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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경상도·부산·울산·대구

부산타워와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는 용두산공원

by 즐풍 2021.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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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7.21 (수)   오전 7시경 탐방 시작

 

 

용두산공원이 거기 있기 때문에 부산으로 간다?

맞다. 요즘은 용두산공원이 부산여행의 이유가 되었다.

부산 동부권역에 명소 해운대가 있다면 중부권에는 역시 남포동이 최고의 핫플레이스, 

그중 용두산공원은 부산을 찾는 이들이 빼놓지 않고 찾는 부산 대표 랜드마크다.

 

용두산공원에 이르는 길은 오르막이긴 하지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가 드리워져 길을 따라 

천천히 오르다 보면 어느새 공원 입구에 다다르게 된다. 

도시철도를 이용한 도보여행객은 역에서 가까운 에스컬레이터 입구를 이용하면 더욱 편리하게 공원을 만날 수 있다.

단아한 정자 아래 자리한 시민의 종과 용두산공원의 자랑 꽃시계가 제일 먼저 관광객을 맞이한다. 

시민의 종은 부산 시민의 기부금으로 제작된 것으로 매년 새해를 맞이하는 제야의 타종식 행사를 진행한다. 

꽃길만 걷자고 소원하는 모든 이들의 로망, 용두산공원 꽃시계도 지나치지 말자.

하늘에서 바라보는 부산의 명소를 즐기려면 부산타워로 가자. 입장 전 부산타워에 왔다는 인증숏은 필수. 

서울에 N서울타워가 있다면 부산엔 부산타워는 N서울타워보다 먼저 지어졌다고 한다. 

대대적인 리뉴얼 작업을 거쳐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뭐니 뭐니 해도 부산타워의 가장 큰 매력은 전망이다.

전국 최대 물류허브 부산항과 부산항대교, 영도대교를 넘어 영도 봉래산 전경, 

그리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멀리 해운대 마린시티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하행 엘리베이터를 타고 테마체험관이 있는 2층에 내린다. 

‘블랙 원더랜드 인 부산’에서는 6가지의 테마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부산을 즐길 수 있다.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은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트릭아트를 체험할 수 있고, 

머리 위로 수많은 미디어아트가 셀 수도 없이 셔터를 누르게 한다. 

기념품 가게를 그냥 지나치면 서운하다. 

아기자기 컬러풀한 기념품들이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밤이 되면 화려한 조명으로 물드는 부산의 야경은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해 줄 것이다.

낮과 밤의 매력이 공존하는 용두산공원에서 부산의 아름다움을 만끽해보자.           (비짓 부산 옮김)

 

 

 

먼저, 송도해수욕장을 탐방하고 인근에 있는 송도 용궁 구름다리를 건너 두도공원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개방시간이 오전 9시부터이다.

두어 시간 기다릴 수 없어 용두산공원으로 넘어간다.

 

 

□ 용두산공원 

 

부산 용두산공원이 위치한 용두산은 예부터 소나무가 울창하여  송현산이라 불렀고,

초량소산이라고도 하였다.

산의 형세가 용이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와 바다를 향해 뻗어 나가는 

용의 머리에 해당하여 용두산이라 불렀다.

이곳 용두산에는 조선 후기 초량왜관(1678년~1876년)이 있었으나 개항(1876년) 이후 

일본 안전관 거주지가 조성되었고, 일제강점기(1910년~1945년) 에는 식민 지부 산부의

중심지이자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 한국전쟁기에는 국립국악원, 중앙정부기관 일부 그리고 피난민들의 판잣집 등이 있었으나 

1954년 12월 용두산  화재로 불타버렸다.

그 후 녹화사업이 이루어져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서 우남공원으로 이름을 바뀌었다가 

1960년 4·19 혁명 후 다시 용두산공원으로 환원되었다. 

부산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용두산 공원은 해발 69m의 꼭대기에 

높이 120m의 부산 타워가 우뚝 솟아 있다. 

숲이 우거진 산책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시민의 종, 꽃시계, 열긴 문화공연장, 부산 출신 시민의 시비, 

벽천폭포 등이 있어 국내외 관광객이 즐겨 찾는 부산에 대표적인 도시공원의 하나이다.     (안내문)

 

 

 

 

 

□ 백산 안희제 생애와 활동

 

21세에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봄에 양정의숙(養正義塾) 경제과로 전학해 24세에 졸업하였다.

1907년 동래의 구포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에 창남학교(刱南學校)를 창설하였다.

1909년 10월 윤세복(尹世復)·서상일(徐相日)·신성모(申性模)·남형우(南亨祐)·박중화(朴重華)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며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였다.

1914년 부산에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경영해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단체의 연락처를 제공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해서 각지에 배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 해에 백산상회를 백산무역 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로 확대 개편해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조달기관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11월에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해 다수의 애국청년학생들을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이러한 장학생들 중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5년에는 운영난에 빠진 중외일보를 인수해 중앙일보로 개칭하고 사장이 되어 일본의 총독정치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또한, 1927년 이시목(李時穆) 등과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해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 뒤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31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1933년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을 세워 교포들의 생활 안정과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중국인 지주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던 한국인 소작농 300여 호를 유치해 토지를 분배해주고

5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자작농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발해농장 안에 발해학교를 설립해 농민들과 그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대종교를 신봉해 총본사전강(總本司典講)·교적간행회장(敎籍刊行會長)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 고유의 종교를 통한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그러나 1942년 11월 일제가 대종교를 독립운동 조직으로 간주해 만주와 국내에서

윤세복 이하 대종교 지도자 21명을 일거에 체포한 임오교변 사건이 일어났을 때 투옥되었다.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혐의로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9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목단강병원에서 순국하였다.                             [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용두산 정수사 안내문

 

정수사는 들어가지 않고 입구를 사진 찍는 것으로 대신한다.

 

부산타워는 부산을 상징하는 탑으로 전망대는 경주 불국사 다보탑 지붕에 얹혀 있는 보개(寶蓋)를 본떠 만든 것이다.

해발 69m 높이 120m로 세워졌으며,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부산의 야경은 아름답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꽃시계와 이순신 장군 동상, 부산타워가 한눈에 들어온다.

 

 

 

꽃시계 화원

 

 

 

 

 

 

 

송도 용궁구름다리를 건너 도두공원으로 들어가려던 계획은 개방시간까지 두 시간을 기다릴 수 없어

용두산공원으로 이동했다.

부산 중구의 요지인 데다가 교통이 편리해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부산타워는 현재 코로나 19로 폐쇄되었으며, 백산 안희제 선생의 숭고한 독립운동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울 수 있는 역사적 사실에 한계가 많다는 것도 알게 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