인국가시험 출제센터」와 「한국자활연수원」 등의 제법 큰 건물이 보인다.

 

산행을 끝내고 충주역 인근의 탄금대를 다녀올 생각이었으나 산행 시간이 길어져 틈이 나지 않았다.

남산은 충주산성 하나만 본다고 해도 충분히 산행할 가치가 있다.

연계한 계명산은 「대몽항쟁 전승기념탑」을 지나며 이 지역이 원나라와 9번 전쟁을 치렀던 지역이란 걸 알았다.

전부 다 이겼다는 기록은 없으나 대몽항전의 중심에서 끝까지 잘 싸우며 많은 희생을 치른 지역이다. 

하산 지점을 시내 방향을 잡는 바람에 못 본 충주댐 방향의 산세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