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26. (일) 고령산-마장호수공원-계명산 산행 끝내고 잠시 탐방
산행을 끝내고 귀로에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을 볼 생각에 용암사를 들린다.
아주 오래 전 마애이불입상을 본 이후 처음이라 용암사에 있다는 것조차 기억에 없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용암산 대웅전이다.
용암사(龍岩寺)
용암사는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에 위치한다.
고양시 벽제동에서 광탄 방향의 혜음령 고개를 넘으면 국보 제93호인 용미리 마애이불입상(磨崖二佛立像)을 만난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제13대인 선종(1083~1094) 때 마애이불입상과 절을 조성한 설화가 전한다.
약 900여 년 전인 11세기 말을 창건연대로 잡고 있다.
조선시대 기록은 없으나 전란에 의해 한동안 절이 소실되었고,
근대인 1930년에 재창건 되었으며, 1935년 4월 대웅전 3칸을 재건했다.
당시 주지인 장선환 대사가 혜음사, 대승사로 불리던 이름을 용암사로 바꾸었다.
1954년 10월, 이승만 대통령, 함부통령 등 각계 인사가 참석하여 칠층 석탑 및 동자상 제막식을 거행했다.
1970년 봉덕사 종을 본 따 제작한 범종(높이 187cm, 종구 115cm)을 안치한 범종각도 있다. (안내문 편집)
약사여래불 옆 계단을 따라 마애이불입상을 뵈러 간다.
마애이불입상에 얽힌 설화
보물 제93호인 이곳 석불입상과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고려시대 중기 13대 선종(宣宗)은 자식이 없어 셋째 부인인 원신궁주 이 씨를 맞이했으나 여전히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어느 날 궁주의 꿈속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오.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주시오."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꿈에서 깬 궁주는 이 내용을 왕께 아뢰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여 장지산 아래 큰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다.
그 해에 원신공주는 태기가 있었고, 왕자인 한산후(漢山侯)가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안내문)
안내문에 한산후(漢山侯)의 한자를 候로 잘못 기재했기에 용암사에 전화하니 시에서 작성했다고 한다.
파주시청 홈피에 제공된 내용도 같아 담당에게 직접 전화해 수정을 안내했다. 오류가 수정되길 바란다.
마애이불입상 한 칸 아래에서 올려다본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磨崖二佛立像) 보물 제93호
거대한 바위에 2분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다.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기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날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 모양이 다를 뿐 신체 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고 한다.
고려 선종은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장지산에 사람을 보내 알아오게 하였는데,
산 아래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侯)가 탄생했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 것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로 미루어 당시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안내문)
마애이불입상에 올라오니 어느 외국인이 오래된 사진관에서 찍는 카메라를 삼각대에 받치고 사진을 찍는다.
외국인도 우리 문화재에 관심 갖고 정성스럽게 사진 찍으니 보기 좋다.
불상을 자세히 보면 얼굴과 몸에 총탄 자국이 보인다.
6·25 전쟁 때 멀리서 조준 사격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던 시절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마애이불입상 아래 있는 삼성각
범종각
해동의 명장 윤관 장군
해동의 명장이라 불리는 윤관은 문무를 겸한 고려 때의 공신이다.
본관은 파평이며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윤관은 1107년 대원수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특수부대인 별무반을 창설하여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했다.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획정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이곳 윤관 묘역은 상당히 크고 웅장하여 봉분과 석물이 단을 이룬다.
봉분은 아래에 장대석 모양의 호석을 두르고 봉분 뒤로는 담장을 둘렀다.
봉분 앞에 상석이 있고 왼쪽에 묘비가 있으며 그 아래 망주석이 서있고,
더 아래에는 장명등을 중심으로 동자석,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마 등이 양편에 있다.
묘역 아래 윤관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여충사(麗忠祠)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지낸다. (안내문)
사적 제323호로, 지정면적은 16,938㎡이다. 이 묘소는 1111년(예종 6)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500여 년이 지난 임진왜란 전후까지 후손들에게 그 소재가 확인되지 않다가
1764년(영조 40) 윤관의 구비파편(舊碑破片)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영조가
봉분을 새로 조성하고 치제(致祭)하게 함으로써 윤관의 묘소임을 공인하게 되었다.
1766년 묘 앞에 현존하는 묘비를 세워 묘소를 찾게 된 경위를 기록하였다.
묘역시설로는 여충사(麗忠祠, 1979년 건립)ㆍ묘비(墓碑)ㆍ분수재(汾水齋)ㆍ교자총비(橋子塚碑),
철종 12년 건립하였으며 윤관이 출정 때 하사된 교자를 사후에 부장한 것 등이 있다.
이 묘소를 사적으로 지정한 것은 묘소의 고고학적인 측면보다는 윤관이 견지하고 실행하였던
북방강토 수호 및 개척의 사실을 널리 알리고, 계승함에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윤관 장군 묘
윤관(1040~1111)은 고려 예종 때 여진 정벌의 공이 큰 고려의 명장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파평,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했고, 1104년 동북면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通使)가 되어
고려의 변방을 침범하던 여진을 정벌하였다.
이때 특수부대인 별무반을 창설하였으며, 1107년 대원수가 되어 부월(斧鉞)을 하사 받았다.
그 이후 연총을 부원수로 하여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였다.
이 정벌로 여진을 두만강 북쪽 700리까지 몰아내고 9성을 축조하였으며,
선춘령에 고려정계비(高麗定界碑)를 세웠다.
1111년 5월 8일(음력) 72세로 서거하였으며, 1130년 예종의 묘정배향공신(廟庭配享功臣)이 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0일과 10월 5일 여충사에서 제향을 올린다. (안내문)
[에세이 오늘] 산송(山訟) 400년
조선왕조실록 영조 41년(1765)의 기록
윤 2월 23일, 임금이 밤에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심정최와 윤희복을 친문(親問)한다.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가문의 산송(山訟·묘지 소송) 때문이었다.
두 문중의 산송은 16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주에 고려 시중을 지낸 윤관의 묘가 있었는데 실전(失傳)됐다.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이 그해 아버지의 묘를 윤관의 묘역 바로 위에 조성했다.
1658년에는 조정에서 이 일대 땅을 하사 받아 문중 묘역으로 삼았다.
심지원도 1662년 이곳에 묻혔다.
그의 묘는 윤관의 묘에 압장(壓葬)한 모양이었다.
압장이란 분묘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후손을 매장하는 형태로 조선 시대에는 금기였다.
심지원이 죽고 100년이 지났다.
1763년 윤씨 문중에서 윤관의 묘를 찾다가 심지원 묘 앞에 조성된
계체(무덤 앞에 편평하게 만들어놓은 장대석)를 허물었다.
심씨 문중은 격분해 고양군수에게 심지원의 묘를 훼손한 윤씨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명문가의 분쟁을 감당하기 어려운 고양군수가 문제를 중앙정부에 넘겨 영조까지 나서게 된 것이었다.
임금이 윤관과 심지원의 묘를 그대로 받들라 했으나 윤씨 문중은 물러서지 않았다.
영조는 "엄하게 처치하지 않으면 기강을 무너지게 하고 풍화(風化)를 위태롭게 하는 일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라며
일흔한 살 노구를 이끌고 친문에 나섰다.
옥체를 상할까 두렵다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밤을 새워 친문한 다음
심정최와 윤희복에게 모두 벌을 내리고 귀양까지 보냈다.
일흔 넘은 노인이던 윤희복은 귀양 가는 도중에 죽었다.
양가의 산송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는 조선의 권문세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역대 인물 종합정보'에 따르면
파평 윤씨 문중에서 문과 급제자 346명, 무과 급제자 317명이 나왔다.
왕비를 가장 많이(4명) 낸 가문이기도 하다.
청송 심씨는 문과 급제자 198명, 무과 급제자 131명을 냈다.
왕비는 셋이 나왔고, 정승 열세 명 가운데 아홉 명이 영의정이었다.
명문가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니 어느 쪽도 물러서기 어려웠다.
두 문중은 2005년에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이 해 8월 4일 심지원의 묘를 비롯한 청송 심씨 종중 묘 열아홉 기와 신도비 등을
파평 윤씨 문중이 제공하는 2500여 평으로 이장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두 문중의 대종회는 2006년 4월 10일 이 같은 합의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해묵은 산송에 종지부를 찍었다.
심지원이 윤관의 묘에 아버지를 안장한 지 392년, 영조가 친문한 지 241년 뒤의 일이었다.
양 문중은 합의서에 "조상을 바로 섬기려는 신념에 의한 것이었으나
세상에는 자칫 곡해될 우려가 있어 대승적인 결정으로 400년간의 갈등을 해소하기로 한다"라고 적었다.
그 뒤에는 "두 종중은 서로 존중하고 서로 선대 분묘도 공경하며 영구적으로 관리하도록 협조한다"라고 명시했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집을 지을 때나 묏자리를 잡을 때 풍수지리를 살폈다.
특히 조상의 묏자리를 잘 쓰면 자손들이 복을 받는다고 믿는 '음택 풍수'를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윤씨와 심씨 가문의 분쟁은 길지를 다투는 탐욕의 결과라고 보기 어렵다.
오직 가문의 명예와 조상의 안녕을 구한 정성의 발로였으리라.
그랬기에 명예로이 분쟁을 끝내 새로운 역사를 기입할 수 있었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아시아경제 2020.4.20. 기사 옮김)
왼쪽부터 석마(石馬), 무인석, 석양, 문인석, 동자석이다.
문인석은 후대에 세운 것까지 두 개가 같이 있다.
묘소 왼쪽에 묘비가 있고, 가운데 상석, 앞 양쪽에 망주석이 한 쌍 놓여 있다.
묘비
정면에서 보니 석양과 석마는 문인석, 무인석보다 두 발 뒤에 놓여 있다.
왼쪽 윤시중교자총비, 오른쪽 전마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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