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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인천 계양산성 온전히 둘러보기

by 즐풍 2023. 12. 30.

2023_222

 

 

2023. 12. 26. 화요일 11:21~12:25, 1시간 4분 탐방, 휴식 없음, 1.9km 이동

 

 

춥던 날씨가 풀리며 기온이 많이 올라갔다.

기온이 오르며 내일은 미세먼지가 극성이라니 서둘러 계양산성을 탐방할 생각에 집을 나선다.

인천의 계양산을 몇 번 다녀올 때 계양산성은 스쳐가며 건성으로 봤다.

당시에는 산성에 관심이 없던 때라 그럴 만도 했다.

 

최근 산성 탐방에 관심 갖고 보니 문득 계양산성을 살펴보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계양산 정상까지 오르지 않고 계양산성만 둘러본 후 인천지역의 여러 박물관도 찾을 생각이다.

지하철을 환승하다 보니 제법 많은 시간이 걸린다.

계산역에서 내려 계양산성박물관까지는 걸어서 10여 분만에 도착했으니 완전 역세권 산성이다.

 

 

계양산성 탐방코스

 

 

계양산성에 들려 산성과 관련된 자료를 먼저 읽고 가는 게 좋겠다 싶어 올라가니 문이 닫혔다.

성탄절인 25일 월요일이 휴일인 관계로 화요일에 쉰다니 돌아설 수밖에 없다.

산성박물관과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10여 분 천천히 오르면 바로 산성이 나타난다.

 

 

 

 

 

 

계양산성(仁川 佳陽山城)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0호. 계양구 계산동 10-1번지 일원에 위치하는 계양산 정상부(해발 395m)의 동측에 있는 봉우리(해발 202m)를 에워싸며 축성된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계양산은 지리적으로 한강 하류의 서편에 펼쳐진 평야지대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북쪽으로는 김포시가 남쪽으로는 인천광역시 일대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주변지역의 시야가 널리 확보된다. 서쪽으로는 강화도 및 영종도 사이로 서해가 흐르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한강 북서 방향으로 김포와 일산 사이에 흐르고 있다.

이 성에 관한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초기 문헌인 『신중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興地勝寶)』에 “석축(石築)으로 둘레는 1,937척이다. 퇴락하였다."라고 하여 16세기에는 이미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각종 지지류에도 동일한 내용이 전한다. 이후 임진왜란에는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가 점령한 후 수축하여 왜군의 본거지로 삼고 예하부대가 주둔하였으나 한양의 주력부대가 남하 철수할 때 함께 철거하였다.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 때 청군이 이 지역을 통과하면서 계양산성의 전위부대인 귤현(橘峴)의 주둔군과 약간의 전투가 기록되어 있어 당시까지는 경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병자호란 이후 계양산성은 관리가 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되어 폐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성곽의 둘레는 1.184m이며, 평면 형태는 북서~남동 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마름모꼴로 남벽이 길고 북벽의 길이가 짧다. 성내 고도는 남서쪽이 높고 북동쪽이 낮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성벽은 암반을 지형에 따라 계단식으로 굴착하고 장방형 석재를 이용하여 단과 열을 맞추어 축조하였다. 성돌의 크기는 높이 20~25cm, 너비 40~65cm이며 하단에서 상단으로 올라가면서 석재의 크기는 작아진다. 체성벽과 능선이 이어지는 부분에 해당되어 방어상 취약한 곳에는 성벽을 돌출시켜 치성을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성내 출입시설인 문지는 3개소가 3 확인되었다. 동문지는 체육공원 시설이 건립된 지점이고 서문지는 산성으로 진입하는 소로가 개설된 곳이다. 북문지는 동문에서 북동쪽으로 약 130m 지점에 평탄지가 조성되어 건물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중 동문지의 대한 발굴조사 결과 집수정이 확인되었다. 동문지와 접한 집수정은 제1 집수정으로 하부를 방형으로 축조하고 상단은 다각형으로 쌓아 최상단은 원형에 가깝게 축조하여 상원하방(上圓下方)의 형태를 취한다. 측벽의 축조방법은 성벽 축조수법과 비슷한 양상이다.

제1 집수정 위쪽에는 제3 집수정이 존재하며 제1 • 3 집수정의 사이에는 제2 집수정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제3 집수정온 정사각형에 대형이다. 제1 집수정 내부에서는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집수정 기저부의 뻘 다짐층에서 원저단경호(둥근 바닥의 목이 짧고 배부른 몸통을 가진 항아리)와 함께 목간이 출토되었다. 원조단경호는 서울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4~5세기경으로 편년 되고 있는 삼국시대 한성백제 유적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형태의 유물이다. 제3 집수정에서는 6세기 경으로 편년 되는 연화문와당 등이 출토되어 시기를 달리 하며 집수정을 추가로 조성하여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계양산성 제1 집수정 내에서 출토된 목간은 모두 2점인데, 목간 1은 목릉형목(木稜形)의 고(孤, 䉉)라고 하는 목간에 『논어(論語)』의 제5장 공야장(公冶長)의 주요 명구(銘句)를 뽑아 썼다. 목간 2는 하부를 치목 하여 5면의 ‘고’ 형식으로 한 면에만 『논어(論語)』를 초사 하였다. 계양산성에서 출토된 목간의 서법은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서체로, 중국 위진시기에 유행하던 사경체(寫經體)에 해당한다.

성내에서는 묵서명 목간 • 토기류 • 기와류 외에도 가공된 목재, 동물뼈, 거북이 등껍질, 과일씨앗 등도 함께 출토되었다. 2개의 문확석이 확인되어 동문에는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3차례의 발굴조사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신라의 선문계통 기와류와 회청색 토기 편이 주류를 이루고 고려 시대의 자기편과 기와편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집수정에서

출토된 원저단경호와 반구형 자기 구연부 편을통해 초축시기를 삼국시대 한성백제(4세기경)로 보고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

 

계양산성 둘레길은 산성 옆으로 이어진다.

좌측으로 보이는 산성의 대부분은 헐렸으며 잔존 성벽도 보이나 높이나 길이가 작다.

 

무너진 성돌의 대부분은 아래쪽에 흩어졌다.

 

 

 

현재 북문터 주변엔 성벽을 복원 중에 있다.

북쪽부터 동쪽으로 복원하는 공사는 전구간 돌아가며 할 것으로 보이는 데, 여기까지 오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계양산성은 지금까지 여덟 차례 넘게 발굴조사를 통해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의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시대를 이어가며 산성의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 때는 왜놈들도 사용했다.

왜장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가 점령했을 땐 왜군의 본거지로 삼았으나 한양의 주력부대가 남하 철수할 때

철거했다고 한다

당시 철거할 때 제법 많은 곳이 피해를 입고, 이렇게 견고하게 쌓은 곳만 남았겠다.

 

 

 

 

멀리 계양정이 보이는 곳 아래쪽 성벽은 바교적 양호한 편이다. 성 밖으로 다니 내려가 본다.

 

계양산성 전체를 통틀어 가장 상태가 좋은 곳이다.

 

 

신라가 만든 것인지 아니며 고려시대에 개축한 건지 모르지만, 천 년도 전에 이렇게 완벽한 성벽을 쌓다니 놀랍다.

조선 세종대의 학자인 양성지는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다"라고 말한 걸 보면 중국의 만리장성만큼 우리나라의

산성도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를 넘어 조선시대까지 산성과 읍성, 도성의 역사는 계속 이어진다.

 

초목이 생기가 돌 때 이 성벽은 담쟁이넝쿨이 파란 담벼락을 만들며 한 몸이 되겠다.

멀리서 보는 풍경이 제법 멋질 것이다.

 

여전히 기세 좋은 성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올라오니 바로 앞에 계양정이 보인다.

 

 

 

 

계양산성 (桂陽山城)

 

1992년 5월 29일 인천광역시 시지정문화재(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된 계양산성은 계양산(해발 395m) 주봉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해발 230m 지점, 계산동 산 10번지 일원 작은 봉우리에 위치한 석성으로서 축조양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테두리처럼 성을 쌓은 퇴뫼식이고 성벽은 외부만 석재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경사지게 처리한 내탁식입니다.

고산성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성은 축조한 지 1,500여 년이 지난 현재 성벽이 허물어지고 축성형태만 남아있지만 『증보문헌 비고』 기록에 의하면 "계양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석축 1,937척이 퇴락되었다"라고 쓰여 있으며, 1997년 실측결과에 의하면 산성의 총길이는 1,180m이고 성곽의 외부는 잘 다듬어진 돌로 7m 높이로 쌓아 올려진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곳은 동북으로는 한강유역의 김포평야와 남서로는 서해의 관문인 인천해안과 접해있고, 수도 서울과도 연결되어 있어 예로부터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수로 교통의 요지이다. 기본적인 지리적 여건이 외적방어와 배산임수라는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어 군사상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산성이면서 불쑥 튀어나온 능선 중간 부분을 중심으로 축조되어 성내가 사방으로 노출되는 특이한 성입니다. 우리 계양구는 산성을 복원하고 유적지 관리를 위해 발굴조사와 계양산성박물관 건립하였다. 지금까지의 조사결과 중요한 문화재가 출토되었고 국가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향후 국가사적으로 지정하여 체계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출처_계양정 주변의 안내문)

 

멀리 계양산 정상이 보인다.

 

계양산성은 이 산불감시탑과 CCTV가 설치된 곳을 끼고 우측으로 내려가야 한다.

 

북쪽으로 내려가는 끝머리에 성벽이 동쪽으로 이어지는 걸 볼 수 있다.

북쪽이라 나무 그림자에 남은 눈이 제법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발들 디딘다.

 

이곳이 최북단 성곽으로 저곳부터 동쪽으로 휘어지는 구간이다.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지점의 성 밖엔 치성의 흔적이 남았다.

성벽을 온전히 복원한다면 밖에 있는 치성의 높이를 성벽 높이와 같게 올려야 한다.

 

아래 방향의 성벽

 

성 밖으로 잠시 내려와서 성벽상태를 본다.

이곳 치성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성벽을 복원한 구간이다.

 

성벽과 복원 중인 치성인데, 공사의 흐름으로 보아 치성을 완전히 복원할 생각이 없나 보다.

 

다시 성벽으로 올라왔다.

 

북동 지점의 치성에서 50여 m를 더 내려오자 다른 치성이 또 나타난다.

이 치성도 1/3 정도만 높이고 말았다.

 

성벽이 있는 곳은 안쪽보다 높게 쌓았다.

옛날에도 그랬다면 안쪽은 밖으로부터 은폐되는 장소이니 산성으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아래에 있는 두 번째 치성이다.

 

2 치성에서 올려다보는 1 치성 방향 

 

 

 

성 안쪽에서 보는 동북 방향의 풍경

 

 

집수시설 集水施設

 

집수시설은 제8차 발굴조사(2016년 5월~2017년 1월)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집수시설의 중심해발은 142.2~141.4m 평면의 형태는 말각방형과 유사하며, 규모는 정면 14.7m, 측면 6.8m 정도이다.

조성방 법으로는 사면부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경사면의 자연암반층을 굴착한 후 크기 70~80cm 내외의 대형 석재들을 5단 이상 쌓아 석축을 조성하였다.

유물은 토기류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토기 파편 등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흰 천막 뒤로 북문지를 통해 임학공원으로 내려가게 된다.

이곳은 발굴조사와 함께 산성 복원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북문지 앞에서 바라보는 복원공사 구간

계약산성을 쌓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북한산의 북한산성을 쌓은 데는 겨우 6개월 밖에 안 걸렸다.

계양산성은 2016년부터 산성 정비공사를 시작했다는 데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지 알 수 없다.

그런 걸 보면 옛날에 장비도 없이 산성을 쌓을 때 죽기 살기로 전력을 다한 거 같다.

 

북문지에서 남쪽 성벽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구간이다.

성돌은 무너져 주변에 흩어졌지만 토성은 여전히 굳건한 형태로 남아있다.

당시 토성을 쌓을 때 제법 다지기를 잘한 거 같다.

 

 

 

 

 

 

 

 

 

 

 

 

제1집수정 第一集水井

 

제1집수정은 2차 발굴조사(2005년 2월~2005년 5월)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집수정의 바닥은 둥근 형태를 보이다가 지표면으로 올라올수록 네모난 형태를 보인다. 바깥쪽의 직경은 약 13m, 하단부의 직경은 약 6m이며, 최대 깊이는 약 5m이다.

유물은 기와, 토기, 짐승뼈, 패각류, 과일씨앗 등이 있으며, 이중 거북이 등껍질과 목간이 주목된다. 출토된 목간은 오각형으로 논어 제5편 5 공야장 일부가 먹으로 씌어있다. 목간의 잔존 길이는 13.5cm, 두께는 2.0cm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면 : 賤君子ㅁㅁㅁㅁ

2면 : 吾斯之未能信子說

3면: 也不知其仁也赤也

4면 : ㅁㅁㅁㅁㅁㅁㅁ

5면 : ㅁㅁㅁㅁ子曰吾

1) 목간(木) : 글을 적은 나무조각.

2) 공야장(公): 성은 공(公) 이름은 장(長)이며 공자의 제자이자 사위이다.

 

제1집수정 자리는 세월이 흐르며 흘러내린 모래나 흙이 가득 채워져 흔적만 알 수 있게 울타리를 쳤다.

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집수정이다.

우물이 있어야 음식을 만들어 먹고살며 전쟁을 이어갈 수 있다.

작은 계양산성에 세 개의 집수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식수문제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남방향의 마지막 넓은 공터에 만든 쉼터인 육각정에 페인트를 칠하고 있다.

겨울에 하는 공사라 잘 굳을지 모르겠다.

 

처음 산성으로 진입한 곳에 도착하며 산성 탐방은 끝난다.

 

 

계산역에서부터 시작한 계양산성은 천천히 한 시간 걸렸다.

서너 번 계양산을 오를 땐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지만, 실제 탐방에 나서며 역사와 대화하는 시간이었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도 중요한 격전지였겠으나 역사적 사료는 남아있지 않다.

임진왜란 때에는 잠시 왜군이 장악하고, 물나날 때 훼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 산성을 이왕 복원하는 마당에 고증을 거쳐 잘 복원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