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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강원도

꿈이 이루어진다는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

by 즐풍 2020. 7. 21.

 

 

 

 

 

2020.7.17. (금)  오전에 한 시간 40분 간 탐방 

 

 

지금도 TV가 시작되거나 끝날 때 틀어주는 애국가 화면에서 낙산사 의상대나 홍련암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요즘 TV를 잘 안 보니 애국가 화면에 어디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낙산사의 의상대나 홍련암이 나왔던 거 같기도 하다.

낙산사는 양양의 명소로 명승 제27호이자 사적 제495호이기도 하다.

 

낙산사 주차장에서 내리면 홍예문이 있는 정문으로 들어가는 걸 모르고 후문 쪽에 주차했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으나 낙산사를 거의 다 돌 때즈음 후문으로 들어왔다는 걸 알았다.

동해 바닷가 암릉과 소나무 등 주변 경관과 절묘하게 녹아든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2005년 화재로 사찰 대부분이 소실됐는데, 지금은 다 복구된 것으로 보인다.  

 

 

서낭당

낙산사 입구에 있는 이 성황당은 풍어풍농과 무사고, 마을의 안녕과 지역 발전을 기원하며 마을에서 제를 지내던 곳이다.

1953년 마을 주민들의 성금으로 처음 지어졌다.

마을에서는 매년 3월3일 삼짇날과 9월 9일 중양절에 제사를 지낸다. (안내문 편집)

 

 

관음신앙 성지인 낙산사

 

낙산사는 신라 화업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참견하고 동해의 명산인 오봉산에 671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낙산사라는 사찰명은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으로 알려진 보타 낙가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표적인 관음도량으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된 사찰로 인정되어 200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홍련암 및 의상대 주변 해안 일대가 독특하고 아름다워 2007년 명승 제27호로 지정되었다.

 

창건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화재와 전쟁 등으로 파괴와 중건이 계속되었다.

858년 범일국사의 중창 이후 몽골군의 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파괴될 때마다 재건했다.

2005년 4월 5일 양양지방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로 인해 보물 제479호인 동종과 원통보전 등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다.

2005년과 2006년 발굴조사를 통해 원통보전 일대에서 6차례에 걸친 증·개축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조선 정조시대를 복원시기로 잡았으며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를 참고하여 복원이 진행되었다. (안내문)

 

홍련암

 

후문에서 매표하고 의상 기념관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고운 모래 바닥이라 상쾌하게 걷는다.

 

차와 다과를 파는 다래원

 

의상 기념관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는 한국 불교를 크게 빛낸 신라의 대표적인 고승이다.

이 땅에 화엄 사상의 토대를 굳건히 세운 화엄종의 개조이다.

2001년 건립한 의상 기념관에는 의상대사의 얼굴을 그린 진영, 일대기를 재현한 8폭 불화,

저술의 핵심인 「화엄일승법계도」와 백화도량 발원문을 담은 10폭 병풍, 각종 서적과 논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2005년 양양 산불로 전소된 낙산사 전각을 복원하기 위해국립문화재연구소가 벌인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시대를 망라한 토기, 청자, 백자, 기와, 철편, 상평통보 등의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  (안내문)

 

당시 화재를 당한 건물의 잔해 등도 전시되어 있다.

 

 

 

근사한 해우소

 

 

해수관음 성지 낙산사(洛山寺)

 

한국의 해수관음 성지는 예로부터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 여수 향일암을 꼽는다.

관음성지는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이란 뜻으로 이곳에서 기도하면

그 어느 곳 보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잘 받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안내문)

 

의상대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671년(문무왕 11) 낙산사를 창건할 때 이곳에서 좌선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당시 주지 만옹스님이 건립하였고 만해스님이 의상대기를 지었다.

이후 수 차례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2009년 9월 해체복원 하였다.

육각형의 정자로 이익공 양식의 공포에 겹처마 모임지붕으로 어우러진 동해안의 대표적인 해안 정자로

의상대에서 맞는 일출 풍경은 낙산사의 백미이다.            (안내문)

 

의상대에서 바라본 홍련암, 우측 소나무 아래에 동굴이 있다.

 

범종각과 연하당

 

범종각

 

연하당

 

연하당에서 보는 홍련암

 

 

홍련암(紅蓮庵)

 

의상대사가 동굴 속으로 들어간 파랑새를 따라가 석굴 앞 바위에서 기도하다 붉은 연꽃 위의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세운 암자로, 홍련암이란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다.

676년(문무왕 16)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후 수차례 중건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현재의 전각은 2002년에 중건된 것으로 관음굴이 있는 해안가 절벽 위에 세워진 흔치 않은 건물이다.

정명 3칸, 측면 3칸이며 앞뒤의 지붕 형식이 다른 불전으로 전면은 팔작지붕, 배면은 맞배지붕 형식이다.

바닥에 난 구멍의 유리를 통해 절벽 아래 관음굴을 볼 수 있다.  (안내문)

 

의상대사가 기도했다는 동굴을 보려면 홍련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연하당 앞에서 당겨본 의상대

 

물고기는 눈을 뜨나 감으나 눈을 뜬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늘 깨어있으란 의미가 있어 사찰에서는 목어를 많이 볼 수 있다.

 

 

 

보타락 앞 관음지

 

관음지와 보타락

 

 

 

 

연꽃은 진흙 속에 몸을 담고 있지만, 더럽혀지지 않고 청정함을 잃지 않는다.

이러한 연꽃의 모습은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나뿐 환경에 처해 있어도

그 본성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불교의 교리에 비유된다.

 

또 하나는 보통의 식물은 꽃이 지고 난 뒤에 열매를 맺는데,

연꽃은 꽃이 피는 동시에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모든 중생이 태어남과 동시에 불성을 지니고 또 성불할 수 있다는 불교와 상통한다.

 

이런 의미로 불교에서는 연꽃을 신성시하여 부처님의 좌대를 연꽃으로 수를 놓기도 하는 데,

이를 연좌대라고 한다.

 

 

 

지장전

 

보타전

 

 

이젠 해당화도 다 지고 붉은 열매가 열렸다.

 

 

해수관음 공중사리탑·비 보물 제1723호

 

1692뇬 비구 석겸 등이 큰 뜻을 세우고 조성한 사리탑이다.

비문에 따르면, 1683년(숙종 9) 홍련암 불상에 금칠을 다시 할 때 주변에 상서로운 가운이 가득하더니

공중에서 사리가 탁상으로 떨어져 이를 봉안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탑은 8각 원당형을 기본으로 하며 탑신과 상륜은 원구형이다.

기단부의 상대성, 중대석, 하대석에는 각각 다양한 문양을, 탑신부 아래쪽엔 연꽃을 새겼다.

옥개석과 상륜부는 통돌로 되어 있다.

2006년 이 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진신 사리와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홍련암으로 가는 입구에는 유래를 새겨 넣은 해수관음 공중 사리탑비가 있다.  (안내문)

 

 

신선봉의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

 

해수관음상은 700여 톤의 돌을 들여 높이 16미터로 여러 조각을 붙여 새겨 올린 것이다.

5년의 각고 끝에 1977년에 완성하였다.

당시의 문화 여건으로서는 대단히 공을 들인 것으로서 조각자는 매일 관음기도를 거르지 않고

몇 차례나 고쳐 새겨 원만상호를 이루고자 했다고 한다.

거대한 입상 조각이 균형 잡힌 비례를 갖추고 있어 시원한 바다를 품 안에 거두어

수많은 순례자의 소망을 받아 주기에 충분하다.

툭 터진 전망과 거대한 규모로 인해 오늘날 낙산사의 상징이 되었다.  (최완수_명찰순례 발췌)

 

 

관음보살은 관세음 또는 관자재보살을 말한다.

대자대비를 상징하는 보살로서 온갖 고통을 받고 있는 이 사바세계 모든 중생들이

그를 진심으로 부르기만 하면 곧바로 그 음성을 관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현세 이익 신악의 대표적인 대상이다.

 

 

 

 

 

 

원통문

 

오봉산은 낙가산이라고도 하는 데, 낙산사라는 이름도 낙가산과 같은 유래에서 이름 지어졌다.

삼국유사와 동국여지승람 그리고 낙산사 기록 등 낙산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모든 기록들은 신라시대 의상 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적고 있다.

 

대성문

 

 

원통보전

 

관세음보살을 봉안한 낙산사의 금당으로 671년 의상대사가 홍련암 관음굴에서 21일 기도 끝에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 여의주, 수정염주와 함께 사찰의 건립 위치를 전해 받은 곳에 원통보전을 세웠다.

원통보전에 봉안된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은 고려시대 후반의 전통양식이다.

강원도에서는 유래가 없는 건칠기법으로 조성된 불상이다.

2005년 양양 산불 당시 건칠관음보살좌상은 금곡 정념스님과 사대부중의 지혜와 염력으로

화마 속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으며, 현 전각은 2007년 11월에 복원하였다.  (안내문)

 

원통보전으로 들어가는 대성문 양쪽에 그려진 사천왕이다.

 

원통보전

 

 

칠층 석탑 보물 제499호

 

의상대사가 처음 세울 때 3층이던 것을 1467년(세조 13)에 7층으로 만들어

낙산사의 보물인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탑의 높이는 6.2m로 부분적으로 손상된 곳이 있으나 샹륜까지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조선시대 다층석탑의 전형적인 시대적 특징을 갖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기단부에는 정방형 2단 지대석이 놓여 있는데 윗면의 24판 겹 연꽃무늬가 특징적이다.

탑신부는 각 층의 탑신석 아래 굄돌을 놓고 위에는 3단의 옥개 받침을 올린 간략한 구조 형식이다.

상륜부는 노반 위에 청동 복발, 보륜 등을 장식하였다.  (안내문)

 

 

 

담장

 

원통보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조선시대 세조가 낙산사를 중창할 때 처음 쌓았다고 전한다.

높이 약 3.8m, 전체 길이 약 220m로 일부 원형이 남아 있고 대부분 2005년 산불 이후에 연결·보수하였다.

장대석 기단이나 자연석 석축 위에 기와와 흙을 차례로 다져 쌓고

원형 화강석을 박아 넣어 조형미가 뛰어난 조선시대 대표적인 담장이다.

원통보전의 담장은 법당이 성역 공간임을 구분하면서 원형 화강석은 벽면의 긴장감과 변화를 연출한다.  (안내문)

 

 

 

 

설선당

 

 

 

 

 

 

 

낙산사에서 세 군데 범종각을 본다.

 

응향각

 

빈일루

낙산 일출의 장관을 맞이한다는 건물이다.

누각에 올라가 일출을 맞기보다는 의상대나 홍련암이 장애물이 없어 훨씬 좋겠다.

 

 

동종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어 고향실 옆 종각에 보존되었으나 2005년 4월 산불로 소실·용해되어

2006년 10월에 복원하였다.

조선의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함으로써 중창이 시작된 것을 기리기 위해 1469년 예종의 명으로 주조되었다.

종명에 제작 연원과 주조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크기는 전체 높이 158cm, 입지름 98cm이다.

종 꼭대기 장식인 용뉴에는 쌍용이 서로 뒤엉켜 머리를 반대로 두고 천판을 밟고 있는 모습이 용맹스럽다.

종신 가운데 3줄의 횡대를 둘러 상하로 양분하였다.

종신 위쪽엔 연꽃잎 무늬의 띠를 두르고 보살 입상 4구와 범자를 양각하였다.

종신 아래쪽엔 장문의 명문을 양각하고 그 아래에 파도 무늬의 띠를 둘렸다. (안내문)

 

빈일루

 

사천왕문

 

사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찰을 지키면서 사부대중을 돕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사천왕을 모신 문이다.

3칸 규모의 내부에는 비파를 연주하는 동방 지국천왕, 장검을 들고 있는 남방 증장천왕,

용을 잡고 있는 서방 광목천왕, 불탑과 창을 들고 있는 북방 다문천왕이 있다.

1914년 문의 중수와 사천왕상의 개금이 이루어졌고, 1988년에 부수하였으며,

2010년 다시 문의 중수와 사천왕상을 개금 하였다.

1950년 6·25 전쟁과 2005년 양양 산불의 재난 속에서도 이 문과 사천왕상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안내문)

 

 

 

 

 

 

낙산배 시조 목

 

낙산 배는 조선 성종(1469-1494) 때에 주요 과수로 지정된 재래종 과실 배 품종이 주변에 재배되었다.

상품은 나라에 진상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기에 식재된 장십랑(長十郞)은 1893년 일본에서 개량되어

1915년 주지스님에 의해 도내 최초로 경내에 재배되어 현재까지 낙산배 명성을 지켜온 시조 목이다.

 

 

안에서 보는 홍예문

 

성곽처럼 아귀가 잘 맞는 돌담을 쌓고 돌문은 무지개 모양의 둥근 형태로 만들었다.

무지개 모양의 문이란 뜻의 홍예문 누각도 세웠다.

 

낙산사 일주문을 나오는 것으로 사찰 탐방을 마친다.

 

 

 

즐풍은 불교인이 아니기에 불교에 대한 이해가 적다.

간혹 불교 관련 유튜브를 보긴 했으나 볼 때뿐 별로 기억에 남는 것도 없다.

우리나라 사찰 특성상 깊은 산속에 있는 사찰은 산행하며 엄청 이 만났다.

어딜 가든 거의 비슷한 구조의 사찰이라 낙산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삼국유사나 동국여지승람 등에 낙산사를 누가 언제 건립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낙산사 안내문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알고 보면 낙산산는 낙산도립공원에 속한다.

낙산도립공원은 낙산해수욕장에서 남북으로 길게 하조대에 이르는 53km 구간이다.

해안 경관과 낙산사를 포함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2016년 해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