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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서산 해미읍성과 태안해안 용난굴 간단히 보기

by 즐풍 202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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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1. 11. 토요일

 

 

통장협의회에서 추계 단합대회를 한다기에 따라나섰다.

오전에 태안해안 솔향기길을 잠깐 돌고, 식사 후 귀로에 서산 해미읍성을 들리는 것이다.

두 코스 모두 다녀온 데지만 사진 봉사를 위해 떠났다.

몇 명 안 되는 인원인데도 지역 국회의원과 기초의원 몇 분이 배웅을 위해 참석하셨다.

이런 기회로 정치인으로 산다는 건 개인생활을 접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이번 포스팅은 중요성에 비추어 해미읍성을 먼저 작성하고, 솔향기길은 뒤로 돌렸다.

사진 봉사로 포스팅을 할 만큼 풍경사진을 담지 못해 사진 몇 장 올리는 정도로 간단하게 끝낸다.

 

 

서산 해미읍성의 남문인 진남문을 통해 읍성에 들어선다.

 

 

 

서산 해미읍성 (瑞山 海美邑城)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 17년(1417)부터 세종 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

(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되었다.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

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 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으며, 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

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

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

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해미읍성 → 서산 해미읍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출처_문화재청)

 

 

 

 

 

 

 

 

천주교 신자 박해와 관련된 회화나무는 그날의 아픔을 간직한 채 여전히 이곳을 지킨다.

 

 

 

 

읍성엔 유독 소나무가 많다.

서산 해미읍성도 동헌 뒷산인 고지대에는 소나무 군락지가 멋진다.

객사 앞에 있는 여러 그루의 소나무 중 이 나무가 가장 멋지다.

 

 

객사와 소나무 

 

 

동헌 (東軒)

동헌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비롯한 현감겸영장(縣監兼營奬)의 집무실로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해미 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 군, 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한 지위였다.

                                                                                                                        (안내문)

청허정으로 이동하며 보는 동헌 전경

 

 

청허정 | 淸虛亭

 

정자는 일반 가옥과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특별히 지은 건물이다.

청허정은 조선 성종 22년 1491 충청도병마절도사 충청병사에 조숙기曺淑沂(1434~1509)가 세웠던 것을

다시 복원한 것으로, 조선전기 대표 학자 성현成俔(1439~1504)의 개인 문집 허백당집虛白堂集에 그 유래가 전한다.

정자의 이름인 '청허'는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이곳에 오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마음가짐을 당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초기의 해미읍성은 충청도 육군사령부 역할을 하는 충청병영성으로 최고 책임자는 병마절도사병사였다.

조숙기가 병사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을 수리하면서 소나무 숲이 우거진 뒷동산에 청허정을 지었다.

이후 이곳에 온 관리들은 청허정에서 무예를 익히거나 휴식을 취하는 등 시를 짓고 글을 남겼다.

1494년 방문한 충청감사 조위(1454~1503)는 청허정 주변 소나무와 멀리 보이는 바다의 풍경에 대한 시를 남겼고,

권오복(1467~1498)의 문집 「수헌집」에 절도사와 수령이 일을 마치고 청허정에 모여 지은 시가 전한다.

1579년 충청병영에서 근무했던 이순신, 1790년 해미로 귀양 왔던 다산 정약용도 이 청허정에 머물렀을 것이다.

1872년 「해미현지도」에는 옛터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1800년대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자리에 일본식 신사가 세워졌다가 광복 후 철거되었고, 1976년 복원한 후 2011년에 다시 정비하였다.

                                                                                                               (안내문)

 

 

 

작년 초여름에 두 달간 태안 안면도에 거주할 때 태안 해안을 돌며 용난굴을 다녀갔다. 

솔향기길을 돈다기에 즐풍이 통장님들을 모시고 이곳을 경유했다.

 

이하 해안의 풍경은 여느 바다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여섬

 

팔각정을 끝으로 마을로 내려가 식당에 들른다.

 

 

태안이 가깝다고 해도 용난굴 근방까지 버스로 들어오는 길은 멀다.

태안은 우리나라에서 칠레에 비결 될 만큼 긴 해안을 가진 지자체이다.

태안군의 최북단에서 최남단인 국립수산과학원 서해수산연구소 태안양식연구센터까지 자동차 운행거리와

시간은 47.6km에 대략 1시간 15분 정도 소요된다.

그런 긴 해안 중에서 이번에 걸은 거리는 고작 6km에 불과할 정도로 짧다.

풍경 사진이 없는 만큼 짧게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