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28. 10:28~17:20(산행시간 06:52, 이동거리 11.06km, 휴식시간 01:03, 평균속도 1.8km/h) 맑음
늘 그 자리를 장중하게 지키고 있는 산을 등산객은 저마다 다른 생각으로 오른다.
어떤 사람은 산행이 쉽기를 바라고, 또 어떤 사람은 풍경이 좋기를 바란다.
계절에 따라 안개가 깔리길 바라거나 단풍, 또는 상고대가 가득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풍경이 좋으면서도 화려함을 취하니 대개는 바위가 많은 산을 선호한다.
이미 두 차례나 올랐던 월악산은 비탐방로를 제외한다면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다.
들머리는 보통 수산리와 동창교, 덕주골 등 세 방향에서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번 산행은 월악산에서도 가장 화려한 만수봉 암릉 골짜기 아래 있는 신륵사가 들머리다.
잘 연구하면 오랫동안 갈망했던 만수봉 암릉을 얼마간 탈 수 있게 생각이 든다.
지도를 보면 신륵사에서 만수봉으로 올라가는 코스가 없으니 숲을 헤쳐야 하는 난관이 기다린다.
어쩌면 신륵사 어디쯤에서 적당히 올라갈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길이 없다면 새로 길을 내면 되고 다행히 길이 있다면 천운이다.
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안전을 염두에 두고 긴장과 기대감을 배낭에 담는다.
어느 산이라도 정상을 목표로 진행되겠지만, 만수봉을 오르다 보니 시간상 정상인 영봉은 제외시킨다.
다소 아쉬움은 남아도 누구나 다 가는 산행이 아니라 때로는 나 혼자 가는 산행도 필요하다.
워낙 많은 사람이 다녀 어디로 들어가도 흔적이 있는 북한산과 달리 혼자 모르는 길도 목표를 두고 개척한 산은 많다.
최근에 다녀온 황장산 700봉 능선이나 속리산 산수유 릿지, 구담봉에서 질러간 옥순봉이 그렇다.
월악산 만수봉 등산코스
신륵사를 잠시 둘러보았으나 대웅전은 수리 중이라 가림막으로 가렸고 절은 그저 단출한 살림으로 보인다.
여주 남한강 변에만 있는 줄 알았던 신륵사가 이곳에도 있는데, 살림의 규모가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대웅전 앞엔 삼층석탑이 있으나 뒤에 대웅전 공사로 가림막이 보여 석탑을 올리지 않는다.
주차장에서 잠깐 거리에 있는 신륵사로 오는 동안 바로 만수봉으로 올라가는 들머리는 없기에 반대로 길을 내려간다.
길을 내려가면서 보니 큰 능선과 능선이 겹쳐지는 곳의 계곡으로 올라가는 게 길 없는 능선보다 편하겠단 생각이 든다.
작은 개울을 건너가니 비포장도로인 임도가 보인다.
얼마큼 올라가다 보니 돌무더기 비탈이 보이길래 올라가 방향을 확인한 후 갈길을 잡는다.
돌무더기에서 보는 반대편 능선은 단풍이 절정이다.
지난주 수요일 북한산 중턱까지 내려왔던 단풍은 제법 거리감이 있는 이곳 제천도 이젠 예외 없이 벌써 온 산이 붉게 물들었다.
임도는 꽤 긴 거리를 산속으로 들어간다.
워낙 깊이 들어가는 느낌이라 방향 확인을 위해 트랭글을 켰으나 지나온 궤적만 붉은 선으로 보일 뿐 지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산이 깊어도 GPS는 수신되어 궤적은 나타나지만, 인터넷과 접속이 안 돼 트랭글에서 제공하는 지도는 보이지 않는다.
어제 사무실에서 지도를 봤을 때 만수봉 능선까지 제법 거리감이 있었으니 느낌을 믿고 더 들어가 본다.
이런 편안하고 운치가 있는 길을 혼자 걷는다는 게 매우 사치스럽게 느껴질 만큼 행복하다.
새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햇살을 받아 더 고와 보이는 단풍이 잘 정리된 화원을 걷는 느낌이다.
이 길을 나 혼자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든다.
나중에 트랭글 지도로 확인했을 때 이곳이 흙메기골이란 걸 알게 됐다.
흙메기골은 계곡이 짧아 물만 없을 뿐이지 주왕산의 절골계곡과 비슷한 느낌이 묻어나는 곳이다.
얼마큼 가는데 웬 여자 두어 명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지 않기에 가까운데 등산로라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등산로는 없다.
그렇다고 이쪽으로 굳이 올라야 할 만큼 만수봉 능선이 가까운 것도 아니니 이상하다는 생각도 잠시뿐 곧 잊어버리고 만다.
나중에 귀가하여 거의 집에 도착할 때 즈음 내가 뭔가에 홀렸든가 환청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에도 강남 7 산 종주하며 혼자 밤중에 삼성산을 걸을 때 남자 서너 명이 멀지 않은 곳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누구냐고 하니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이런 환청이 들리다니 잠깐 내 기운이 허했던 모양이다.
신륵사에서 2.9km 정도 들어서자 임도는 끝난다.
여름철 수량이 많을 땐 세상과 단절된 자연인을 느끼고 싶다면 이곳에서 비박을 하다면 안성맞춤이겠다.
좀 더 올라오자 전에 숯가마였던 거로 추측되는 작은 웅덩이에 돌로 쌓은 담장과 화구(火口)가 보인다.
숲이 깊고 나무가 울창하니 숯을 내기 적당한 장소다.
너무 멀리 가다 엉뚱한 데로 빠질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적당한 곳에서 치고 올라간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왔으니 길이든 아니든 상관없으나 너무 가파르거나 나무 또는 바위가 길을 막아서 길은 한없이 더디다.
기껏 능선을 잡아타고 진행하다 보면 수직 절벽이라 다시 한참을 돌아가기도 한다.
그런 고생 끝에 드디어 만수봉 능선이 가까워졌으니 일단 안심이다.
더 멀리 영봉과 그를 떠받치는 붉은 단풍도 보이나 미세먼지로 선명하지 못한 게 아쉽다.
드디어 길을 찾았다는 안도감에 참고 있던 허기가 밀려온다.
점심을 먹고 4.2km 지점에서 만수봉 능선을 만났으니 꼭 두 시간 27분 만이다.
주어진 일곱 시간 중 벌써 두 시간 반을 썼는데, 이 시간이라면 신륵사에서 영봉을 가는 회원들은 벌써 영봉에 도착했을 시간이다.
하지만 남은 거리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늦지 않기 위해 지체하지 않고 걷고 또 걷는다.
흙메기골에서 길 없는 구간을 지나며 겨우 올라왔던 구간의 일부로 안부를 지나 바위가 있어 우측으로 돌아가야 했던 곳을 뒤돌아 본다.
가야 할 방향인데 능선이 길고 업다운이 심해 이 구간을 헤치는 동안 거의 쉬지를 못해 다리엔 극심한 피로가 몰린다.
사실 만수봉 능선은 화려한 구간으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등로를 타자 기대만큼 화려하진 않다.
차라리 반대편으로 내려갔으면 더 좋았을지 모르겠단 생각을 이 포스팅을 작성하며 잠시 가져 본다.
방금 지나온 봉우리
어느 쪽이든 보이는 숲은 온통 단풍이 절정인 이런 모습을 보노라니 내 몸도 같이 절정으로 치닫는 느낌이다.
신륵사에서 월악산 정상인 영봉으로 오르자면 대개 숲 속을 지날 테니 조망은 없겠다.
그들과 떨어져 혼자 임도에 펼쳐진 화려한 단풍 터널을 지나 이제 만수봉에서 암릉 미를 즐기고 있으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 가운데 계곡으로 쭈욱 내려가면 덕주사를 만날 수 있다.
계곡과 능선을 넘고 넘어 끝없이 펼쳐진 산세가 이 지역도 전형적인 산악지역이란 걸 알 수 있다.
앞으로 가야 할 방향과 그 뒤로 월악산 정상인 영봉도 보인다.
병풍인 듯 암봉이 화려하게 펼쳐졌으니 저 구간을 다 지날 때까지 아직 느껴야 할 비경이 많이 남았다.
지금까지 지나온 구간과 가야 할 구간 모두가 월악산의 진경이다.
지나온 구간
어느 한쪽은 숲으로 채워지고 또 어느 한쪽은 암봉을 드러냈으니 이런 양면을 가진 산을 보기도 쉽지 않다.
온 산을 붉게 물들인 단풍, 또 얼마간 기간이 지나면 이제 헐벗은 산하로 바뀌며 혹독한 겨울을 견뎌야 한다.
갑자기 나타난 큰 소나무를 다 담아낼 만큼 공간이 넉넉하지 못해 아래쪽 가지만 담아본다.
그리고 만수 구간을 통틀어 가장 위험하고 난해한 직벽 구간을 이 소나무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이 소나무는 올라온 사람들에겐 잠시 휴식을, 내려갈 사람들에겐 긴장을 풀고 여유를 가지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느낌이다.
건너편 절벽
두 번째 절벽도 이 정도라면 무난히 통과
절벽은 크게 3단으로 구성되었다.
좀 전의 소나무에서 내려오는 절벽엔 약 7~8m, 그런대로 잡을 곳도 많고 로프로 있어 무난하다.
그 사진은 생략하고 이게 맨 아래 있는 세 번째 절벽으로 약 10여 m의 높이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로프가 설치되어 잡고 내려오긴 했으나 오래된 데다 시원치 않아 보여 다소 걱정스러웠다.
올라갈 땐 로프를 잡지 않고 우측 비탈을 이용하는 게 더 편하겠단 생각이지만 내려올 땐 로프가 더 안전하겠다.
이 단애를 내려서면 바로 맞은편 절벽을 타고 올라야 한다.
나중에 이 구간을 정비하고 개방할 때 상부에 짧은 다리 하나만 설치해도 이런 개고생은 안 하겠다.
다시 올라가야 할 절벽이지만, 워낙 홀더가 좋고 계단식이라 무리 없이 올라갈 수 있다.
이런 쉬운 구간도 지나고...
좀 전의 그 3단 절벽이 가장 위험한 구간으로 그곳만 통과하여 능선에 올라서면 그것으로 마의 구간은 끝나게 된다.
잠깐 걷는 사이에 덕주봉 정상이다.
덕주봉 정상엔 만수봉으로 가는 길을 담장을 막아놓았다.
막아놓았다는 건 상징일 뿐이지 그 길이가 불과 10여 m도 안 되니 옆을 돌면 언제든 갈 수 있다.
하지만, 그곳을 통과해 만수 릿지를 즐기고자 한다면 전적으로 위험과 안전산행 모두는 각자의 몫이다.
덕주봉에 도착하자 영봉은 못 가더라도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찍어볼 생각에 헬기장까지 가보기로 하고 길을 낸다.
한참을 걸어도 끝이 안 보여 그냥 중간에서 포기하고 되돌아온다고 시간만 낭비했다.
하산길에선 쉬운 길은 포기하고 오른쪽 능선인 어려운 길로 내려서며 지나 온 봉우리를 담아본다.
좀 전에 많은 고생을 하며 지나온 만수봉 일원
어려운 길이라지만 위험한 곳엔 계단이 설치되어 이젠 쉬운 길이 되었다.
상덕주사에 내려앉은 단풍과 사찰이 잘 어울린다.
앞에 서있는 은행나무에도 노란 단풍이 절반이나 들어 며칠 후면 더 예쁜 모습을 보여주겠다.
덕주사 마애여래입상(보물 제406호)
월악산 남쪽 기슭의 상덕주사 극락보전 동편의 큰 바위에 조각한 불상이다.
불상은 입상으로 얼굴은 두드러지게 새겼지만, 신체는 얕게 새겼다.
바위의 곡면을 버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턱으로 사용한 지혜가 놀랍다.
불상의 입술 라인엔 목조 전실을 만들기 위한 구멍이 남아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나 전래 이야기로는 통일신라 말기 마의태자의 누이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품고 이곳에 들어왔다.
그는 자기의 형상을 마애불로 조성했다고 전해지나, 머리가 크고 비만하게 표현된 양식을 살펴볼 때 고려 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편집)
월악산 정상에서 조망하던 원거리 단풍과 달리 가까운 곳에서 만나게 되니 색감이 너무 좋다.
유독 붉은색이 진해 더 눈이 간다.
상덕주사의 마애불을 보고 한참을 더 내려와 덕주사에 도착했다.
남근석이래 봐야 인공적인 느낌이 강한 세 개의 돌보다 그 해석이 충실해 해설서부터 게시한다.
덕주사 경내
덕주사 대웅보전
덕주사에서 올려다본 만수봉 일부
오늘 월악산을 탈 기회가 생겨 오랫동안 계획했던 만수봉 릿지에 도전했다.
만수봉을 다 타자면 상당한 거리겠으나 들머리인 신륵사에서 시작해 그 절반도 타지 못했어도 느낌이 강한 산으로 남는다.
더구나 아무도 찾지 않는 흙메기골의 단풍이 그렇게 멋지다는 걸 나 혼자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이제 이 포스팅을 보고 가을철 월악산의 흙메기골을 알고 찾아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길 기대한다.
비록 정상인 영봉을 밟지 않았어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멋진 만수봉의 단풍산행이었다.
덕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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