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지역별 탐방/경상도·부산·울산·대구

반곡서원은 고향 동네 이름과 같아 더 반갑다

by 즐풍 2021. 6. 26.

 

 

2021.6.19. () 오전에 탐방

 

 

죽림해수욕장 탐방을 끝내고 나오는 길에 작은 동산의 바위와 어우러진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멋진 풍경을 만나기 쉽지 않아 다른 곳은 제껴두고라도 이곳을   생각에 이동한다.

거제여상고 앞을 지나 차량이  들어갈  없는 곳에 이르자 반곡서원이다.

어릴  고향  동네가 반곡동이라 반가운데, 한자까지  같아 고향에  느낌이다.

 

외삼문을 통해 서원으로 들어간다.

 

서원과 향교의 비교

 

□ 서원(書院)

 

조선 시대의 유학 교육기관. 서원은 지방에서 유학 교육을 통해 지식인을 양성하는 곳으로,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를 가지고 있었으며 엄격한 학규에 의해 운영되는 특징을 가졌다. 

서원은 존현과 강학이라는 기능에 따라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사당, 

교육을 담당하는 공간인 강당, 유생들이 공부하며 숙식하는 공간인 동재·서재로 크게 나누어진다. 

 외에도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 이를 보관하는 서고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현존하는 서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소수서원(사적 55), 옥산서원(사적 54), 

도동서원(보물 350), 도산서원(사적 170) 등이 있다. 

2019 7 6, 소수서원을 비롯한 9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향교(鄕校)

 

조선시대 지방에 설치한 국립 교육기관

유교가 전래되었을 때부터 원시적인 유교 교육기관이 존재했지만, 

향교라는 이름과 형태로 설립된 것은 숭유억불과 유교문화이념을 정치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시대부터였다. 

중앙의 성균관과 함께 지방 유교 교육의 산실로, 

중앙 정부의 관심 아래 지방 수령에 의해 운영이 지원되었다.     [출처_다음백과]

 

 

□ 반곡서원

 

 서원은 거제 유림 윤도원, 옥삼현 김일채, 윤명한, 허유일, 신수오 등이 문정공 우암 송시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04(숙종30) 창건하였다.

그후 문청공 죽전 김진규, 충현공 몽와 김창집, 부제 학공 이중협, 문충공 민진원, 정문공김수근이 추가로 배양 되었다.

 

강당은 마루 뒷물을 열어놓아 시원한데, 뒤뜰이 액자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이렇게 시원한 데서 고리타분한 성리학을 공부했으니 졸리지는 않았을까?

 

왼쪽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오늘날 독서실 같은 개념이다.

 

오른쪽 동재는 숙소인 셈이다.

 

우암사

우암 송시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04(숙종30) 창건한 건물로

김창집, 민지원, 이중협, 김수근 등 6명을 모시는 사당이다.

 

자는 얼핏 보면 참 쉬운 글자인데, 도대체 생각나지 않는다.

더욱(); 가장(); 탓하다(); 허물(); 괴이하다()의 뜻을 갖는 글자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안에서 본 외삼문

 

□ 동록당

 

추사 김정희가 군자라 칭송했던 정혼성을 배향하는 사당으로 춘 2월 첫 정일에 우암사와 함께 제사드린다.

상단에 명덕재라고 쓰인 현판이 있는데, 이 건물은 명진에 있던 명덕재를 이건하여 등록당이라 칭하였다고 전해진다. (안내문)

 

□ 동록 정혼성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선생은 조선 후기 거제도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평생 거제도에 살면서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거제도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사상과 철학뿐만 아니라, 

특히 거제문학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하신 분이다.

거제시 거제면에 거주했던 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 선생과, 

39세 이후 거제도를 떠나 중부 지방에서 명성을 떨쳤던 그의 7촌 재종숙(再從叔)인 곡구(谷口) 정종한(鄭宗翰 1764~1845) 선생 

두 분은 거제출신으로서 현재까지 한문학 문집을 남긴 유일한 분들이다. 

동록 선생은 조부(祖父) 정욱(鄭昱), 부(父) 정종의(鄭宗儀), 형(兄) 정언성(鄭彦性)이고 부인은 밀양 박씨이며, 

선생은 거제면 명진리에서 출생했고 그의 재종숙(再從叔)인 곡구(谷口) 정종한(鄭宗翰)의 부친인 정유(鄭游 1739~1804)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현재 선생은 거제시 거제면 반곡서원(盤谷書院) 內, 동록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매년 춘 3월 첫 정일에 거제 유림들이 반곡서원(盤谷書院)의 우암사 송시열과 함께 제사를 올리고 있다. 

호는 동록(東麓), 자는 사성(士成)으로 1881년 거제의 선비들이 사당을 세워, 

석채례를 행하고 선생의 호로 인하여 "동록당(東麓堂)"이라 명명했다.

동록당(東麓堂)은 계해년 1863년(철종 14년) 3월에 거제군 동부면 명진리 515번지에 최초로 건립했다가 

광무 10년 1906년 거제군 거제면 동상리 367번지로 이건(移建)하였다. 

최초 동록당이 있었던 명진리 건립 시(時)인 1863년에 동록당기(東麓堂記)를 처음 작성했다. 

당시의 기문(記文)은 전하지 않으나 1881년의 동록당기와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판(懸板) 동록당(東麓堂) 명덕재(明德齋) 도남문(道南門)은 계해년 1863년 10월(음)에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가 

직접 적어 걸었다.

                                                                                                         [출처_거제앤뉴스의 "고영화의 거제도 고전문학" 중에서]

 

동재

 

서재

 

도남문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으나,

1906(광무 10) 거제유림에서 서원의 옛터에 제단과 반곡서원 유허비를 세우고 매년 가을에 단제를 치렀다.

1971 거제 향교의 책임자 윤병재가 서원의 복원을 발의하고 유림총회의 찬성으로1974 우암사를 중건하였다.

또한 인접 지역 고택  채를 철거하고 나온 부재로 강당을 개축하는 과정을 거쳐  모습을 되찾았으며,

2010~2012년까지 3 간에 대대적인 복원 사업을 진행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등록당은 추사 김정희가 군자라 칭송했던 등록 정흔성(1779년생) 배향한 곳이다.

반곡서원은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배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안내문)

 

□ 죽천

 

이곳은김진규 대제학이 1689 유배되어  1694년까지 마음을 가다듬고 수량양한 곳이다.

김진규는 이때부터 이곳을 대숲 샘물’,  죽천이라 칭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먼저 유배  우암 송시열, 뒤이어  충헌공 김창집, 좌의정 이이명, 신구 선생 등도  물을 마시고 생활했다.

 

죽천 김진규 선생의 

꽃을 보니 생각나네 

매화꽃 반쯤 지니 살구꽃 피고 

바다 멀리 봄빛은 나그네 마음 재촉하네 

멀리 고향의 우리   북쪽 모퉁이 

내가 심은 나무도  피어났으리.   (안내문)

 

 

우암사

 

강당

 

□ 반곡서원 유허비

 

 비는 1879 반곡서원의 자취를 후세에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거제부사 이태권이 사적을 찾고 진주 목사 신석유가 비문을 지었다.

비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터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혼백을 모시던 곳이다. 

선생이 이곳에 유배를 와서 글을 읽고 도를 강론함으로써 지역 문화를 발전시키는  기여한 일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1704년에 서원을 세워 향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때에 죽천 김진규, 몽와 김창집, 단임 민진원,  삼호 이중협, 계산 김수근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3 지역의 인사들이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나라에 사액을 요청하였으며, 

얼마  훼철의 명에 위해 황폐하게 되니 지나는 사람들이 보고 모두 슬퍼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 부사 이태권은  기록을 살펴 그동안의 내력을 돌에 새기고자 하니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기문을 청하니   글로써 정성을 표하노라.”

*비신의 크기: 높이 150, 너비 49, 두께 15cm (가섬석: 가로 76, 세로 48, 높이 28cm). (안내문)

 

휴허비각

 

 

반곡서원과  하나 사이로 세진암이 자리한다.

사찰은 조선시대 내내 경원시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승군을 조직해 나라를 위해 싸웠다.

서원은 흥선대원군이 철폐령을 내려   소멸되는  했으나 

지금은 소수서원을 비롯한4개의 서원이 유네스코 등록되는 아이러니를 갖는다.

세상사 시대에 따라 가치가 이렇게 달라질  있다는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