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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홍성의 옛 지명을 딴 홍주읍성 너무 멋져

by 즐풍 2022.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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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6 (일) 오후에 탐방

 

 

수없이 보던 북한산성, 어쩌다 가게 되는 남한산성이나 수원 화성, 강화도 정족산성은 수도권에 있는 산성이다.

임금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몽진했을 때의 상황을 고려한 산성이니 당연하다 싶었다.

서산의 해미읍성과 순천의 낙안읍성을 만나며 점차 산성과 읍성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난가을 고창의 고창읍성과 무장읍성을 둘러보며 읍성의 아름다움에 빠졌다.

이후 경기도 오산의 독산성과 청주의 상당산성을 다녀왔다.

내친김에 수원 팔달산을 둘러싼 수원화성까지 탐방했으니 산행하며 느끼는 산성의 매력은 덤이다.

 

그러는 사이 해가 바뀌었다.

산행지를 선택할 때마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전철이나 기차로 다닐 수 있는 산행지를 찾아야 한다.

마침 서울신문에서 소개한 홍성의 홍주읍성이 눈에 띈다.

KTX로 한 시간 10분 거리로 너무 멀지 않아 여행하기 딱 좋은 거리다.

먼저 읍내에서 제일 가까운 백월산을 양념으로 다녀온 후 홍주읍성 탐방을 시작한다.

 

 

먼저 다녀온 백월산 바로보기 

 

충남 홍성 여행에 백월산은 덤이야

2022_04 2022.1.16 (일) 09:00~11:08 (2시간 8분 산행, 5.1km 이동) 맑음 산행을 시작한 이후 여가활동은 오직 산행에 올인했다. 주말마다 계속된 산행은 어쩌다 한 번이라도 빠지면 휴가를 내서라도 산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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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의 홍주읍성

 

서해의 관문이자 홍주목의 치소를 둘러쌓은 홍주성은 1,772m에 달하였으나 

현재는 남쪽의 810m 성벽만 남아있다. 

홍주목의 36동에 이르렀던 관아 건물이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 여하정만 남아 있다.
홍주성이 정확히 언제 축성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발굴조사 결과 홍주성역사관 뒤편 토성이 나말여초에 축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 초기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석성으로 쌓은 이후 몇 차례의 중축을 거쳤고,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

임진왜란, 이몽학의 난, 동학농민항쟁, 천주교 박해 등 산 역사의 현장이며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한 민종식, 이세영 등이 홍주의병을 이끌고 전투를 벌인 곳이다.

충청도 4목 가운데 하나인 홍주목의 동헌인 안회당과 1896년 홍주목사 이승우가 건립하였다.

홍주목사들이 정사를 구상하며 휴식을 취하였던 곳으로 정각은 6 각형의 수상정인 여하정이 있다.  

홍성군청 안뜰에는 보우국사가 왕사가 된 것을 기념으로 심었다고 전해지는 느티나무와

홍주 관아의 외삼문인 홍주아문이 있다.

                                                                                                   (출처_홍성군청)

 

 

백월산과 홍주읍성 등 탐방 코스

 

 

백월산은 두 시간 남짓하게 짧게 끝내고 홍성읍으로 들어간다.

홍성읍에서 이쪽 백월산 입구까지 버스는 하루 두 차례밖에 운행을 안 해 시내까지 걷기로 한다.

홍성군은 2021년 12월 말 인구가 99,500명이니 군에서도 시 승격을 위해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홍주 종합경기장 전경

 

□ 홍성군의 유래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운주(運州)로 불리다가 1012년(고려 현종 3)에 홍주(洪州)로 이름을 바꾸었다.

1018년부터 지주사(知州事)를 두어 다스리다가 1371년(공양왕 20)에 목(牧)으로 승격되어 목사가 다스렸다.

조선시대의 홍주목은 북으로는 경기도 평택 이남에서 남으로는 충남 서천까지 관할하는 행정의 중심이었다.

1914년 일제는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홍주군과 결성군을 합쳐 홍성군으로 개칭했다.

이는 만해 한용운 선생, 백야 김좌진 장군, 홍주의병 등과 같이 홍주에서 많은 항일운동가들이

나온 것이 홍주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홍주의 기(氣)를 말살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안내문)

 

 

후배들이 근무하는 홍성세무서가 홍성읍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드디어 홍주읍성에 도착한다.

이제부터 홍주읍성을 눈여겨보게 된다.

 

 

□ 한용운과 김좌진

한용운(1879~1944)은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일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926년 88편으로 된 '님의 침묵' 시집을 발간하였고, 한국불교의 개혁 방안을 제시한 '조선불교 유신론'을 썼다.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구 심우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좌진(1889~1930)은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였으며, 논밭을 소작인에게 나눠주었다.

1907년 호명학교를 세웠으며 1917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20년 10월 만주 청산리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안내문)

 

왼쪽 한용운, 오른쪽 김좌진 장군

 

홍주읍성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토성 형태로 축조되었다가 세월이 가며 석성으로 변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성은 조선 문종 1년인 1451년에 고쳐 쌓고,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는 홍주읍성의 성곽은 조밀하게 잘 쌓은 것이다.

 

직선이던 성벽이 이곳에선 큰 반원을 그리며 성을 돌아간다.

 

 

 

지금까지 보아온 대부분의 문루는 성벽을 가로지르는 돌판을 얹고 그 위에 문루를 쌓는 형식이었다. 

홍주읍성 남문에 해당하는 홍화문은 고증을 거쳐 개거식으로 성문을 쌓고 문루를 설치했다.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 수원화성은 성문을 둥근 형태인 홍예문으로 만들고 문루를 세워 한층 더 아름답다.

아래 청주의 상당산성 미호문은 성벽 위로 긴 돌을 가로지른 평거식 성문에 문루를 올린 형식이다.

위 홍주읍성의 남문인 홍화문 같이 정면 4칸인데도 규모를 크게 만들 수 있어 뚜렷하게 구별된다.

 

 

홍주읍성에서도 서울 동대문이나 남대문처럼 무지개 모양의 석축을 쌓은 홍예문에 문루를 올린 조양문이 있다.

조양문을 연결하는 성벽은 이곳의 홍성읍의 중심지로 상점과 도로가 생기며 모두 없어졌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서문과 북문을 없애고 이곳 동문인 조양문까지 없애려 했다.

내포에서 가장 상징적인 조양문 철거 소식에 홍성군민들이 들고일어나 끝내 지킬 수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조양문 홍예문 안쪽 천장에 새겨진 용무늬

 

이 조양문은 순서상 마지막에 있어야 하나 홍화문의 개거식 문루와 비교하기 위해 위로 올린 것이다.

조양문은 앞뒤가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앞뒤가 똑같은 조양문....

 

 

공덕비 

 

읍성 안에서 보는 홍화문

 

 

□ 병오항일의병기념비

 

1906(병오년)년 병오항일의병의 일어났을 당시 홍주성을 탈환하여 지키고 있던 의병을 공격하다

관군과 일본군의 일부가 죽었다.

이때 죽은 일본군을 위하여 1907년 김윤식이 시를 짓고 이완용이 글씨를 써서 이를 애도한다는

의미에서 애도지비를 세웠다.

해방이 되자 애도지비를 철거하여 땅에 묻고 그 자리에 다시 병오항일의병기념비를 세웠다.

홍성군에서는 이 주변을 홍주의병공원으로 지정하여 항일의병을 추모 하고 있다.

1978년 홍성에 진도 5.0의 큰 지진이 일어났고 그 지진의 진앙지가 홍주의병공원이었다.

그 영향으로 홍주성의 성벽도 일부 무너지고 기념비도 기울어졌다.  (안내문)

 

 

날씨 따듯해지면 탐방객이 쉬어가기 좋은 정자

 

 

 

홍주성 역사관에 들어와 전시된 유물과 안내문을 둘러본다.

1872년 제작된 「홍주지도」에 근거하여 홍주읍성의 관아를 축소하여 전시한 것이다.

 

 

 

암막새 기와

 

 

 

 

□ 홍성 홍주아문

홍주의 지방관(목사牧使: 조선시대 지방 행정 단위인 목을 다스리던 정 3품 외직 문관)이 근무하던

건물인 안회당의 바깥문이다.

고종 7년(1870)에 한응필 목사가 홍주읍성을 크게 수리할 때 세운 것이다.

홍주아문이란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직접 쓴 것으로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정면 5칸인 것이 특징이며, 가운데 출입문은 사방 경계를 위해 긴 받침돌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웠다.

조선 시대에 건립된 관청 출입문 중에 가장 크고 독특한 모습을 갖추고 있어,

조선 시대 관청의 출입문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홍주아문을 들어서면 홍성군청 건물과 왼쪽엔 의회 건물이 보인다.

예전 관아는 거의 다 헐렸어도 여전히 관청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홍성군 인구가 10만 명에 육박하고 구청사가 좁아 청사 이전을 위해 2005년부터 매년 20억 원씩

기금을 적립해 2021년까지 542억 원을 마련했다고 한다.

신청사는 홍성읍 옥암택지개발지구로 최종 선정되어 대지면적 27,635㎡, 연면적 20,739㎡의 10층 건물

규모로 총 사업비 811억 3천만 원으로 승인되었다.

2022년 신청사를 착공하여 2024년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홍주 1,000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신청사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길 기대한다. 

 

600년 됐다는 느티나무

 

안쪽에서 보는 홍주아문

 

홍성군청과 맞닿은 홍주초등학교

 

홍주초등학교는 홍주읍성을 담장으로 사용하는 특혜를 받았다.

 

홍주초등학교처럼 제주에는 수산진성을 담장으로 사용하는 무척 아름다운 수산초등학교가 있다.

선물로 수산초등학교를 올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산초등학교

2019.06.15. 토 11:55~12:20 (25분 탐방)  맑음 어제 목우와 합류했으나 비가 내려 오전에 만장굴과 오후에 비자림을 관광했다. 오후엔 해안도로를 따라 이동하며 전에 인상깊게 봤던 수산초등학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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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 청사 뒤 읍성 사이에 있는 여하정과 안회당은 별도로 올릴 예정이다.

 

지금까지 홍주읍성을 밖에서 돌았는데, 이제부터 성벽 위로 탐방한다.

 

여하정 옆 소나무

 

 

 

홍성군청과 역사박물관 사이로 도로가 관통되며 성벽이 잘렸다.

1,772m에 달하는 홍주읍성 중 현재 남쪽의 810m 성벽만 남아있다니 많이 아쉽다. 

해미읍성이나 낙안읍성, 고창읍성처럼 온전하면 얼마나 좋을까.

 

성삼문 동상

 

 

 

 

 

많지 않은 소나무가 읍성을 지키며 제법 운치 있게 자란다.

더 많은 나무를 심어 주민과 방문객의 쉼터를 만들면 좋겠다.

 

 

 

 

 

홍화문을 그대로 통과한다.

 

남문인 홍화문 내부에 걸린 홍주읍성 남문 중건 상량문

 

 

 

 

홍주읍성에도 옹성은 물론 이런 치성도 있다.

 

치성에서 바라보는 홍화문

 

 

□ 홍성 홍주읍성 우물터

 

이 우물은 2005년 홍성지청이 월산리로 이전하기 전까지 식수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 1481(성종 12) 때 편찬된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홍주읍성 안 3개 우물 중 하나로 추정된다.

우물의 모습은 1872년 제작된 「홍주지도」에서도 확인된다.

옛 홍성지원과 홍성지청이 홍성읍 월성리로 이전한 후에는 폐공 되었다가, 

2012년 홍주읍성 내 역사공원을 조성하면서 외형을 보수하였다. (안내문)

 

 

□ 감옥터

 

홍주옥은 천주교 박해기간 동안(1791~1869)에 홍주의 순교자 212명 중 최고로 많은 11 명의 순교자가 탄생된 곳이다.

이곳에서는 교수형이 제일 많이 처해졌다.

순교자들의 옥중생활은 너무나 비참했다.

최고의 고통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고, 장독과 전염병, 포졸들의 괴롭힘은 생명을 단축시켰다.
"저를 위해 온 몸에 매를 맞고, 제 구원을 위해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이제는 제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얼고 있는 이 몸을 바칩니다."

이곳에서 순교한 충청도 최초의 순교자 원시장(베드로)의 마지막 신앙 고백이다.

3개월에 걸친 매질에도 죽지 않자 얼려 죽인 것이다.

특히, 이곳은 프랑스의 첫 번째 선교사였던 성 모방 신부와 두 번째 선교사였던 성 샤스뎅 신부가

1839년도 기해박해 때 홍주 관아에 자수하여 머물던 곳이다.

또한 한국 교회사 집필에 최고의 공로자인 성 다블뤼 주교가 그의 일행인 성 위앵 신부,

성 오매트로 신부와 성 황석두(루카)까지 여섯 명의 성인이 머물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홍주 지역의 최대 순교터인 이곳을 순례하는 이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순교자들의 숭고한 신앙을 기리고 이를 기억하여 후손들에게 전해야 하겠다. (안내문) 

 

 

 

□ 홍성 홍주읍성 감옥

 

감옥은 범죄가 있는 사람을 가두는 시설로 조선시대에는 담장을 둥그렇게 둘러 원옥(圓獄)이라고도 했다.

서울에는 형조와 한성부, 사헌부와 병조 및 승정원 등에 설치되었으며, 지방에는 행정 관청에 설치되었다.

고종 9년(1872)에 제작된 홍주 지도를 보면, 홍주읍성 내 원형 담장 안에 1개 동의 옥사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감옥을 주관하던 홍주 재판소는 1895년에 설치되었는데,

1913년 홍주 재판소와 검사국이 옮겨가면서 감옥도 철거되었다.

현재의 감옥은 홍주읍성 내 역사공원 조성사업이 추진되던 2012년 당시 현재의 위치에 복원된 것이다. (안내문)

 

 

옥사

 

 

 

 

□ 홍주읍성 북문(망화문 望華門)

 

홍주읍성 북문은 조선 초기 축성 당시부터 출입문에 역할을 하였는데, 당시에는 문루*없이 옹성*만 있었다.

읍성의 대대적인 보수가 진행되던 1823년에 문루가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1870년의 수리 기록과 1872년의 지도에 표기된 부문을 비교해 보면,

개거식*으로 전면 3칸의 팔작지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루는 1894년에 발생한 동학농민혁명 당시 서문과 함께 소실되었으며,

주변 성벽은 일제강점기에 공공기관의 읍성 내 입주 등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 훼손되었다.
2017년 발굴·조사 결과 북문지 및 성벽, 옹성의 전체 현황 및 구조가 확인되었다.

향후 고증을 거쳐 문루를 비롯하여 북문 일대를 복원할 예정이다. (안내문)


*문루: 성문 위에 세운 건물
*웅성: 성문 보호 목적으로 성문 밖에 이중의 성벽을 둔 구조물

*개거식: 성곽을 만들 때 성문의 넓이만큼 성벽을 띄어 쌓고 상부에 문루를 만드는 형식

*팔작지붕: 지붕의 옆모습이 팔(八) 자와 비슷한 모양   (안내문)

 

멀리서 본 북문은 연결된 성곽 없이 성문만 복원된 상태라 뻘쭘해 보인다.

앞서 본 홍화문처럼 문루가 오르면 조양문처럼 제법 반듯한 형태가 될 것이다.

홍주초등학교 옆 서문 터도 발굴 조사가 끝났으므로 언젠가 홍화문처럼 복원되리라.

 

북문의 이중 성인 옹성의 모습이다.

홍성군은 북문 복원을 위해 문화재청 승인을 받아 복원 중이다.

홍주초등학교 옆 서문 터도 발굴 조사를 토대로 복원하며 홍주읍성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역사가 숨 쉬는 

문화관광도시를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일제가 파괴한 흥주의 역사를 되살리는 길이다.

 

북문에서 40~50m 떨어진 지점에 성벽 일부가 이렇게 둥그러니 남아 있다.

예전에 성벽 주변으로 민가가 생기며 담장 등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하려고 가져갔을지도 모르겠다.

 

 

도심에 있는 산성이나 읍성은 이렇게 하나둘 복원되며 지방의 역사 공간을 바로 세우고 있다.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홍성군은 과거 20개 고을의 행정,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들판은 넓어 풍족하고, 내포신도시엔 충남도청이 들어서며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새로운 도약이 기대되는 홍성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