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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강화도의 갑곶돈대와 강화전쟁박물관 관람

by 즐풍 2023. 10. 24.

2023_165

 

 

2023. 10. 12. (목) 오후에 강화도로 들어 감

 

 

오전에 김포의 수안산성과 문수산성, 장릉을 살펴보고 오후에 강화도에 들어왔다.

강화도는 일산에 살 때 근교라 몇 번 다녀가긴 했어도 한두 군데 들리는 게 고작이었다.

이번엔 산성과 읍성, 진··돈대 위주로 다닐 생각에 연결하는 코스를 짰다.

시간이 얼마나 얼마가 걸리든 강화대교를 건넌 후 시계 방향으로 돌리기로 한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갑곶돈대와 강화전쟁박물관이다.

 

 

강화전쟁박물관의 부지에 있어선지 대포가 있는 곳에 누각을 설치했다.

 

 

이섭정 利涉停

이천에 살 때 利川은 이섭대천利涉大川에서 왔다는 걸 알았다.

 

주역(周易)에 의하면 '利涉大川'이라는 글귀가 18번이나 나오는데 대체적으로

『학문과 덕을 쌓고 몸을 기르면 험난한 과정이라 할 수 있는 大川을 건너 큰 공(功)을 세울 수 있었으며

온 天下가 이롭게 된다』라는 의미를 말한다.(이천시청)

 

강화도의 이섭정은 외세침입으로 나라의 국운이 위태로울 때 바다를 건너 강화도에 들어오면 

크게 이롭다는 뜻으로 지었겠단 생각이 든다.

 

 

갑곶돈대 甲串墩臺

소재지: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25번지(원 위치가 아님)
입지: 염하와 접한 언덕 상부에 위치 
축조 시기: 1679년(숙종 5)   형태: 원형 혹은 말각 방형(추정)
규모:  알 수 없음

 

  갑곶돈대는 제물진의 관할 아래에 있던 돈대로, 강화도 동쪽 입구에 위치한 당산이 포함된  능선의 남쪽에 있다. 

염하를 마주 보는 언덕 상면에 위치하며 돈대가 있었을 당시에는 북쪽의  염주돈대와 염하 건너편의 문수산성과 

호응하여 강화 입구를 방어한 제물진의 핵심 시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도도 비교적 높아 주변의 감제와 관방과의 연계가 기대되는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갑곶돈대가 있었던 위치는 현재 (구) 강화대교의 교각이 접하는 언덕 상면으로, 바로 인접한 북쪽으로 천주교 

강화순교성지가, 남쪽으로는 전쟁역사관이 조성되어 있다. 

돈대가 흔적도 없이 멸실되었으나 돈대의 일반적인 구조로 보았을 때 포좌는 3~4개로 염하 방향인 동쪽에, 

문지는 반대쪽인 서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강화부지江華府志』에 따르면 갑곶돈대 북쪽으로 625보 거리에 염주돈이 있으며, 크기에 대한 묘사로 둘레는 

113보, 치첩은 40개라는 기록이 있어 다른 돈대들과 비교해 보아도 작은 규모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갑곶돈대로 소개된 위치는 1999년 육군박물관 조사 당시 원래 돈대의 위치가 아닌 것으로 보고된 바 있으며, 

지역 학자와 관심 있는 사람들에 의해 많은 지적과 검토가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적어도 원 갑곶돈대는 19세기말부터 근현대까지 원형을 보존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이후 폐돈 되고, 해당 위치에 1970년 (구) 강화대교가 건설됨에 따라 다른 유적과는 달리 돈대의 흔적조차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멸실되었다. 


50m 위치에 있던 강화외성의 치성雉城에 해당하는 돌출부를 복원한 후 사적으로 지정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돈대 위치가 아닌 곳이 갑곶돈대로 널리 알려져 있어 이에 대한 검토와 수정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출처_ 조선의 보장지처, 강화 그리고 진・보・돈대)

 

 

 

소포 小砲

구경: 84mm  길이: 159cm  중량: 171kg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방식으로 사정거리는 300m이며,

우리나라 재래식 화포 중 가장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안내문)

 

임진왜란 이후 널리 쓰이게 된 불랑기가 갑곶돈대의 작은 치성에 설치되어 있다.

 

 

지금까지 본 갑곶돈대는 최근에 복원한 일부 성벽에 불과하다.

1970년에 개통된 구 강화대교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던 돈대는 사라져 흔적도 없다. 

 

갑곶돈대가 있던 자리는 이 다리는 건너가기 전에 있는 주차장 부지라고 한다.

사진에서 보는 구 강화대교 다리는 안정성 검사에서 C등급을 받은 후 보수 공사를 거쳐

지금은 자전거와 사람 통행만 가능한 상태이다.

 

갑곶돈대는 얼마 되지도 않은 짧은 구간을 복원한 것이다. 

강화역사박물관 부지에서 바닷가를 경계하고 방어하는 철책선이 아닌 갑곶돈대를 끝내고

역사박물관 가장 밖에 있는 강화 비석군을 먼저 본다.

이곳 비석은 조선시대에 이곳에 부임한 유수, 판관, 군수 등이 선정을 베풀었을 때 만들어 주는 비석이다. 

 

 

 

 

 

드디어 강화역사박물관으로 들어간다.

 

 

 

청동기시대의 돌도끼

 

 

 

이번 여행에서 마주한 강화도에서 제일 잘 생긴 고인돌이다.

 

 

참성단과 삼랑성에 깃든 단군신화

 

강화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인 참성단과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삼랑성이 있다.

참성단은 위가 네모나고 아래는 둥근 형태인 상방하원 上方下圓으로 고려~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제사를

거행하였던 곳이다.

이후 참성단은 민족의 성지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 전국체전 때는 성화를 채화하는 의식이 열리고 있으며

개천절에는 제천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안내문)

 

 

강화도에서 출토된 수막새 

 

발굴된 철제 갑옷의 조각

 

 

 

 

삼국시대에 속하는 611곳의 유구에서 갑주가 출토된 곳은 25곳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철갑은 복제품인지 출토시기나 장소를 기재하지 않았다.

 

강화도를 빛낸 사람들

 

 

대몽항쟁

 

1231년 몽골이 고려를 침략해 오자 무신정권은 강화를 임시수도로 삼고 몽골에 대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1270년 무신정권이 붕괴된 후 개경으로 환도하였으나 삼별초가 강화에서 봉기하여 진도, 제주도로 옮겨가

몽골에 대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Invasion of Mongolia

 

When the Mongol army invaded the Goryeo Dynasty in 1231, Goryeo's military regime used Ganghwa Island

as an interim wartime capital and fought back against Mongolia. (안내문)

 

 

 

고려의 주권을 지켜낸 강화 천도

 

몽골은 고려와 화의를 맺은 뒤 고려에 다루가치를 파견하고 과중한 공물과 노동력을 요구하였다.

당시 고려를 다스리던 무신정권의 최우는 몽골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1232년 도읍을 강화로 옮겼다.

강화가 임시수도로 선택된 것은 바다로 둘러싸여 몽골군이 접근하기 어럽고 해로로 조세를 운송하기 편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몽골은 총 6차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는데, 이는 몽골이 중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고려가 남송과

동맹을 맺고 배후를 공격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고려는 39년간 항전을 계속하다가 무신정권이 붕괴하자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안내문)

 

 

 

 

고려장군

 

우리 고려군은 대부분 농민 출신이다 보니 말 타고 활 쏘는 것이 생활인 몽골군에 비하면

개개인의 전투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네.

또 기병을 양성하려 해도 초원이 많지 않으니 말을 많이 기를 수가 없지.

하지만 고려는 산이 많아 성을 쌓고 충분한 병력을 갖춘다면 방어하기 쉬운 장점이 있다네.

또 적이 닥쳐오면 백성들도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힘을 모아 병사들과 함께 싸우지.

이렇듯 험준한 지형과 용감한 백성들이 있으니 제아무리 초원을 호령한 몽골군이라도 우리를 상대하기는 어려울 걸세

 

 

몽골장군

 

우리 몽골군의 힘은 바로 말에서 나오지.

몽골말은 아랍말이나 유럽말에 비하면 체구가 작고 속도도 느리지만, 사람을 태우고 하루에 100km 이상을

달릴 수 있는 지구력과 어디에서나 스스로 먹이를 찾아내는 강인한 생명력이 있어.

또 말의 젖과 피, 고기는 우리에게 영양을 보충해 주고 말의 빼로는 화살촉도 만들 수 있지.

덕분에 우리 몽골군은 원정을 떠날 때 1인당 5~10마리의 몽골말에 말린 고기만 가볍게 휴대하고

별도의 보급 없이 진군할 수 있다네.

여기에 말을 달리면서 등 뒤로 활을 쏘는 궁술 마상전투에 최적화된 검술, 후퇴와 진격을 반복하는 전술은

우리 몽골 기마대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강의 군대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야.

 

 

 

 

삼별초의 출발지, 강화

 

삼별초는 좌별초 • 우별초 • 신의군으로 이루어진 특수부대이다.

원종 1219~127401 몽골과 화의를 맺고 1270년 개경환도를 선포하자, 이에 반발한 삼별초의 배중손• 노영희

등이 6월 1일 왕족 승화 후 온을 새 임금으로 옹립하여 반동정권을 수립하였다.

삼별초는 6월 3일 강화를 출발하여 두 달 후 진도에 정착, 이를 거점으로 개경정부와 몽골에 저항하였다.

1271년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총공격으로 배중손이 전사하자 김통정의 지휘로 제주도로 옮겨 1273년까지

항전을 계속하다가 결국 진압되었다.

 

Sambyeolcho Started in Ganghwa

 

When the Goryeo kingdom reached a state of peace with Mongolia in 1270, Sambyeolcho,

the special forces of the Goryeo dynasty, established their own government against the Goryeo Kingdom

and continued to fight after moving to Jindo.

They retreated to Jeju Island following a full scale attack from the allied forces between Mongolia

and Goryeo in 1271, and continued to fight until they were repressed in 1273.

                                                                                                                   (안내문)

 

성을 쌓는 그림

 

 

 

 

강화성곽의 건설

 

1232년 강화로 천도한 고려 조정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방어시설을 조성하였다.

천도를 전후하여 궁궐을 둘러싼 내성을, 1233년부터 1237년까지 강화도 동쪽 해안에 외성을 쌓았고

1250년에는 도읍을 둘러싼 중성을 쌓았다.

내•외• 중성 모두 토성으로 축조되었는데, 강화중성의 경우 기저부에 석렬 시설을 조성한 후 그 위에

판목시설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 흙을 겹겹이 다져 쌓는 과정으로 축조되었다.

강화 성곽은 1259년 몽골과 화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몽골의 요구에 의해 모두 헐렸는데, 이후 무너진 채

방치되었다가 조선 중기 이후 강화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인정되면서 1618년(광해군 10)부터 수많은

개축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Construction of Ganghwa Fortress

 

After moving the capital to Ganghwa Island, the Goryeo kingdom started building an inner fortress around

the palace and an outer fortress around the east coast of Ganghwa Island from 1233 until 1237,

and started building a middle fortress that surrounded the capital city in 1250.

The Ganghwa Fortresses were knocked down while trying to sue for peace with Mongolia.

They were reconstructed during the Joseon dynasty, and their remains or ruins have been preserved to these days.

                                                                                                       (안내문)

 

 

정지장군 갑옷 (鄭地將軍 甲衣)

 

갑옷이란 싸움터에서 적의 화살이나 창, 검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입었던 보호 장비로, 

이 갑옷은 철판과 철제 고리를 엮어 만든 경번갑이다.
정지장군 갑옷(鄭地將軍 甲衣)의 주인인 정지장군은 고려 충목왕 3년(1347)에 태어나, 

왜구를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공양왕 3년(1391)에 세상을 떠났다. 

이 갑옷은 장군이 왜구를 물리칠 때 직접 착용했던 것으로 후손에 의해 전해진 것이다.

총길이 70㎝, 가슴둘레 79㎝, 소매길이 30㎝로 세로 7.5∼8㎝, 가로 5∼8.5㎝의 철판에 구멍을 뚫어 

철제 고리로 연결하여 제작하였다. 

앞면에는 철판 6조각을 한 줄로 연결한 것이 6줄이 있는데, 그중 두 줄은 여미게 되어 있다. 뒷

면은 7조각을 한 줄로 연결한 5줄로 등을 가릴 수 있도록 하였다. 

어깨 팔은 철판 없이 고리만을 사용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앞면 아래쪽에 약간의 손상이 있지만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갑옷으로 매우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출처_문화재청)

 

이것은 복제품이다.

 

 

정묘 •병자호란

 

1627년(인조 5)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국왕은 대신들을 거느리고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연미정에서 후금과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정묘호란 이후 강화는 군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도호부에서 유수부로 승격되었다.

1636년(인조 14) 청나라의 침입으로 병자호란이 일어 나자 왕족과 대신 등은 강화로,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군에 대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강화 방어의 책임을 맡은 관리들의 태만으로 강화는 곧 청군에 함락되었으나, 남문 문루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김상용을 비롯하여 많은 관리 들과 여인들이 청군에 항거해 순절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결국 국왕은 청에 항복하게 되었다.

 

Invasion of the Qing Dynasty

When the Qing invaded the Joseon in 1636, the royal families, lieges, and civilians moved to Ganghwa Island and fought back against them, with many losing their lives resisting the army of the Qing.

                                                                                                                          (안내문)

 

병인 • 신미양요

 

조선의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던 강화도는 19세기 통상을 요구하는 서구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사건인 병인박해를 빌미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에 상륙하여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는데 양헌수 부대가 프랑스군과 정족산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1871년(고종 8)에는 제너럴셔먼호의 방화사건을 빌미로 미국의 아시아함대가 강화를 침략하여 신미양요가 발생

하였는데 광성보에서 어재연 장군이 결사 항전하여 미국의 침략을 막아냈다.

 

Invasion of France and America

 

French fleets and American fleets invaded this island in 1866 and 1871, respectively, but had to retreat

because of the determined courage of Joseon's army.  (안내문)

 

 

대장군포 조선초

 

 

 

1. 수자기 帥字旗 전시회를 열며

 

올해는 어제연(1823~1871) 장군이 탄생한 지 꼭 200주년입니다.

어제연 장군이 살았던 19세기는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를 침탈했던 시기였습니다.

1840년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개항시켰으며, 1853년 미국 해군 재독 페리(Nawhew C Pony)는

함포외교를 통하여 다음 해 일본의 문호를 개방시켰습니다.

이러한 서세동점의 물결은 조선에도 예의 없이 밀려왔습니다. 서구 열강의 선박들이 조선 연안에 나타나

문호개방을 요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1866년(고종 3) 7월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같은 해 10일 병인양요가

일어났습니다.

1871년(고종 ) 6월에는 미국이 포함외교로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한 조선 원정을 감행하면서 신미양요가

발발했습니다. 

 

어제연 장군은 조선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마진 신미양요 때 그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구국의 일념으로 강화도

손돌목에서 최후의 결사항전을 벌였으나 안타깝게도 부하들과 함께 호국의 별이 되었습니다.

금번 전시되는 어제연 장군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하고자 했던 장군의 고뇌와 리더십,

그리고 함께 순국하신 장병들을 추모하며 기억하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전시회를 통하여 어제연 장군이 걸었던 고난의 길을 따라가면서 장군의 생애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2. 호국의 별'이 되다

 

"어재연은 금위여단을 인솔하고 광성보로 들어가서 배수진을 치고 척후병도 두지 않았다. …

재연은 분연히 칼을 들고 싸우다가 칼이 부러지자 납으로 된 탄환을 쥐고 적들을 향해 던졌다.

그 탄환에 맞기만 하면 적들은 즉사하였다.

그가 가지고 있던 탄환이 다 떨어지자 적들은 그를 창으로 난자하였지만, 그는 반 발자국도 옮기지 않고 죽었다.

적들은 그의 머리를 베어 갔다. 어재연이 이미 전사하였으니 적들은 수비가 되어 있는 줄 알고 모두 도주하였다."

황현, 『매천야록」

 

이렇듯 어재연 장군과 함께 '효국의 별'이 되어 가신님들, 모두 최후의 일각까지 피를 토하며 싸웠습니다.

기꺼이 '순국'으로 구국의 길을 따라가셨습니다.

순국선열이 흘리신 피와 땀과 눈물, 우리는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3. 출생과 성장 | 어재연과 그의 가문

 

어재연은 본관이 함종(현 평안남도 강서군), 자(字)가 성우(性于), 추증 관직이 병조관서, 시효는 충장(忠壯)이다.

1823년(순조 23)부터 1871년(고종 6)까지 살았다. 그의 시조는 화인(化仁)으로 고려 때 동정 벼슬을 지냈다.

중시조(양숙공파) 13세 세공(世恭)은 이시애의 난 때 공을 세워 아성군(牙城君)에 봉해지고,

병조관서•화참찬•효조관서 을 역임하였다.

부친은 용인(用仁)으로 벼슬은 하지 않았고, 호조참판으로 증직을 받았다.

모친은 기계 유씨(俞)로 유한찬의 딸이고, 후에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어재연은 3형제 중에 둘째이다. 그는 청주(육개) 한씨와 결혼하였다. 부인은 부사를 지닌 한택리의 딸이다.

그의 외동아들 병수는 형의 후사로 보냈다. 그는 조카 병선을 입양했으며, 후에 음직으로 현감을 지냈다.

형 재호는 일찍이 세상을 떴고, 아우 재순은 벼슬하지 않았으나 신미양요에 참전한 공으로 참의공에 추증되었다.

 

4. 무관의 길을 걷다

 

어재연은 19세인 1841년(헌중 7)에 무과에 급제하여 총융초관(40 매 중)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훈련원 주부, 형조 정량, 광양현감, 평안 중군, 내금위장, 훈국별장, 풍천부사, 대구영장, 오위장,

장단부사, 공중도병마전도사, 회정부사, 금위영중군경오 위도충부부충관, 진무중군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30년 동안 다양한 보직을 거치는 관직 생활을 하면서 정성으로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백성들도 그를 항상 존경하며 따랐으며, 그가 임지를 떠난 뒤에도 항상 사모하여 잊지 못하였다.

그는 평생 봉록과 쓰고 남은 재물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다.

항상 이득을 멀리해서 집안이 조용하였고, 삶과 죽음에 이해를 초월한 마음은 평생 한결같았다.

 

 

 

 

 

5. 어재연, 신미양요의 중심에 서다

 

1866년 8월 미 상선 제너럴셔먼효가 대동강을 불법적으로 항행하다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미국은 이를 빌미로 조선과 통상수교를 위해 1871년(고종 8) 6월 1일 미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Rodgers, 1812-1882)을 앞세워 군함 5척과 1,230명의 병력을 조선에 파병하였다.

조선군은 수로 탐색을 위해 허가 없이 강화해협에 접근하는 미 군함에 포격으로 경고하였다.

미국은 포격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였으며 조선은 이를 거부하면서 전원이 감돌았다.

이때 조정은 어재연 장군을 진무 중군에 임명하고 600여 명의 군사와 함께 광성보로 급파하였다.

 

미군은 6월 10일 함포사격을 앞세워 병력을 상륙시킨 뒤 초지진을 점령하였다.

6월 11일 덕진진까지 점령한 뒤 계속해서 광성보로 진격하였다. 미군은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에서 함포사

격을 지원받은 뒤 광성보로 돌격해 들어왔다.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은 화력의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맞서 싸웠다.

어재연 장군은 수자기를 높이 세워 직군에게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였고, 휘하 군사들과 함께 최후의 백병전을 벌였다.

심지어 돌과 흙덩이까지 던지며 항전하였다.

어재연 장군 이하 장교 5명을 비롯하여 350여 명의 장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광성보를 점령한 미군은 조선군의 수자기를 비롯하여 각종 군기와 화기 등을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미국 아시아 함대는 강화도의 요새를 함락시켰으나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으며,

결국 확전을 피한 채 퇴각하였다.

 

 

6. 신미양요의 역사적 의미

 

불법적인 침공으로 시작된 신미양요에서 미군은 초지진, 광성보 등 강화도 요새를 함락시켰지만

그들이 목표했던 통상교섭은 실패하였다. 결국 미 아시아 함대는 별다른 소득 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의 죽음을 무릅쓴 호국의지는 신미양요를 조선의 승리로 인식하게 하였다.

반대로 청나라와 미국에서는 아시아 함대의 조선침공이 실패하거나 별다른 성과가 없다는 평가를 받게 하였다.

또한 조선정부는 전국의 요충지에 최화비를 세워 쇄국양이(鎖國攁夷) 정책을 강화하는 등 서양 열강에 문호를

더욱 굳게 닫아버렸다.

신미양요 이후 삼군부를 강화하는 등 군사제도를 정비하였고, 강화도의 군사적 중요성이 떠오르며 포량미라는

전세의 징수를 통해 진무영의 군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화약과 탄환 등을 강화도 및 주요 군진에 확충하였다.

 

 

7.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과 미군의 무기 비교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의 주요 대포는 17세기 중엽에 만들어졌던 홍이포와 불랑기포가 주류를 이루었다.

탄환도 폭발하는 작열탄이 아니라 둥그런 쇳덩이 철환이었다.

홍이포의 유효사거리는 약 7~800m 정도였으나 명중률은 크게 떨어졌다.

반면 미군의 20파운드(9kg) 달그렌 강선포는 최대사거리 2,000m에 달하였다.

60파운드(27kg) 페릿포는 최대 7km까지 포탄을 날려 보냈다.

8인치 달그렌 셀건포는 포탄이 폭발하는 작열탄을 날려 보낼 수 있어 살상력과 파괴력이 컸다.

개인화기의 경우 조선군은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재래식 무기였던 화송충(유효사거리 약 120m)을 사용한

반면에 미군은 스프링필드 전장식 소충(사거리 약 400m)과 후장식 소중인 레밍턴 콜링블록(약 910m)을

사용하였다.

장전속도나 파괴력, 명중률에 있어서 조선군의 화승층은 미군의 소총에 대적할 수 없었다.

 

 

 

8. 빼앗긴 유물들

 

현재 국외 소재 한국문화재는 229,655점(2023.1.1.)에 이르며 아시아, 유럽, 아페리카 대륙 27개의 나라에

흩어져 있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탈취해 간 문화재 목록은 미국 측 기록에 따르면, 수자기를 비롯한

군기 150개, 파괴되거나 탈취당한 무기가 481점에 달한다.

미국은 1814년 The United States Navy Trophy Flag에 대한 미 의회법과 1849년 제임스 포크 대통령의

행정명령('전쟁 중 적의 군기, 부대기 등을 몰수할 것을 명령하고 보관•보존•전시를 위해 미 해군사관학교를

관리기관으로 정한다.)에 따라 운영하고 있다.

실제 수자기 이외에도 우리의 군기들을 오랫동안 진열장에 보관하였다.

1950년 렉싱턴헤럴드(Lexington Herald) 지에는 신미양요 노획물인 화승총, 불량기, 투구, 전립, 금고기가

소개된 바 있으며, 트랜실베니아대학에도 불랑기와 투구를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불법적으로 반출되거나 약탈당한 문화재의 환수는 국제법의 규율, 보유국과 원산국의 소유권, 이념적 논쟁을

넘어 외교적 갈등을 수반하는 복잡한 문제이다.

정치적•외교직•경제적 측면에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보다 공유의 개념으로 기증, 외교적 우효 증진 및 학술

교류 등의 형태로 장기 대여나 환수의 문제를 고려해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국의 소재 문화재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끊임없이 반환을 위해 노력해 보는 것이다.

 

 

9. 기억과 추모, 그리고 역사

 

어재연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미양요 참전 장병들은 최후의 일각까지 백병전을 치르다가 참호 속에서 전사

하거나 강으로 몸을 던졌다. 쌍층비각 내에 새겨진 전사자 이름은 56명으로 확인되었으나 미국 측에서는

조선의 전사자를 350여 명이라고 집계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그들의 장렬한 전사를 추모하면서 극진한 예를 다하였다. 이들에게 상당하는 관직을 추증하였으며

강신제를 올려 떠도는 영혼을 위로하였다.

옥수 조면호(18091.887), 위사 신석회(1808-1873), 농산 신득구(1850-1900), 명미당 이건창(1852-189)은

어재연과 참전군의 위업과 넋을 시로써 노래하였다.

1976년 대한민국정부는 이곳 강화도를 효국의 성지로 성역화하였다. 강화군에서도 매년 신미양요를 기억하며

추모하는 광성제를 봉행하고 있다. 신미양요 호국영령 추모사업은 '어재연장군 추모 및 신미양요기념사업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하고 있다. 국방부 전쟁기념관에서는 2차례에 겹쳐 어재연 장군을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

(2010년 5월, 2021년 7월)하여 현양행사 및 전시를 하였다.

강화 역사박물관과 강화전쟁박물관, 전쟁기념관의 상설전시실에서는 병인양요와 더불어 신미양요를 전시

하고 있다. 신미양요는 병인양요와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비중 있게 서술되고 있다. 초등학교 『사회』, 중학교

역사』, 고등학교 한국사』, 그리고 대학 교재에서도 빠짐없이 다루어진다.

어제연과 함께 조국을 위해 몸 바쳤던 그날의 전망무사들이 역사의 중심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제연에 대한 안내문이 그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알겠다.-

 

 

동방의 조그만 나라였던 조선이 미국을 상대로 이기다시피 한 유일한 전투다.

강화도에 가면 어디든 어제연에 대한 안내문이 많다 

어제연은 강화도에서는 이순신 장군만큼 위대한 장군으로 칭송받는다.

 

 

실제 수자기는 세로 430cm, 가로 413cm의 크기다.

 

 

 

 

 

 

 

 

 

 

어재연과 신미양요를 기록하다 Records of the Sinmiyangyo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 Maecheonyarok, Collection of Hwang Hyeon's History Book

 

辛未 夏, 美人犯江華, 那兵使魚在淵, 以巡撫中軍禦之, 戰敗死, 在淵率禁旅, 入廣城堡, 背水而陣, 

不置斥堠, 賊乘霧掩之, 踰堡攔入, 在淵奮剑格鬪, 剑折. 掬鉛九搏之, 中者立倒, 丸盡, 賊亂槊之,

不離跬步而死, 賊割首而去, 在淵旣死, 賊亦知有備, 遂走, 敗報至, 朝野震駭, 贈兵判, 諡忠壯, 喪返,

雲峴倡言于朝曰, 不迎魚兵使喪者, 皆馬天主學者也, 由是, 傾朝出迎, 車馬延数十里, 耆老言純祖癸西

(十三年:편자주), 鄭忠壯著後, 所未有也, 在淵弟在淳, 白衣從軍, 與兄俱死, 亦贈吏議

 

"신미년(1871) 여름에 미국인이 강화도를 침범하자 전병사(前兵使) 어재연이 순무중군으로 임명되어,

그들을 방어하다가 전사하였다. 재연은 금위여단(禁衛旅團)을 인솔하고 광성보로 들어가서 배수진을 치고

척후병도 두지 않았다.

적병들은 안개가 자욱이 낀 틈을 타서 광성보를 넘어 엄습하였다. 재연은 분연히 칼을 들고 싸우다가 칼이

부러지자 납으로 된 탄환을 쥐고 적들을 향해 던졌다. 그 탄환에 맞기만 하면 적들은 즉사하였다.

그가 가지고 있던 탄환이 다 떨어지자 적들은 그를 창으로 난자하였지만, 그는 반 발자국도 옮기지 않고 죽었다.

적들은 그의 머리를 베어 갔다. 어재연이 이미 전사하였으나 적들은 수비가 되어 있는 줄 알고 모두 도주하였다.

이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조야는 온통 진동하였다. 그에게는 병조판서가 증직 되고 충장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시신이 돌아오자 대원군은 조정에서 제창하기를,

"어병사의 상여를 맞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천주교인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온 조정이 출영 하여 수레와 말이 수십 리나 줄을 이었다. 이때 노인들은 순조 계유년(1813)에

충장공 정원의 장례를 치른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재연의 아우 재순(14)도 백의종군하여 형과 함께 전사하였으므로 그에게도 이조참의를 증직 하였다."

 

 

 

 

 

 

 

 

 

 

 

 

 

 

 

 

 

 

 

프랑스와 미국이 강화도를 침범한 이후 이번엔 일제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운요호사건과 강화도조약

 

미국의 무력에 굴복해 1854년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1867년 정권을 무너뜨리고 천황을 앞세운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1868년 부국강병책인 메이지유신을 추진하였으며, 1873년부터 국민징병제를 실시하고 서양식

장비와 훈련을 통해 신식 군대를 양성하였다.

특히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양으로부터 최신식 중대형 군함을 수입하고 이를 통해 자체 군함 건조 기술을

개발하였다. 이후 일본은 조선의 외교문서 접수 거부 및 일본의 부산왜관점거사건 등으로 인해 양국 간 공식

접촉이 단절되자 무력을 동원하여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강화연안을 멋대로 탐색하며 한강 하구로

진입하려는 윤요호를 향해 초지진 포대가 포격을 가하자 운요호는 함포를 사격하여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진으로 이동하여 무자별 표적을 가했다.

일본은 윤요후 사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였으며, 1876년 강화도 연무당에서 일본의 요구대로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안내문)

 

 

 

강화의 교육구국, 조선수사해방학당과 보창학교

 

조선은 1893년 9월 영국과 협의하여 강화에 해군사관학교인 수사해방학당 또는 통제영학당·충제영학당을

강화도 갑곶진에 세웠다. 1894년 영국에서 초빙된 윌리암 콘월 wlitam calwal 대위의 지도 아래 생도와 수병

160명이 교육을 받았으나 청일전쟁과 일본의 방해로 그해 11월에 폐쇄되었다.

1905년 강화진위대 대장을 사임한 이동휘는 강화읍에 육영학교를 설립하였다. 1906년 고종이 보창학교라는

학교명을 특사特賜 하였으며, 강화의 각 면마다 보창학교 지교가 설립되었다. 보창학교를 통해 배출된

청년들은 31운동을 비롯한 국내외 민족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안내문)

 

 

강화진위대와 대동창의진의 항일의병투쟁

 

일본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반발하여 강화진위대는 일본 헌병대를 상대로 격렬한 항전을 벌였으며, 의병을 조직해 산속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쳤다. 특히 이능권이 이끄는 대동창의진은 전등사에서 대규모 토벌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주요 인물들이 전사하거나 처형당하면서 강화 의병은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으나,

일부 잔존 세력들은 만주 등지로 망명해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안내문)

 

 

 

 

 

 

 

 

 

 

 

 

 

 

 

 

관람을 끝내고 계단에 설치된 두 개의 부조물 중 하나만 찍는다. 어제연 장군의 전투 장면이다. 

 

 

강화역사박물관은 유물이 많지 않다.

대부분은 해설 안내문 위주로 되어 있으며, 신미양요 때의 어제연 장군을 영웅으로 안내한다.

변변치 않은 무기로 당시에도 세계 최강을 상대로 장렬히 싸우고 산화하며 별이 된 장군이다.

 

지금 세계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변변치 않게 여겼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종이호랑이로 만들고,

나라도 없는 하마스가 달걀로 바위 치기식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그들이 자랑하는 아이언 돔을 뚫었다.

두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바뀔지 흥미진진하지만, 유가가 오르는 등 세계경제가 침몰 중이다.

이런 때를 노려 북괴가 어떤 수를 쓸지 모르니 우리 군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