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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공원 탐방/북한산

북한산 백운대 찍고 노적봉에서 만경대 조망

by 즐풍 2020. 7. 9.

2020-49

 

 

 

2020.7.8. (수) 07:43~15:10(7시간 27분 산행, 14.3km 이동, 평속 2.2km/h) 흐림 

 

 

장마철에 접어든 지 제법 되었으나 큰비는 별로 내리지 않고 찔끔찔끔 내린다.

비가 오는 날보다 흐린 날이 더 많은데, 오늘은 하루 종일 맑겠단 예보다.

휴가 22일간 태안해안국립공원을 3일 탐방한 것 외에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산행한 적이 없다.

1년간 이어질 휴가 중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산행하겠단 생각은 처음부터 빗나간 셈이다.

 

오늘 산행하면 처음으로 다짐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날이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아무래도 정상을 찍어야 제맛이다.

당연히 북한산 백운대를 목표로 한다.

가고 가도 질리지 않는 숨은벽능선을 타고 정상을 찍는 게 북한산의 진면목을 정확히 보는 방법이다.

 

 

□ 북한산국립공원

세계적으로 드문 도심 속의 자연공원인 북한산국립공원은 1983년 우리나라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76.922㎢로 우이령을 경계로 하여 북쪽으로는 도봉산 지역, 남쪽으로는 북한산 지역으로 나뉜다.

북한산국립공원은 화강암 지반이 침식되고 오랜 세월 풍화되면서 곳곳에 깎아지른 바위 봉우리와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계곡을 이루고 있다.

2,000여 년의 역사가 담긴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 문화유적과 100여 개의 사찰,

암자가 위치하여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역사 문화 학습의 장이다.

                                                                                                                        출처_북한산 국립공원

 

북한산 등산코스

 

처음 북한산 산행할 땐 작은 돌 하나까지 관심이 많았다.

이 바위에 올린 돌이나 옆에 붙인 돌도 신기했는데, 어느 땐가부터 평범해진다.

이제부터 처음 하늘을 나는 어린 새처럼 세상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겠다.

 

모처럼 해골바위에 올라왔다.

옆 바위에서 찍어 보지만, 평면 사진이 아니니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송림제화 등산화라 릿지 기능이 약해 이 빨래판바위를 오를 수 없다.

다음에 캠프라인을 신었을 때 올라가 봐야겠다.

 

전망바위에서 바라보는 영장봉

하루 종일 맑겠다는 뉴스를 믿었는데, 가까운 영장봉도 가스가 차 잘 안 잡힌다.

 

발래판바위 위 전망바위에서 바라보는 해골바위가 제일 근사하다.

눈엔 저렇게 물이 고여 있어야 괴기하고 음산한 기운이 돈다.

외계인을 더 닮았다.

 

평일이라 국사당 앞 주차장도 텅텅 비었고, 등산객도 뜸하다.

6월 16일부터 시작된 휴가 중 3일 여행 간 것 외엔 딱히 다녀온 곳이 없다.

주말에 딸과 한 산행이 외출의 전부이다.

집에만 있으면 폐인이 될지도 모르니 주중에 날 좋은 날 잡아 이렇게 배낭 메고 어디든 다녀야겠다.

파랑새능선의 장군봉과 어금니바위다.

파랑새능선을 오르며 보는 어금니바위는 정말 어금니를 꼭 닮았는데, 멀리서 보니 송곳니처럼 생겼다.

 

말이 나온 김에 어금니바위 투하....

 

숨은벽능선에서 잠깐 비켜선 영장봉

 

바나나바위가 있는 암릉

 

바나나바위라고 하는 이도 있고 아기고래바위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보는 눈마다 느낌이 다르니 보이는 대로 느끼자.

 

여전히 느낌이 좋은 하경바위

 

왼쪽 인수봉과 오른쪽 숨은벽

이 숨은벽이 늘어져 긴 흐름을 가져 숨은벽능선이란 이름이 붙었다.

사기막골에서 올라온다고 사기막능선이라고도 하지만, 대세는 숨은벽능선이다.

 

 

지나 온 능선

 

호랑이굴을 지나는 협곡이다.

평소엔 백운대와 숨은벽 중간지점인 이 통로는 바람이 지나는 길목이라 늘 시원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이 통로에서 땀을 식힐 수 있겠거니 기대를 안고 올라왔다.

그러나 미풍도 없어 기대는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백운대라도 올라가면 바람이 불까?

 

 

백운대 돌아가는 길에 보는 인수봉

올려다본 백운대

스핑크스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큰바위얼굴이 더 어울린다.

백운대 길목을 지키는 수문장인 셈이다.

 

기상청아, 이게 하루 종일 맑겠다던 날씨냐?

오리바위

주말이면 사계절 내내 북적이던 백운대 계단도 평일이라 한산하다.

등산객에 치이지 않으려면 이런 평일 산행이 좋겠다.

 

이런 안전시설이 없던 백운대를 옛날엔 어떻게 올라왔을까?

아주 산을 잘 타는 산꾼이나 겨우 올라왔거나, 오를 수 없는 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비봉 역시 오르기가 쉽지 않은 봉우리다.

그런데도 신라의 진흥왕 순수비를 세운 걸 보면 대단하다.

비석은 비봉 위에 있는 적당한 바위를 깎고 다듬으면 되니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을 테고...

 

호랑이굴 협곡에서 백운대를 돌아 나무데크를 만나는 지점까지 300m에 12분,

나무데크에서 백운대 정상까지 300m에 25분, 총 600m에 37분 걸렸다.

간간히 사진 찍으며 이동했으니 1~2분 단축할 수 있다.

매주 산행하는 즐풍의 기준이므로 사람마다 다르다.

백운대 정상 찍고 내려가며 잠시 인수봉을 바라보며 쉬는 어느 부자의 오붓한 뒷모습이 아름답다.

 

3·1 운동 암각문

 

이 암각문은 3·1 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새긴 기록문이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네 글자와 함께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은 기미년 2월 10일 최남선이 작성하였으며

3월 1일 탑동공원(塔洞公園)에서 자신이 독립선언(獨立宣言) 만세를 도창(導唱)했다."라는 내용을 새겼다.

이 글을 새긴 시기는 3·1 운동 이후로 추정되며,

그 목적은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암각문을 새긴 정재용은 1886년 해주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로,

1919년 2월 19일 해주에서 상경해 3·1 운동의 불을 댕겼던 장본인이다.  (안내문)

 

국사당에 주차하고 숨은벽능선을 타고 백운대 정상까지 4.2km 거리를 두 시간 47분 만에 도착했다.

빠르지도 늦지도 않다.

날은 흐렸고 바람 한 점 없는 푹푹찌는 날씨다.

산에 오르니 좋긴 한데, 더위에 곯겠다.

정상의 태극기도 바람이 없으니 늘어져 쉬고 있다.

 

삼각산(三角山)

 

삼각산의 삼각(三角)은 백운대(836.5m), 인수봉(810.5m), 만경대(787m)를 말한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서 볼 때 이 봉우리들이 마치 세 개의 뿔처럼 보인다고 하여 삼각산이라 불렀다.

동명왕의 왕자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정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때의 부아악이 삼각산을 말하는 것이다.

삼각산 봉우리는 서로 형상을 달리하는 화강암으로 반구형 형태를 보이며,

산 사면의 경사는 대체로 70 º 이상에 달한다.

백운대 정상엔 약 500㎡의 평탄한 공간이 있어 수백 명의 사람이 앉아서 탁 트인 주변 경관을 즐길 수 있다.

동쪽에 자리 잡은 인수봉은 뿔 모양의 바위 하나가 우뚝 솟은 형상으로 암벽등반 바위로 유명하다.

동남쪽에 솟은 만경대는 국망봉(國望峰)이라고도 불렀다.

만경대에는 무학대사와 얽힌 이야기가 있다.

태조 왕사王師사)인 무학대사가 조선의 수도 후보지를 찾으러 순례할 때 백운대로부터 맥을 밟아

만경대에 이르러 서남 방향으로 가 비봉에 이르렀다고 한다.

거기에 한 석비가 있었는데, "무학이 길을 잘못 들어 여기에 이른다."라고 적혀 있어서

길을 바꾸어 내려가 궁성터(경복궁)를 정하였다고 한다.                                          (안내문)

 

왼쪽엔 계단을 만들었으나 오른쪽엔 맨바닥이라 등산객이 내려오는 기미가 없으면 편한 왼쪽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정상에서 한 30여 분 쉬고 내려올 땐 시간이 좀 지난 때라 서너 명 산객이 보인다.

 

노적봉으로 이동하며 보는 백운대 정상

 

노적봉이다.

이 사진을 찍는데, 지나가는 등산객이 저 노적봉에서 올라갈 수 있냐고 묻는다.

마침 즐풍이 가는 길이니 안내를 자처해 함께 오른다.

 

한 군데 그가 오를 수 없는 구간이 있어 좀 더 쉬운 코스를 안내해 겨우 함께 오를 수 있었다.

노적봉을 오를 때 한 사람은 자리를 펴고 백운대와 만경대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다.

근사한 작품이 나오겠다.

노적봉에서 바라보는 만경대

 

백운대와 인수봉

용암봉이다.

노적동봉으로 내려와 노적서봉을 올려가려고 하니 서봉은 도저히 못 오르겠다고 한다.

우이동으로 간다는 그에게 가는 길은 안내하고 용학사 뒤 돌탑 방향으로 길을 낸다.

용학사 뒤 돌탑이다.

막 이곳에 도착할 때 수십 마리의 까마귀 떼가 인기척에 놀라 하늘로 날아오른다.

불청객이 나타나 그들을 휴식을 방해했으니 미안하다.

잠시 쉬며 간식을 먹다가 빵 몇 조각을 남겨놓으며 미안함을 달랜다.

 

용학사를 통과하지 않고 하산하며 잠시 산영루에 들린다.

겨울엔 산영루 앞 큰 바위에서 사진 찍어도 문제가 없었는데, 이젠 나무에 가려 장소를 이동해야 했다.

아래쪽에서 잡은 산영루 풍경이다.

 

중성문에서 의상능선으로 올라가는 북한산성 성벽이다.

대서문에서도 의상능선으로 연결된 성벽이 있으므로 이중 성벽인 셈이다.

 

중성문과 노적봉

 

중성문과 시구문, 수문이 바위로 연결되어 있다.

절묘한 지형지물을 이용한 중성문으로 대서문과 한 쌍인 중성(重城) 됐다.

중성과 연결된 두 대의 바위 사이에 덮개를 씌운 평거식 암문이다.

양쪽 바위를 깎아내고 지도릿돌을 설치해 대문을 달았던 흔적도 보인다.

북한산 원효봉 아래쪽 서암문도 일명 시구문이니 북한산성에 시구문이 두 개인 셈이다.

 

수문(중성문)

 

중성문(中城門) 옆에 설치한 수문(水門)의 터로 북한산성에 설치한 2개 수문 중 한 곳이다.

수문은 성벽 하단에 문을 내어 성 안의 물을 밖으로 흘려보내는 배수 시설로,

적의 침투에 대비한 철책 시설도 갖추어 놓았다.

이 수문 터에는 지금도 축성 당시의 수문 흔적이 남아 있다.

수문 성벽을 쌓을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큰 바위를 층층이 깎아 내어 계단처럼 조성해 놓았다.

북한산성 성곽 공사는 1711(숙종 37)에 마무리되었으며,

이듬해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숙종 임금이 북한산성에 행차했다.

이 행차에서 숙종은 '북한산성 북서쪽 지역이 평탄해 적에게 쉽게 함락될 소지가 있으니

다른 성을 더 쌓아 방비하자.'는 내용의 '중성(中城) 축성안'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1714년에 북한산성의 내성에 해당하는 중성을 축성했으며,

이 중성의 계곡부에 설치한 시설물이 중성문과 수문이었다.

1745년(영조 21)에 편찬한 "북한지(北漢誌)에는 수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중성의 수문은 30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수문은 오른쪽에 물길 건너 바위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

서로 나무를 덧대 물을 막았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북한산 역사관을 지나 산성계곡으로 내려와 바로 만나는 원효교를 넘어 덕암사 경내를 지나왔다.

덕암사는 주지 스님이 바뀌었는지, 아미타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시구문으로도 불리는 서암문이다.

 

산성계곡으로 하산해 버스를 타고 차량을 회수할 생각도 했으나 남는 게 시간이다.

노느니 시적시적 북한산 둘레길을 걸어서 주차된 곳으로 이동한다.

 

효자길 구간의 Y자형 나무

 

바람 한 점 없는 염천이라 세탁한 배낭도 땀범벅이다.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도 이미 물이 말아버려 반대로 내려가니 물이 흐른다.

그런데 하수처리가 안 된 굿당에서 시궁창 물이 흘러 몸을 씻을 수 없다.

결국, 옷만 갈아 입고 차량을 회수하며 귀가한다.

덥고 힘든 산행을 이렇게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