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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우리나라 3대 읍성 중 하나인 서산 해미읍성

by 즐풍 2022. 3. 9.

2022_25

 

 

2022.3.6 (일)  오후에 잠시 탐방

 

 

우리나라 3대 읍성인 순천 낙안읍성, 서산 해미읍성, 고창의 고창읍성을 시작으로

그간 부산 동래읍성, 고창 무장읍성, 홍성 홍주읍성, 당진 면천읍성에 이름뿐인 양양읍성도 다녀왔다.

도성인 한양도성이나 수원화성은 물론 북한산성, 남한산성, 부산 금정산성, 청주 상당산성처럼

사람이 거주하는 곳부터 간헐적으로 흔적만 남은 산성까지 제법 많은 곳을 탐방했다.

 

대륙과 해양을 낀 지정학적 요소로 인해 외침이 많다 보니 산성은 물론 도성, 읍성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이런 이유로 이미 조선 세종 때 학자인 양성지는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라고 설파했다.

전공이나 문화재청에 근무하지 않는 한 이 모든 곳을 섭렵할 수 없다.

오늘은 당진 여행을 핑계 삼아 오전에 당진의 면천읍성, 오후엔 가까운 서산 해미읍성을 둘러본다.

 

 

 

□ 서산 해미읍성 (瑞山 海美邑城)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 17년(1417)부터 세종 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되었다.

효종 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 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으며,

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진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다.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출처_문화재청)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문을 통해 읍성으로 들어간다.

 

먼저 시원하게 가지치기를 한 소나무가 반긴다.

 

입구에 진열된 조선시대 무기가 제법 많다.

그중 두 개만 올린다.

 

불랑기(佛狼機)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들여와 전투에서 사용했다.

 

화포(火砲)

조선시대 주력 화포로 전투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 해미읍성 회화나무

 

사적 제116호인 해미읍성 내 위치하는 회화나무는 지역주민들에 의해 호야나무로 불리고 있는데,

이 나무는 1866년 병인박해와 관련이 있다.

당시 해미읍성은 호서좌영으로서 겸영장이 토포사를 겸하여 국사범을 처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내포지방의 천주교 신도들을 압송하여 처형하였는데,

이 나무에 철사줄로 매달고 고문을 하여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을 당하였다.

                                                                                                       (출처_문화재청)

 

옥사(獄舍)

해미읍성은 우리나라 천주교와 연관이 깊은 곳이다.

교도를 투옥하고 문초했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 있던 옥사를 복원·재현하였다.

내옥과 외옥이 있고,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되었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 투옥하고 처형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 (안내문) 

 

 

 

옥사에 갇힌 사람들 모형

 

옥사와 형틀

 

민속가옥

 

지방의 읍성은 가장 한국적인 성인 셈이다.

우리의 읍성은 외국과 달리 어느 특정 계급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유사시 전주민이 들어와 농성할 수 있는 점이 진정한 호국 위민의 정신이 깃든 시설이다. 

 

 

 

전에 왔을 땐 자유롭게 성벽을 다닐 수 있었는데, 지금은 성벽 붕괴와 안전사고를 우려해 막아놓았다.

누각 주변에 병영 깃발만 바람에 펄럭인다.

 

 

 

읍성은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많이 지어졌다.

왜구의 출몰이 잦은 해안가인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지역의 해안가에 많다.

 

 

 

 

 

집무실이 모인 동헌 구역

 

읍성은 대부분 시내에 위치하여 평지성이나 가끔은 이렇게 언덕이나 작은 동산을 낀 경우도 많다.

 

객사

건물 중앙 정청에 궐(闕) 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관원들이 국왕에 대한 예를 올렸다.

양쪽 방은 조정이나 상부에서 파견된 관원과 귀빈들의 숙소로도 사용했다.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1999년 7월에 복원하였다. (안내문)

 

객사 앞에 잘 자란 소나무

 

동헌 출입구인 정문 호서좌영(湖西左營)이란 편액이 걸렸다.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 된 후 해미를 호서좌영(左營)으로 삼았다.

전영(前營)은 홍주(현 홍성), 우영(右營)은 공주, 중영(中營)은 청주, 후영(後營)은 충주에 두고

호서지방을 이들 5개의 병영으로 방어하게 한 것이다.

 

동헌(東軒)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겸영장의 집무실로서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해미 현감경영장은 인근 12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를 겸한 지위였다. (안내문)

 

 

 

동헌 뒤 건물

 

내아로 드나드는 출입문

 

지방 수령의 숙소인 내아(內衙)

 

동헌에서 보는 객사

 

동헌

 

청허정으로 올라가는 계단

 

 

 

청허루 가는 길의 대숲

 

 

□ 청허정(淸虛亭)


정자(亭子)는 일반 가옥과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특별히 지은 건물이다. 

청허정은 조선 성종 22년(1491) 충청도 병마절도사(충청병사) 조숙기(曺淑沂, 1434~1509)가 세웠던 것을 

다시 복원한 것으로 조선 전기 학자 성현(成俔, 1439~1504)의 문집 『허백당집(虛白堂集)』에 그 유래가 전한다.
정자의 이름인 ‘청허(淸虛)’는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이곳에 오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마음가짐을 당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 초기의 해미읍성은 충청도 육군사령부 역할을 하는 충청병영성으로 최고 책임자는 병마절도사(병사)였다.

조숙기가 병사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을 수리하면서 소나무 숲이 우거진 뒷동산에 청허정을 지었다.

이후 이곳에 온 관리들은 청허정에서 무예를 익히거나 휴식을 취하는 등, 시를 짓고 글을 남겼다.
1494년 방문한 충청감사 조위(曺偉, 1454~1503)는 주변 소나무와 멀리 보이는 바다의 풍경에 대한 시를 남겼고,

권오복(權五福, 1467~1498)의 문집 『수헌집(睡軒集)』에 절도사와 수령이 청허정에 모여 지은 시가 전한다.


1579년 충청병영에서 근무했던 이순신, 1790년 해미로 귀양 왔던 다산 정약용도 이 청허정에 머물렀을 것이다.
1872년 「해미현지도」에는 옛터(古址)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1800년대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자리에 일본식 신사(神社)가 세워졌다가 광복 후 철거되었고,

1976년 복원한 후 2011년에 다시 정비하였다.

                                                                                                              (출처_문화재청)

 

평지성인 해미읍성에서 청허정이 있는 작은 언덕에 소나무와 대숲이 울창해 풍취를 더한다.

전시엔 이곳에서 적진을 살피며 지휘하기 좋은 곳이다. 

 

 

 

 

 

청허루 뒤에 있는 일종의 해자 시설이다.

해자라고 하지만 경사가 심해 물을 가둘 수 없으니 외성의 성격을 갖는다.

 

 

 

평지형인 해미읍성은 이렇게 작은 언덕이 있어 산성의 성격도 갖는다.

 

해미읍성의 유일한 암문

 

읍성의 설치지역은 충청 20개소, 경상 45개소, 전라 39개소, 함경 23개소, 평안 33개소로 

5개 도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는 북방 및 왜구에 대비하여 해안지역에 중점적으로 설치한 것이다. 

 

 

 

소나무 그늘과 안락의자

 

곧 봄이 되면 초록의 나뭇잎이 이곳의 정취를 한껏 높일 것이다.

 

 

 

어디든 나무가 있으면 운치가 한껏 높아진다.

그게 상록수인 소나일 때 더 그렇다.

 

 

 

방문(榜文)이 재미있어 올린다.

 

 

치성에 세운 문루

 

남문이자 정문인 진남문

 

 

 

 

 

많은 경우 성벽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정문에 옹성을 두어 방어에 적극적인 데,

해미읍성에 치성만 있을 뿐 옹성은 없는 게 아쉽다.

 

 

현재 서산 해미읍성에서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성곽과 진남문뿐인데,
성곽을 쌓을 때에는 여러 고을의 백성이 동원되었다.
조선 전기 축성법에 따르면,
성을 쌓은 지 5년 안에 무너질 경우 법에 따라 축성을 감독한 관리를 논죄하도록 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때문에 성벽의 중간중간에는 축성 때마다 동원된 사람들의 출신지를 새겨 그 책임을 다하도록 하였다.
그중 남문 왼쪽 아래에는 “공주 백성이 쌓았다”는 글씨가 있고,
동문으로 가는 성벽 아래에는 “여기까지는 충주 백성이 쌓았고,
다음부터는 임천 백성이 쌓았다”라고 새겨져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해미읍성의 동문인 잠양루(岑陽樓)

 

해미읍성은 1975~1981년 사이에 성내의 주택과 학교 등이 모두 철거되고 무너진 성벽은 원형을 살려 복원하였다.
이곳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잘 남아있는 대표적인 읍성이다. 

 

 

읍성에 대한 관심을 갖다 보니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된다.

그렇다고 따로 공부한 것은 아니다.

뉴스를 검색해 단편적으로 하나둘 알게 된 것뿐이다.

언제 방문해도 좋을 해미읍성은 자주 찾고 싶은 멋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