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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국립경주박물관과 인근 유적

by 즐풍 2019. 5. 22.

 

 

 

 

2016.2.5. 금(연가)     날씨: 맑음

 

내일부터 2016년 설연휴가 시작된다. 이번 설연휴는 토요일 포함하여 5일동안 계속되지만, 금요일인 오늘 연가를 냈다.

연휴 전날이라면 도로는 그리 크게 막히지 않고 잘 달릴 것으로 예상된다. 결과는 적중했다.

일산에서 경주가는 첫차는 08:10으로 좀 늦은 시각에 출발하지만, 중간에 한 번 쉬고 큰 막힘 없이 12:45분에 경주에

도착했다. 몇년 전만 해도 설이나 추석연휴엔 도로가 꽉 막혔으나 요즘은 실시간으로 제공되는 교통정보때문인지 대체로

원할한 편이다. 더군다나 고속버스야 버스전용차로를 달리니 더 막힘이 없다.

 

경주에 도착해 점심을 먹으려고 보니 칼치조림이 간판메뉴에서 자주 보인다. 경주지역 대표음식인가보다 생각하고 식당

에 들어서니 요즘 칼치의 품귀현상으로 구경조차 할 수 없다. 하여 무난한 김치찌개로 점심을 해결한다.

 

식후에 택시로 신라시대 문화재가 있는 경주국립박물관으로 발길을 향한다. 매표소는 있지만 고맙게도 무료관람이다.

2~3층이 전시관으로 많은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다. 그중엔 꽤 무거워보이는 금귀걸이도 있다. 당시에도 귀를 뚫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도 제법 무거우니 귀에 걸면 귀가 축 늘어졌겠단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금관의 장식은 현대의 금세공과 비교해도 별로 뒤떨어지지 않아 보인다. 금뿐만 아니라 석물의 가공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앞서있다. 석굴암 부처님이나 다보탑, 그리고 수없이 많은 지역에 산재한 마애불상 등은 지금도

재현하기 힘든 문화재이다. 시대를 앞당기면, 청동기시대의 청동거울에 조각된 다뉴세무늬는 지금 기술로도 도저히 재현

할 수 없다고 하니 2천년 전의 기술이 지금보다 앞선다는 아니러니가 생긴다.

 

박물관이라 카메라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후레쉬 없이 한두 장 찍어보지만 조명이 흐린데다 접사기술이 없어 사진이 영

시원치 않다. 대부분은 그냥 눈으로만 감상한다. 이러한 문화재를 감상하며, 일제시대와 근현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문화

재가 약탈과 헐값에 국외로 반출됐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크다.

그 시절, 우리가 최강대국이라고 알고 있던 중국마저도 돈황석굴에 있던 엄청난 유물을 비롯해  수많은 문화재가 서구열강

등 외국으로 밀반출되었다. 중국의 사정이 사정이 이러할진데, 약소국인 우리야 더 말해 무엇하랴.

 

 

산천 어디선가 방치되던 삼층석탑을 박물관 뜰에 세웠다.

도굴꾼들이 쉽게 가져갈 수 있는 작은 크기다. 석탑에겐 여기가 안전지대인 셈이다.

이렇게 작은 문화재가 도굴꾼들에게 팔려 돈 많은 집안의 장식품으로 팔려나간 게 얼마나 될까?

 

 

이차돈 순교비, 목이 잘리고 몸에서 피가 뿜어져나오는 형상이 그 순간을 다시 보는듯 생생하다.

 

 

얼굴무늬수막새, 신라인의 미소를 보는듯 정겹다.  

 

 

석굴암에 있는 여러 불상을 탁본해 입체적으로 다시 설치했다. 참 좋은 시도로 보인다.

 

 

여러 모양의 불상, 하나같이 광배를 표현한 모습이다.

 

 

 

 

 

 

 

 

 

성덕대왕 신종, 소위 말하는 에밀레종으로 더 많이 알려진 국보 29호다. 종 중에서 비천무만 두 장 담아본다.

 

 

 

석조관음보살입상

본래 이 보살상의 머리와 몸은 따로 전하다가 머리는 일찍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몸체는 경주 낭산  서쪽 기슭 능지탑 근처에 반쯤 묻혀 있었다. 1975년 몸체를 조사할 때,

그 동네에 살던 노인 한 분이 "이 불상의 머리는 경주박물관에서 가져갔는데, 그 모양새가

여느 불상과는 달리 길쭉했다. "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로써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전시중이던 보살의 머리가 낭산에 있는 보살 몸체와 하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1997년 4월에는 몸체가 묻혀 있던 부근에서 연꽃 대좌를 발

견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특별전시관엔 일본 고훈(古墳)문화재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당시 일본문화를 이해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된다.

고훈문화재 특별전 사진은 담지 않았다.

 

 

경주국립박물관을 나서면 몇 걸음 걷지 않아 월성에 도착한다. 월성은 신라의 왕궁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발굴공사로 천막을 깔고 해동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유물이 수습되고

숨어 있던 역사를 밝혀낼지 궁금하다.

 

 

 

 

 

 

 

 

 

 

 

경주 석빙고(보물 제66호) 길이 19m, 너비 6m, 높이 5.45m, 조선시대 1738년(영조 14년)

이 석빙고는 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는 얼음 창고이다. 석실은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졌는데 약 1,000여 개의 돌이 쓰였고 천장 외부는 봉토의 형상을 하고 있다.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천장에는 공기구멍 셋이 있고, 바닥은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홈을 파서 비스듬하게 만들었다.출입구는 남쪽

에 있고 계단을 통하여 출입하게 되어 있다.

석빙고 출입문 이맛돌에 영조 17년(1741년)에 옮겨 세웠다고 적었다. 옆에 있는 석비에는 "경주 부윤 조명겸

이 얼음 창고를 돌로 만들었다가 3년 만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적혀 있다. 

 

 

 

월성은 조그만 야산에 세워졌다. 월성에서 잠깐 내려서면 인근에 있는 계림에 다다른다.

 

계림은 첨성대와 월성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경주 김씨의 시조인 알지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신라 탈해왕 때 호공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나뭇가지에 금궤가 빛을 내며 걸려 있

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내렸다. 뚜껑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하여

성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 하고, 본래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 하던 이 숲을 계림(鷄林)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김씨의 원래 발음은 "금"이었다. 그러던 게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나자, 쇠(金)가 나무(木)를

자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금을 "김"으로 발음하도록 명했다는 얘기가 있다.

작곡가이자 음악가인 금수현의 아버지는 김득천이다. 금수현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금"씨임을 고집해 그의

자녀들 성까지 금씨임을 고집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계림 숲 

 

 

 

 

 

계림에 있는 왕릉

 

 

 

 

 

 

 

 

 

 

 

 

 

 

왕릉 한 쪽엔 이런 주춧돌이 보인다. 왕릉을 관리하는 제실이었거나 종묘가 있던 자리가 아닐까?

 

 

머지않은 곳에 첨성대가 있다.

 

첨성대(국보 제31호)

이 첨성대는 신라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다. 화강석을 조성함 기단 위에

27단의 석단을 원통형의 곡선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장대석을 우물정자형(井)으로 축조하여 정상부에

서 천문을 살피도록 설치하였다.

정남쪽의 석단에는 아래로부터 제13단과 제15단 사이에 네모난 출입구가 있어 내부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고, 이 출입구 아랫부분 양쪽에는 사다리를 걸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이곳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

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밑변의 지름이 5.17m, 높이가 9.4m이며 지대석 한 변의 길이는 5.35m이다. 신라시대의 석조물로

직선과 곡선이 잘 어우러진 안정감 있는 건축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