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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공원 탐방/한려수도해상

남해 금산 탐방기

by 즐풍 2019. 6. 12.

 

 

 

 

산행일자 2015.10.3.토 14:10-16:05(세 시간 55분 산행)    날씨: 맑은 후 흐림

 

 

섬 산행은 육지 산행과 사뭇 다르다. 날씨만 좋다면 탁 트인 시야며 인근의 푸른 바다와 다른 섬들 조망까지 색다름이 매력이다.

이런 섬 산행 경험은 많지 않다. 사량도 지리산 두 번에 인천 석모도의 해명산 두 번이 전부다. 아 참! 제주도 한라산도 있구나.

다시 생각하니 강화도 마니산이나 고려산, 혈구산은 자주 다녔지만, 강화도는 섬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육지와 붙어 있다. 

이번 남해의 금산을 가게 됨으로써 섬 산행 경력이 하나 더 는다. 도체 남해 금산이 어딘가 궁금해 찾아봤다.

 

행정구역은 경남으로 섬 전체가 남해군이며, 지난봄에 다녀온 사량도와 지척에 있다. 섬 북쪽은 경남 하동군과 연륙교인 남해

대교로 연결되어 있고, 창성면은 늑도, 초양도, 모개도를 거쳐 경남 사천시와 연륙교로 연결돼 있다. 섬 두 곳이 육지와 연륙교

로 연결돼 차량으로 출입이 가능한 육지화 된 섬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 큰 섬이다. 서울에서 남해바다인 최남단 섬까지

긴 원정을 가는 셈이다.

 

이 남해군에 있는 금산은 경남 거제시, 통영시, 사천시, 하동군, 남해군, 그리고 전남 여수시 등 6개 지구로 나누어진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한 구간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대표 탐방로인 금산은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바닷길 풍경이 유명하다.

금강산을 닮았다 하여 소금강 또는 남해 금강이라 불린다. 금산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고 온 산을 비단으로 덮으려

다 여의치 않자 이름을 비단 금자 금산이라 바꿨다는 건국신화를 간직한 명산이다.

 

금산에 있는 보리암은 전국 3대 기도 도량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3대 관음 도량 기도처는 동해안에는 낙산사 홍련암, 서해안은

석모도 보문사, 남해안은 남해 보리암이다. 이 3곳 기도처의 공통점은 모두 기운이 뭉쳐진 바위산 끝자락에 암자가 자리 잡고

으며, 탁 트인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점이다. 보리암은 뒤로는 기암절벽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앞으론 바다가 펼쳐진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남해 금산 등산코스   

 

 

 

서복상

서복은 중국 진시황제의 명을 받아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찾아와 발자취를 남겼다고 전한다. 다음 사진은 남해 양아리

석각으로 서복이 이곳을 지난다는 의미로 새긴 것이다. 하지만 그 글자는 한자가 아니므로 여러 가지 억측이 난무한다.

이 서복 상(像)은 중국 서복회에서 상호협력을 위해 2015년 5월 13일 기증한 것이다. 역시 중국풍이 보인다.

 

 

남해 양아리 석각으로 이 글자의 의미를 해독하지 못했으므로 서복과 관련이 여부는 아직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서귀포, 남해, 거제도에 똑같은 형상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드디어 금산의 제1봉을 만난다. 이 봉우리를 오르면 부소암(庵)이란 절과 부소암(岩)이란 바위를 만난다. 그러니 부소암은 절과 바위 두 가지를 동시에 의미한다.

 

 

저 바위를 오르기 위해선 나선형 계단을 올라야 한다

 

 

 

 

 

부소암자에서 보는 건너편 바위로 가는 다리, 다리를 건너기 전 부소암이란 특이한 바위를 본다.

 

 

부소암자 뒤 바위에 새겨진 산신, 보통 사찰에서 자주 보이는 민간신앙의 한 형태다.

 

 

부소암(일명 법왕대)

중국 진시황의 첫째 아들 부소가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돌아갔다는 전설이 있으나 전설일 뿐....

그런데 바위 형태가 꼭 인간의 뇌를 닮은 특이한 모양이라 많은 사람이 관심을 둔다.

부소암(庵)은 저 부소암(岩) 왼쪽 뒤편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법당 겸 종무소로 쓰는 단출한 암자다.

 

부소는 진시황의 큰아들이다. 성격이 굳세어 진시황과도 의견대립을 보일 만큼 강직한 성품이다.

그러다 보니 진시황의 미움을 받아 국경수비대로 밀려나기도 했다. 시황제가 전국 순행에 들었다

가 비명횡사를 하게 되자 내시 조고가 시황제의 유조를 위조하여 외손자인 막내 호해를 황제로 세

운다. 결국, 거짓 유조로 호해가 황제로 책봉되고 부소는 자결하고 만다.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에 부소가 이곳에 유배되었다는 전설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르겠다.

혹여 부소가 이곳으로 유배를 왔다면 중국 역사에 그 사실이 없을 리 없다.  

 

 

 

 

상사암

이 바위는 조선 19대 속종대왕 시절에 여수 돌산지역 사람이 이곳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이웃에 사는 아름다운 과부에게

정신을 뺏겨 상사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남자가 죽을 지경에 이르자, 과부가 이 바위에서 남자의 상사를 풀었다 하여

상사암으로 부르게 되었다.

 

아무래도 과부가 그 남자의 상사를 해결할 땐 봄에서 가을까지의 계절로 생각된다. 남녀가 유별하던 조선 시대에 이곳까지

올라와 벌건 대낮에 야합하였으니 참 별나기도 하다. 그 과부도 은근히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고, 결국 그와 사랑을 이룸

으로써 자신을 의탁하여 생계를 해결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게 아닐까.

 

 

 

향로봉

 

 

 

 

 

상사바위가 워낙 커 여러 모양과 바위를 보여준다

 

 

상사암에서 보는 능선의 암봉군락

 

 

 

 

 

 

 

금산

한라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명산으로 많은 전설을 담은 기암괴석이 금강산을 빼 닮았다 하여 소금강 혹은 남해 금강으로 불린다.

이성계가 백일동안 기도한 후 왕위에 오르자 고마움의 표시로 비단 금(錦)자를 써서 이름을 금산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상사암은 금산의 비경을 한눈에 가장 멋지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저 바위 하나하나를 다 돌아다니며 봐야 하는 데, 너무 늦게 도착하여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그러지 못한 게 아쉽다.  

 

 

금산의 비경 속에 자리잡은 보리암은 우리나라 3대 기도도량 중 하나다.

 

 

 

 

 

향로봉 가는 길에 보는 상사암은 좀 전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형태를 보인다  

 

 

한결 가까워진 보리암

 

 

향로봉은 가까이서 보니 두 개의 바위가 정상을 차지한다.

 

 

옆으로 더 돌아서 보는 향로봉

 

 

향로봉과 상사봉 한번에 보기

 

 

향로봉에서 보는 제석봉과 일월봉. 위에 있는 바위가 일월봉, 아래쪽 목책이 둘러쳐진 곳이 제석봉이다.

 

 

 

바위가 서로를 의지하며 영겁의 세월을 지나왔다.

 

 

좌선대(맨 오른쪽 바위)

신라의 의상대사, 원효대사, 윤필거사 등 삼사가 수도좌선을 하였던 자리라고 한다.

 

 

금산산장

 

 

좀 더 가까워진 보리암, 오른쪽으로 길게 떨어지는 암봉이 만장봉이다.

 

 

보리암은 신라 신문왕 683년에 원효(원효)대사가 창건한 절로 알려졌다. 조선 시대에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개국한 것에 감사하는 뜻에서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산 이름을 금산, 절 이름을 보리암으로 변경했다. 

 

고려 시대에는 강화도와 남해에서 팔만대장경을 찍어 냈다. 남해에는 ‘남해분사도감’(南海分司都監)이라는 팔만경 제조 분

점이 있었다. 강화도가 팔만대장경 제조 본점이라면 남해는 분점이었던 셈이다. 강화도에 마니산이 있다면 남해에는 금산이

있다. 마니산에는 단군이 제사를 올리던 참성단이 있다면, 금산에는 보리암이 있다.

 

현재 한국의 4대 관음 성지가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사, 여수 향일암, 그리고 남해의 보리암이다. 불교도들에게는 너무

유명한 기도 터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도가적인 취향이 물씬 배어 있는 곳이다.

월간 <산>에 연재된 ‘동양학 박사 조용헌의 영지 기행’을 일부 발췌한 것임

 

 

 

 

 

 

 

맨 왼쪽 바위가 일월봉, 가운데 암봉은 위 아래로 나누어져 윗쪽 바위가 대장봉 아랫쪽 바위는 형리암이다.

 

 

일월봉 위에 앉은 작은 바위

 

 

이 바위는 이름이 뭘까?

 

 

 

 

 

 

 

 

 

 

 

 드디어 금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고, 정상 표지석은 봉수대 아래 위치한다.                                       

 위에 있는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국가의 통신제도다. 왜구의 침범이 잦은 곳이라 자주 이용했을 법하다.

 

 

봉수대에서 보는 풍경

 

 

 

상금산 유홍문이란 한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바위 두개가 겹쳐진 모양이 거의 비슷해 보인다.

 

 

한 칸 내려오니 어느 산악회에서 금산의 표지석을 따로 설치하기도 했다.

 

 

 

 

 

 

 

 

보리암 일부

 

 

 

지난봄, 바로 옆에 있는 사량도의 지리망산을 다녀올 땐 전날 밤 버스로 출발하여 이른 아침부터 탐방을 시작했다.

같은 거리인데도 이번엔 아침 여덟 시에 출발하여 산행 들머리에 오후 2시에 도착했으니 한참 늦은 시각이다.

산행은 오후 여섯 시 반까지 약 네 시간 20분 정도 주어졌지만, 일몰 시각이 18:12이니 산행 종료 시점으론 좀 늦다.

보리암에서 이 화엄봉을 찍을 때 공교롭게도 구름에 가려 제 모습이 안 나온다.

그럴 뿐만 아니라 이번 산행 사진 전체가 선명하지 못하다.

 

더군다나 돌아올 땐 어차피 서울 도착 시각이 12시를 넘을 때라 대중교통도 다 끊겨 애매한지 여수를 들러 야경을

구경했다. 자정에 출발하여 길이 막히지 않아 신사역에 새벽 네 시에 떨어졌다. 벌써 가을이라고 기온이 뚝 떨어져

날은 춥고 아직 대중교통은 열리지 않았다.

애매하게 산행일정을 잡아 산행도 제대로 못 하고 다음 날도 비몽사몽 온종일 헤매게 한 최악의 산행일정이다. 

 

 

오른쪽 바위의 모양이 화엄의 화(華)자를 닮았다 하여 화엄봉이다.

신라의 유명한 원효대사가 이 바위에서 화엄경을 읽었다 하여 화엄봉이란 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잠시 구름에 가린 데다 역광이라 사진이 아주 어둡다.

 

 

기도빨 좋다는 해수관음상

 

 

양아리를 들머리로 산행을 마치고 보리암을 들리면 대략 산행은 끝난다. 그때부터 하산이 시작되며 내려가는 길엔

금산이 숨겨놓은 마지막 보물이 그림처럼 나타난다. 그중의 하나가 이 작은 동굴로 깊이는 약 10여m 정도로 깊다.

 

 

 다른 곳은 서서히 단풍이 드는데, 장군암은 기가 쎈지 푸른 나뭇잎이 이채롭다.  

 

 

위에 있는 작은 동굴을 구경하고 내려오니 사방이 꽉 막힌 암봉이 나타난다. 빠져나갈 공간이 있을까 염려할 즈음

갑자기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동굴이 나타난다. 동굴은 큰 게 두 개, 작은 동굴까지 하면 여러 개나 된다.

동굴은 옆으로만 뚫린 게 아니라 천장으로도 뚫려있다. 금산에서 제일 유명한 이른바 쌍홍문이다.

 

나가면서 왼쪽에 있는 쌍홍문이다.

 

 

큰굴이 두 개나 있어 쌍홍문이라 한다.

홍(虹)자는 무지개처럼 생긴 다리나 무지개를 의미한다. 안쪽에서 보면 꼭 무지개처럼 반원형이다.

등산할 때 본 부소암은 흡사 인간의 뇌를 닮았는데, 이 쌍홍문을 밖에서 보니 해골의 눈 모양을 연상시킨다.

 

 

 

쌍문홍에서 보는 장군암

장군이 검을 짚고 봉을 향하여 서 있는 형상이라 하여 장군암이라 하였으며, 금산의 첫 관문인 쌍홍문을 지킨다하여 일명 수문장이라고도 한다.

 

 

남해 금산은 산림청에서 정한 100대 명산의 하나다. 너무 먼 거리에 있다 보니 산악회에서 무박 산행으로 일정을 잡았다.

같은 무박으로 산행을 잡으려면 서울에서 밤 11시 전후로 출발하여 일출을 보는 산행을 했다면 귀로가 좀 더 편했겠다는

생각이 드는 아쉬운 산행이기도 했다. 그래도 인기 산이라 호응도가 좋아 버스 두 대로 출발한 산행이다.

원행으로 무척 힘든 산행이었지만 섬 산행의 독특한 여러 풍광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멋진 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