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_07
2022.1.16 (일) 홍주읍성 탐방 후 들림
홍성군은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4목(충주, 청주, 공주, 홍주)에 해당할 만큼 큰 도시였으나,
해방 이후 대전시, 세종시, 천안시 등 무섭게 성장한 여타 시에 비하여 발전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이곳에 눈에 띄는 고층 건물도 별로 없으나 재래시장만큼은 활기차게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웬만한 도시에선 대형마트로 주변 상권이 피폐해지기 쉬운데, 홍성읍은 그런 느낌이 없어 다행이다.
홍성군이 급격하게 성장하지 않았어도 홍주읍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절반 넘게 헐리며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홍주읍성 안에 36동에 이르던 관아 건물이 겨우 네 동만 남은 채 다 헐리고 관청은 겨우 군청과 의회뿐이다.
나머지는 주택과 상가가 들어서며 활기를 띤다고 해도 여전히 변방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다.
도시화로 팽창하면 역사적 유적이 훼손될 우려가 크고, 정체하면 산업기반이 약해 먹거리가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조선시대에 홍주목이었던 이 지역은 외래 문물도 일찍 수용되었는지 천주교인이 많았나 보다.
이러한 내용은 바로 아래 홍주성지성당에서 가져온 「□ 홍주성지」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불교가 처음 들어올 때 이차돈이 처형된 이후 1,264년 만에 또다시 피바람이 회오리친 것이다.
신흥 종교가 전래될 때 많은 박해와 희생이 따른다는 걸 우리 역사는 물론 세계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 홍주성지
1. 전국 두 번째로 순교자가 많은 성지
홍주성지는 1791년 신해박해의 여파로 원시장 베드로가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순교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였다.
기록상 212명의 신앙 선조들이 목숨 바쳐 순교한 전국 두 번째로 순교자가 많이 탄생한 곳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분까지 포함한다면 1,000여 명이 넘게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2. 충청도의 첫 순교터
천주님을 알고, 수년 동안 예비신자의 신분으로 옥에 갇혀, 옥중 세례를 받고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는
1792년 추운 겨울 얼고 있는 몸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함으로써 이곳은 충청도의 첫 순교터가 되었다.
3. 6곳의 순교터
목사의 동헌, 교수형터(감옥), 홍주진영, 저잣거리, 참수터, 생매장터, 등 총 6곳을 도보 순례할 수 있는 성지로서
심문과 고문, 죽음의 형장까지 순교자들의 신앙의 길을 깊이 묵상하며 걸을 수 있다.
4. 예비신자들의 모범 성지
천주님을 알고도 수년 동안 예비신자의 신분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옥중 세례를 받고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교를 하면서도 순교 직전 자기 자신에게 세례를 베풀고 순교한 이여삼 바오로,
이들이 바로 예비신자들의 모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 기차 순례가 가능한 성지
많은 인원이 열차로 순례할 수 있는 성지, 봉사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기도와 묵상으로 순교 선조들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기차 순례지이다.
홍성역 ↔ 홍주성지까지는 도보로 30분 거리로 전국 성지중 기차역에서 제일 가까운 성지이다.
(출처_ 홍주순교 홈피)
홍성군 홍주성지 순례도
홍주성지의 첫 장은 홍주읍성의 옥사 주변에서 시작되니 홍주읍성을 먼저 들려야 한다.
□ 홍성 홍주읍성 우물터
이 우물은 2005년 홍성지청이 월산리로 이전하기 전까지 식수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 1481(성종 12) 때 편찬된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홍주읍성 안 3개 우물 중 하나로 추정된다.
우물의 모습은 1872년 제작된 「홍주지도」에서도 확인된다.
옛 홍성지원과 홍성지청이 홍성읍 월성리로 이전한 후에는 폐공 되었다가,
2012년 홍주읍성 내 역사공원을 조성하면서 외형을 보수하였다. (안내문)
마침 이곳에 우물을 보기 좋게 복원한 게 보인다.
□ 감옥터
홍주옥은 천주교 박해기간 동안(1791~1869)에 홍주의 순교자 212명 중 최고로 많은 11 명의 순교자가 탄생된 곳이다.
이곳에서는 교수형이 제일 많이 처해졌다.
순교자들의 옥중생활은 너무나 비참했다.
최고의 고통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고, 장독과 전염병, 포졸들의 괴롭힘은 생명을 단축시켰다.
"저를 위해 온 몸에 매를 맞고, 제 구원을 위해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이제는 제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얼고 있는 이 몸을 바칩니다."
이곳에서 순교한 충청도 최초의 순교자 원시장(베드로)의 마지막 신앙 고백이다.
3개월에 걸친 매질에도 죽지 않자 얼려 죽인 것이다.
특히, 이곳은 프랑스의 첫 번째 선교사였던 성 모방 신부와 두 번째 선교사였던 성 샤스뎅 신부가
1839년도 기해박해 때 홍주 관아에 자수하여 머물던 곳이다.
또한 한국 교회사 집필에 최고의 공로자인 성 다블뤼 주교가 그의 일행인 성 위앵 신부,
성 오매트로 신부와 성 황석두(루카)까지 여섯 명의 성인이 머물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홍주 지역의 최대 순교터인 이곳을 순례하는 이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순교자들의 숭고한 신앙을 기리고 이를 기억하여 후손들에게 전해야 하겠다. (안내문)
처참했을 당시 현장도 지금은 아무 흔적이 없다.
다만, 역사가 말해 줄 뿐...
홍주읍성을 빠져나와 북문으로 가다가 만난 저잣거리 현장이다.
또 다른 홍주순교성지로 이곳은 생매장터이다.
생매장터라니 말만 들어도 끔찍하다.
스마트폰으로 보면 글자가 안 보일 거 같아 글을 옮긴다.
이곳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주변은 감옥에서 죽거나 교수형을 당한 죄인들의 시신을 매장하던 곳이다.
병인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인이 잡혀 들어오자 여기에 구덩이를 파고 신자들 일부를 몰아넣어 생매장하였다.
그중 네 명의 순교자 이름이 기록에 남아 있다.
최법상 베드로, 김조이 루치아, 김조이 마리아, 원 아나타시아이다. (안내문)
이중에 김조이 루치아와 김조이 마리아에 김조이가 두 번 언급된 걸 보면
이름을 착오로 잘못 적은게 아닌가 하여 찾아 보니,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과부는 양반과 양인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달랐다고 한다.
양반 과부는 성에 '씨(氏)'를 붙였고, 양인 출신 과부는 뒤에 '조이(召使, 이 한자 표기는 이두문자이므로
'소사'라 읽지 않고 '조이'라 읽음)를 붙였다고하니, 이제야 다른 사람임을 알겠다.
이곳 성지는 매장터이므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대신 예수의 순교 장면을 14개의 형상에 담아 전시했다.
각각의 형상을 홍주성지성당 안내문과 함께 올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홍주읍성 옆 홍주성지엔 지금 터만 남았을 뿐 아무것도 없다.
간단하게 천주교 홍주성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탐방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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